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빙 필자의 글/하태영, 하마의 下品

베를린장벽 붕괴 20년, 그 현장을 가다

기록하는 사람 2009. 3. 5.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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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법과대학 하태영 교수가 최근 독일에 다녀왔다. 그는 올해로 베를린장벽 붕괴 20주년을 맞아 독일 통일을 교훈으로 우리의 통일을 준비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 위해 그는 '베를린 장벽 붕괴 20주년, 그 현장을 가다'라는 긴 글을 써보내왔다. 글이 길어 2회로 나눠 연재한다. (김주완 주)

독일 통일이 한국에 남긴 교훈은 세 가지이다. 한반도 통일 과정에서도 독일의 경우와 같이 세 가지 장애물이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분단국가가 겪을 수밖에 없는 운명이다.

따라서 우리의 외교는 독일의 외교비사를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한다. 미국, 일본, 중국, 러시아의 최대 관심사가 무엇인지 철저하게 분석해야 한다.첫째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장래 문제와 이와 관련한 주변국들의 입장을 어떻게 조율할 것인지 세밀하게 검토해야 한다. 둘째 통일 이후 우리 군의 지위 문제를 분명하게 정립해야 한다. 셋째 통일 이후 우리 군의 병력 수에 관해 정확한 진단 후 합의를 이끌어야 한다.

이 세 가지 문제는 주변국들의 이해관계와 맞물려 있어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 그러나 저자는 결국 이것이 한국 통일의 핵심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독일 분단의 상징,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다

베를린 장벽은 냉전의 상징이었다. 1989년 11월 9일 장벽붕괴는 역사가 독일과 독일 민족에게 준 행운의 선물이었다.

2009년 2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서독 쪽에서 본 광경이다.

1961년 8월 13일. 여름이었다. 미국에서는 케네디 대통령이 취임했고, 독일에서는 베를린 장벽이 구축되었다. 1961년 1월에서 8월 12일까지 동독인 15만9753명이 서독으로 넘어왔다.

동독은 8월 13일 아침, 전격적으로 베를린 장벽을 쌓아갔다. 동독군 장교가 철조망 경계를 뛰어넘고 있었고, 경계선 너머로 손자를 인계시키는 할머니도 있었다. 이렇게 베를린의 긴 하루는 흘러가고 있었다.

4일 후 8월 17일. 베를린 장벽을 넘던 청년 페터 페히터(당시 18세)가 장벽을 넘다 동독군의 총격을 받고 쓰러졌다. 수백 명의 동서독 인파가 이 광경을 지켜보았다.

28년(1961.8.13~1989.11.9) 동안 동서독을 가로 막은 베를린 장벽.


50여 분 동안 피를 흘리고 있었는데, 동독군은 시체를 끌고 나갔다. 이 장면은 시시각각 전 세계에 타전되었고 충격을 주었다. 분단고착은 이제 현실이었다. 1961년 8월 13일 이후 1989년까지 동서독 국경을 넘다 죽음을 당한 탈출 희생자는 모두 200명에 달했다.

20년 전 1989년 11월 9일 저녁 9시. 베를린 장벽은 붕괴되었다.

장벽 붕괴까지 정세의 흐름과 분위기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기 3개월 전부터 동독은 이미 파산상태였다. '지상의 공산주의 낙원'이라는 구호가 모두 허구였음이 드러났다. 경제난 악화와 개혁조치 부재에 대한 노골적인 불만이 마구 터져 나왔고, 동독인들은 TV를 통해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집회장면을 보았다. 그리고 바웬사(Lech Walesa, 1943~ )가 폴란드 총리가 되는 것을 보았다. 경호 속에 차를 타고 가는 바웬사의 모습을 보며 동독인들은 몹시 혼란스러웠다.

1989년 여름. 동독인들의 헝가리 휴가신청이 유난히 많았다. 헝가리인들은 아침에 차를 몰고 부다페스트를 출발해 오스트리아의 빈으로 가서 쇼핑을 한 뒤 저녁에 다시 돌아왔다. 동독 사람들은 이제 스스로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도대체 동독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제 거리로 나갈 때가 온 것인가?" 급변하고 있는 주변국의 모습을 보며 자연스러운 질문이 터져 나오기 시작했다.

2009년 2월 베를린 브란덴부르크 문. 동독 쪽에서 본 광경이다. 베를린 상징물인 곰(자유)과 함께 서 있는 사람들은 당시 동서독 국경선을 지켰던 동독군이다.


1989년 7월. 헝가리에 들어와 있던 동독인들의 대규모 탈출이 시작되었다. 8월 들어 상황은 점점 걷잡을 수 없이 변해가고 있었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자유의 길을 찾고 있었다. 대부분 의사, 간호사, 변호사, 건축가, 엔지니어 등 구동독의 자산인 '전문 인력'이었고 젊은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동독은 존폐 기로에 놓여 있었다.

1989년 8월 13일. 베를린 장벽 구축 28주년 기념일. 정치선전은 최고조에 달했다. 당 기관지 <노이에스 도이칠란트>는 '베를린 장벽은 안정을 위한 보장책'이라고 미화하며 "개혁은 어떤 성격의 것이든 일절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장벽은 전쟁의 아비규환으로부터 유럽인들을 보호해 주고 있다."고 외쳤지만 믿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동독인 모두에게 '심리적 공황'이 온 것이다.

1989년 10월 7일 저녁. 동베를린에서 엄청난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수천 명이 거리로 뛰어나갔고 짧은 시간 동안 동독 전역으로 번져나갔다. 시위대의 숫자는 하루하루를 지나면서 계속 늘어갔다. 이러한 사태를 지켜보던 서독 정부는 동독 슈타지(Stasi, 국가공안국)의 무력 개입과 유혈사태를 걱정했다.

1989년 11월 9일 저녁 9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되었다. 누구도 예측하지 못한 사건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와 통일…329일 동안의 긴 여정

독일 통일의 숨은 주역 호르스트 텔치크는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만 해도 통일 과정은 5~10년 정도 걸릴 것으로 보았다. 그러나 현실은 329일밖에 안 걸렸다"고 회고록에 적고 있다.

베를린 포츠담 거리에 세워진 분단 시대의 장벽 잔해.


329일 동안 동독 지역 자유선거, 새 동독 지도부와 서독과의 통일협상, 수도이전 협상, 독일의 나토가입과 통일 독일의 군사력 협상, 화폐교환문제, 경제통합, 교육통합, 환경통합, 경찰통합, 행정통합, 법원통합 문제를 논의했고, 1990년 10월 3일 통일 이후에는 통일비용 논쟁, 과거체제에 대한 청산, 슈타지-불법가해자의 처리문제, 구 동독 자산을 처리하기 위한 신탁청, 법제도 통합을 논의했다.

20년이 지난 2009년까지도 독일 통합과정은 아직 진행 중이고, 고실업, 심리적 갈등, 이등 국민이라는 피해의식이 여전히 남아 있다. 분단의 세월만큼 시간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러나 동독 사람들은 과거로 돌아갈 수 없다는 점은 확실히 공유하고 있다. 필자가 보기에 민주화와 자유화는 완전히 정착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실업률이 높아 사회분위기는 상당히 가라 앉아 있다. (계속 : '독일 통일은 한국에 어떤 교훈을 남겼나'가 이어집니다.)

글쓴이 : 하태영(동아대 법과대학 법학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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