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울은 문화재도 수탈해 갔다

김훤주 2009. 4. 10. 10:50
반응형

문화재는 제자리에 그대로 두고 보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고들 합니다. 프랑스가 빼앗아 간 강화도 외규장각 조선왕실 ‘의궤’를 비롯한 여러 약탈 문화재를 되찾으려고 우리가 갖은 애를 쓰는 까닭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저는 여기에서 이런 궁금증이 생겼습니다. ‘제자리에 그대로 보존’이라는 말이 나라와 나라 사이, 민족과 민족 사이에만 적용되는 원칙일까? 제 생각에는 아닐 것 같습니다. 같은 나라 울타리 안에 있는 지역과 지역 사이에서도 존중돼야 마땅한 그런 황금률일 것 같습니다.


연가칠년명 금동여래입상(延嘉七年銘金銅如來立像)이 있습니다. 광배(光背) 뒷면에 ‘연가 7년’으로 시작되는 한자 47개가 새겨져 있는 고구려 불상이랍니다. 1963년 경남 의령군 대의면 하촌리에서 발견돼 이듬해 국보 제119호로 지정된 문화재지요.


크지는 않아서 20cm도 채 안 되지만 광배와 대좌를 모두 갖췄고 보존 상태 또한 아주 좋답니다. 여기에 더해 언제 만들었는지 알 수 있는 가장 오래된 불상이어서 우리 예술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띤다고 합니다. ‘연가’는 고구려가 독자로 쓴 연호(年號)라고 짐작될 뿐 아니라 고려(高麗)라는 글자도 적혀 있는 것입니다.


연가칠년명금동여래입상

그런데 이 불상을 인터넷 포털 사이트에서 검색을 해 보면 서울시에서 만들어 관리하는 사이트로 연결이 됩니다. 왼쪽 위에는 ‘서울특별시 서울 문화재’라 쓰여 있는 이 사이트에서 금동여래입상은 불교문화로 분류돼 사람들에게 보여지고 있습니다.


경남 또는 의령 문화재라야 마땅한 이 불상이 서울 문화재가 된 까닭은 아주 간단합니다. 의령에 있는 의령박물관이 아니라 서울에 있는 국립중앙박물관에 있기 때문이지요. 따지고 보면 이런 보기가 의령에만 한정돼 있지도 않습니다.


이영식 씨가 펴낸 <이야기로 떠나는 가야 역사 기행> 창녕(비사벌국) 편을 보면 이렇게 돼 있지요. “일제는 (창녕군) 교동 고분군에서 열차 2량에 우마차 20대 분이란 엄청난 유물을 파내었고”, 이것들은 “다행히도 (일본으로 가지 않고) 대부분 국립중앙박물관에 남았”습니다.


교동 고분군은 고대 역사에서 의미 있는 한 시기를 보여준다고 합니다. 7호분은 400년대 전반에 만들어졌는데 가야식 장방형 석실분이고 유물도 가야 것이 많습니다. 반면, 11호분은 40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는데 무덤은 가야식이지만 유물은 신라 것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500년대 들어선 12호분은 무덤 모양도 신라 경주와 같은 적석목곽분인 데다 유물 또한 신라 일색이랍니다.
이는 신라가 창녕(비사벌)에 대해 5세기 전반 진출을 시작해 5세기 중반 본격화했다가 6세기 초 완전 장악했음을 일러준답니다. 그러나 창녕박물관은 이를 실감나게 보여줄 수 있는 유물을 제대로 갖고 있지 못합니다.


또, 창원 봉림동에 터만 남은 봉림사는 통일신라 말기에 세워졌던 절간이지요. 여기 있던 보물 362호 진경대사 보월능공탑도 마찬가지입니다. 일제 강점기인 1919년 서울 경복궁으로 옮겨졌다가 지금은 같은 서울의 국립중앙박물관에 들어가 있습니다.


봉림사는 이른바 구산선문(九山禪門) 가운데 봉림산문의 중심이었답니다. 선종(禪宗)의 유행은 바로 신라 말기 호족이 흥기했다는 사실과 관련돼 있는 만큼, 봉림사와 진경대사 탑비는 당시 창원 일대에 독자 영역을 확보한 강한 세력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중요한 지표라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이것은 창원에 있지 않습니다.


말씀드린 대로, 교동 고분군에서 발굴된 유물도 신세가 처량하기는 똑같습니다. 서울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대부분 처박혀 있답니다. 또 의령서 나온 연가칠년명 금동여래입상 진품은 서울에서 거둬 가 버리고 의령박물관에는 모조품만 있습지요.
 

이만열 전 국사편찬위원장은 이태 전 부산일보 지면을 통해 다른 나라 박물관에 있는 약탈 문화재 반환 운동을 두고 “인류의 문화유산이 복원되는 의미뿐만 아니라 19세기 이래 세계를 지배해 온 침략 강권주의(제국주의)를 청산하는 의미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제가 생각할 때 이만열 전 위원장의 이 말은 지금 서울과 지역의 관계에 대입해도 틀릴 것 같지는 않습니다. ‘지역의 문화유산이 복원되는 의미뿐만 아니라 일제 강점기 훨씬 이전부터 지역을 수탈해 온 서울 중심주의를 청산하는 의미도 띠고 있는 것입니다.’

사정이 이렇습니다. 지금 당장은 아니지만, 좀 준비하는 기간을 거친 다음에, 서울에 대해 지역에서 수탈 문화재 반환운동을 벌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김훤주
 

습지와 인간 상세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