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권력 시다바리'가 판치는 한국언론계

기록하는 사람 2009. 2. 19. 08: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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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처음 기자생활을 시작하던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그랬다. 선배들은 경찰서장실 문을 발로 차고 들어가 다리를 꼰 채 담배를 피라고 했다.

대개 경찰서를 첫 출입처로 배정받은 신입기자들은 20대의 새파란 나이다. 그러나 무릇 기자란 자신이 속한 신문사를 대표하여 독자들의 알 권리를 위임받은 사람이므로 경찰서장은 물론 어떤 권력자 앞에서도 주눅 들지 말고 당당해야 한다는 선배들 나름의 교육방식이었다.


물론 그 때도 뒷구멍으로는 권력자나 정치인에게 빌붙어 용돈깨나 받아쓰면서 브로커 짓을 한 기자들이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하지만 아예 드러내놓고 권력자 밑에 들어가 '시다바리질'을 하는 기자는 (내가 알기론) 없었다. 그만큼 기자라는 직업이 먹고 살기는 어렵지만, 기개나 자존심만큼은 그 어떤 지사(志士) 못지 않았다.

구본홍 YTN 사장. ⓒ미디어스 송선영

그런데 언제부턴가 중도에 기자를 그만두거나 퇴직 후 정치인 밑에서 보좌관이나 공무원 자리를 받는 이들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평균연령이 높아지다 보니 살아야 할 날은 많고, 그래서 하나의 직업만으론 남아 있는 긴 인생을 버티기 어려워 그런 지도 모르겠다. 또한 1인 장기독재가 사라지고, 지방자치제 덕분에 선출직이 많다보니 그만큼 기자출신 '시다바리'에 대한 수요가 늘어난 탓도 있을 것이다.


수오지심이 없는 전직 언론인들

그건 뭐 어쩔 수 없는 일이다. 노후의 제2직업을 위해서든, 출세를 원해서든, 직업선택의 자유를 탓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문제는 그들의 태도다. 어제까지 권력을 감시하고 비판하던 사람이 하루아침에 권력의 하수인이 되었다면, 최소한 남아있는 기자 후배나 동료들에게 미안한 마음이라도 가져야 한다. 아니 아니, 그런 마음까지 없어도 좋다. 그렇게 언론을 떠났으면, 다시 돌아오지만은 말아야 한다.

내가 아는 한 중견기자도 몇 년 전 5급 공무원으로 특채될 기회가 있었다. 길게 고민하진 않았지만, 그도 약간 흔들리는듯 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마음을 접었다. 가장 큰 이유는 한 번 떠나면 앞으로 영원히 기자로 되돌아 올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었다. 받아줄 언론사도 없겠지만, 공무원 하던 사람이 다시 기자랍시고 쓰는 글을 누가 불편부당·정론직필로 봐주겠는가?

가상이긴 하지만, 가령 김태호 경남도지사 밑에서 보좌관을 하던 기자출신 인사가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이 어느날 <경남도민일보>의 주요 간부로 들어오면 어떻게 될까? 독자들은 <경남도민일보>를 '김태호 지사의 시다바리 신문' 쯤으로 취급하지 않을까?

차용규 OBS 신임 사장 ⓒ언론노보 이기범

그런데 이명박 정부 들어 이런 일이 너무나 비일비재하게 벌어지고 있다. YTN 구본홍 사장이 이명박 대통령 후보의 특별보좌관 출신이며, 최근 임명된 OBS 차용규 사장도 그렇다. 언론재단의 일부 이사도 보좌관 경력과 출마 경력을 갖고 있는 정치인으로 임명됐다. 경남지역에서도 한 때 물의를 빚었던 <경남일보> 황인태 전 사장이 한나라당 정치인 출신이었다.


광주에서도 이런 일이 흔하다고 한다. <광주드림> 이광재 기자가 <미디어스>에 쓴 기사에 따르면 최근 광주시의 개방형직위 여성청소년정책관(서기관급)에 한 지역신문사의 부장급 기자 조모(42)씨가 발탁됐다고 한다. 전임자 역시 이 지역 또 다른 신문사의 간부급 인사 남모(47)씨였다. 더 황당한 건 작년 연말 사표를 낸 뒤, 그가 간 곳은 2년 전 시청에 들어가기 직전까지 몸담았던 신문사의 논설실이었다니, 그걸 받아주는 신문사도 참 알만 하다.

글 대신 주둥이로 말하는 기자들

행정기관의 각종 위원회에 걸치고 있는 현직 기자들도 문제다. 취재원에 대한 기자의 기본원칙은 '불가원 불가근(不可遠 不可近)'이다. 기자는 관찰자이며 감시·비판하는 사람이지, 자문하고 심의하고 의결하는 행정의 보조자나 주체여선 안된다. 판사는 판결로 말하고, 기자는 기사로 말한다고들 한다. 기자가 기사 대신 주둥이로 말하게 되면 사이비(似而非)나 브로커가 되기 십상이다. 경남에는 유난히 이런 기자들이 많다.

사이비 기자들과 권력의 '시다바리'들이 판치는 언론계가 참 암담하다. 언론이 병든 사회는 희망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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