지역에서 본 세상

역사적 진실규명에도 마감시간이 있나

기록하는 사람 2009. 4. 15. 1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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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학 용어 중에 '의도적 망각'이라는 게 있다. 쉽게 말해 '다시 떠올리기 싫은 아픈 기억'을 일부러 잊어버리려는 인간의 본능을 뜻한다.

내가 만난 그런 사람들 중에는 주로 일본군 '위안부' 피해 할머니나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이 많았다. 1997년에 만났던 '훈' 할머니도 그랬다.

열 여섯 나이에 왜놈 군대의 성노예로 끌려갔던 할머니는 온갖 치욕과 고통 끝에 해방을 맞았으나 귀국하지 못하고 캄보디아 원주민들 사이에 숨어 연명해왔다.

해방 52년만에 한국인 사업가를 만났으나 자신이 조선인이라는 것만 기억할뿐 한국말은 물론 아버지·어머니와 자신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했다. 이 때문에 97년 여름 할머니의 혈육찾기 취재에 나선 기자들은 그녀가 한국인이라는 사실 자체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세월이 흘렀다지만 어떻게 자기 이름까지 잊을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1997년 훈 할머니(가운데)가 인천 길병원에서 여동생 순이(왼쪽), 올케 조선애씨와 상봉한 뒤 자신들의 이야기가 실린 신문을 보고 있다.


하지만 바로 그것은 할머니가 킬링필드에서 살아남기 위한 '선택적 기억상실증'이었다. 결국 할머니는 당시 나를 포함한 취재팀에 의해 여동생과 장조카, 올케 등 혈육을 찾게 됐고, 대한민국 국적을 취득해 '이남이'라는 본명도 되찾았다.

피해자들의 '의도적 망각'과 '가역반응'

한국전쟁 전후 국군과 경찰에 의한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족들도 그랬다. 그들 역시 국가범죄의 명백한 피해자임에도 불구하고 '의도적 망각'을 택했다. 피해자임이 밝혀지는 순간, 도리어 '빨갱이 가족'으로 낙인찍혀 끊임없는 감시와 불이익을 받게 된다는 사실을 그들은 알고 있었다. 그들 중에는 '의도적 망각'도 모자라 피해의식의 '가역반응'으로 철저한 반공우익의 길을 택한 사람도 많았다. 마치 빨갱이의 자식이 아니라는 걸 증명이라도 하려는 듯 개혁과 진보에 공공연한 증오를 드러냈다.

나는 그런 분들 중 말년 들어 뒤늦게 후회와 회한의 눈물을 흘리는 경우를 적지 않게 봐왔다. 70대 중후반의 노인이 "이승만이 그렇게 나쁜 놈인줄 몰랐다", "그놈은 인간백정이다"며 가슴을 치는 모습도 봤다.

그러나 늦게나마 그렇게 깨우친 분들은 드문 편에 속한다. 아직도 대다수의 유족들은 '의도적 망각'과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채 말년을 보내고 있다. 기록에서 피해유족임을 알고 찾아간 나에게 아직도 증언을 거부하는 분들이 많다. 특히 남편을 잃은 할머니들 중에는 평생 신문은커녕 TV뉴스조차 본 적이 없어 늦게나마 진실규명 작업이 이뤄지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분들이 대부분이다.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나온 민간인학살 희생자 유골 잔해. @김주완


현실이 이렇다 보니 지난 2005년 12월 '진실·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이 시행돼 피해유족으로부터 진실규명신청을 받았지만, 그 때 신청서를 낸 유족보다 내지 못한 유족이 훨씬 많았던 것이다. 예를 들어 당장 경남 함양군의 경우만 봐도 지난해 마을별 피해자 전수조사를 해본 결과 미신청 피해자가 신청자보다 무려 아홉 배에 달했다.


신청 시기 놓쳤다고 사실도 사라지나

이렇게 된 것은 전국 지방자치단체의 행정협조나 홍보가 미흡했던 탓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신청기간이 딱 1년(2006년 11월 30일까지)으로 한정돼 있었다는 게 문제였다.

물론 법 자체가 한시법이라는 한계가 있다. 그래서 법에도 '(진실규명) 신청은 이 법 시행일부터 1년 이내에 하여야 한다'(19조 2항)고 못박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볼 때 이건 그야말로 행정편의를 위한 조항이다. 국가가 국민에게 가한 범죄는 세월이 아무리 지나도 그 피해자가 아직 존재하는 한 해결해야 할 국가적 과제다. 국제사회가 아직도 나치 전범을 찾아 단죄하고 있는 것도 그런 이유 때문이다.

이는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나 일제 때 독립운동을 하다 희생 또는 고초를 당한 피해자 유족과의 형평성에도 어긋난다. 남의 나라가 우리에게 한 범죄는 세월과 관계없이 규명을 하면서, 정작 자기 나라가 자기 국민에게 한 범죄만 시기를 한정한다는 것은 자가당착 아닌가.

돈을 달라는 것도 아니다. 역사의 진실이나마 밝혀달라는 것이다. 당장 법을 고쳐서라도 이 문제를 해결해야 대한민국이 국제사회에 떳떳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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