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이 너무 엄혹하다. 마치 박정희 시대나 이승만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실제 현 정권은 이승만을 다시 국부(國父)로 추앙하고 그의 분단정부 수립을 '건국'이라 칭하며 반대세력을 싹쓸이하고픈 욕구를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승만의 친위조직이었던 국민회와 서북청년단, 대한청년단, 땃벌떼와 백골단, 민중자결단과 같은 반공우익집단들이 '뉴라이트'로 이름만 바꿔 다시 발호하고 있는 것도 그 때를 연상케 한다.

이럴 때일수록 현대사를 되돌아보면서 역사에서 지혜와 교훈을 찾을 필요가 있다. 그래서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라는 카테고리를 만들어 '한국 우익집단과 토호세력의 뿌리'를 약 50회에 걸쳐 추적해보려 한다. 이 글은 그 첫번째로  해방직후 마산의 건국준비위원회가 어떤 세력들로 결성되었는지를 알아본다.

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1)건국준비위원회의 결성

1945년 8월 15일 낮 12시. 라디오를 통해 일본 천황의 떨리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포츠담 선언의 조건을 수락하고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다는 내용이었다. 방송을 들은 경남도민들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어제까지만 해도 최후의 1인까지 싸우자고 외치던 일본이 아니었던가?

얼마 후 곳곳에서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입과 입을 통해 마침내 해방이 된 것을 깨달은 사람들은 소리 높여 만세를 외쳤다. 마산 민의소가 있던 창동거리도 금세 인파로 가득 찼다. 만세소리는 밤늦게까지 계속 이어졌다.

허당 명도석

바로 그 시각. 어시장 근처의 집에서 창문 너머 들려오는 만세소리를 들으며 조용히 앉아 앞일을 구상하고 있는 이가 있었다. 이미 수개월 전부터 일제의 패망을 예견하고 독립된 새 나라 건설을 은밀히 준비해온 허당 명도석(당시 64세)이었다. 서울의 몽양 여운형과 함께 해방을 준비하는 비밀결사조직 '조선건국동맹'을 만들어 경남조직책을 맡아온 그였다. 마침내 때가 온 것이다.

친일파-무정부주의자-사회주의자의 행보

"일본이 전쟁에서 질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우리 조선민중이 아무런 준비 없이 해방을 맞았다간 다시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말 것이다. 지금부터 우리의 주체적인 힘으로 진정한 독립국가 건설을 준비해 나가야 한다." 이것이 그가 건국동맹에 합류한 이유였던 것이다.

그는 일찍이 1907년부터 노동야학의 교사였고, 1919년 마산의 3·1운동을 주도했으며, 1927년 독립운동단체인 신간회에 참여해 독립자금을 조달하다 평양에서 옥고를 치루기도 했던 마산의 대표적인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그는 마산의 민족운동가들 가운데서도 끝까지 기개를 꺾지 않고 창씨개명을 거부한 인물이었으며, 부산의 백산 안희제를 통해 독립자금을 제공해온 마산의 민족자본가였다.

허당이 해방이후의 구상에 빠져있던 그 비슷한 시간. 마산 중성동 김창갑의 집에는 목발 김형윤(金亨潤)을 비롯한 손문기, 조병기, 이일래, 김주홍, 이원세, 정홍열, 류석형, 정명북 등 무정부주의 성향의 인사들이 모여들었다.

또한 오동동에 살던 사회주의 운동가 김형윤(金炯潤·목발 김형윤과는 다른 인물로 역시 유명한 사회주의 민족운동가인 김형선, 김형진과 형제)의 집에는 김명규, 김용찬, 김종열, 김종신, 박삼조 등이 모였다.

이와 달리 일제 때 부회의원을 지냈거나 친일파로 분류되던 손형업, 서기홍, 이유만, 안장수 등 세도가들도 동성동의 민영학의 집에 집결했다.

이들은 3파는 제각각 해방에 따른 혼란을 극복하기 위해 하루바삐 시민자치기구를 만들어야 한다는 입장을 모았다.

중도파 여운형계 위원장 명도석

그러나 과연 누구를 지도자로 내세울 것인가. 자칫하면 그토록 고대하던 해방을 맞이하고도 3파가 분열됨으로써 더 큰 혼란과 시민의 비난을 부를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이때 우파성향의 강태호와 좌파성향의 김형진이 나서 70여명의 지도자들을 마산식당(현재 한일은행 마산지점 자리) 2층으로 불러 모았다. 그때가 8월 16일 밤이었다. 이들은 곧 '해방 축하 마산시민대회'를 열기로 하는 한편 이를 위한 준비위원을 선임하는데 합의했다.

전날 밤의 결의에 따라 17일 공락관(이후 시민극장)에서는 수많은 시민들이 극장 안을 빽빽이 채운 가운데 해방된 마산의 실질적인 지방자치권력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마산부위원회' 결성대회가 개최됐다. 경술국치 직전까지 시민자치기관이었던 민의소가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된 지 36년만의 일이었다.

이날 위원장으로 추대된 지도자가 바로 허당 명도석이었다. 그는 이미 건국동맹 활동을 통해 '준비된 위원장'이었던 것이다. 또한 서울의 여운형처럼 중도 좌파였던 그의 성향도 마산의 3파 세력 모두에게 거부감 없이 수용된 요인으로 보인다.

부위원장 겸 구호부장에는 속칭 '손 감찰집' 부호의 아들로 마산청년구락부와 신인회, 노농동우회, 신간회 등 활동을 벌여온 무정부주의 성향의 손문기가 선임됐다.

역시 무정부주의자로 조선·동아일보 기자를 지냈던 조병기가 총무부장으로 선임됐고, 어시장 점원에서 출발해 신간회 및 적색노조 활동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던 사회주의자 최명출은 조직부장을 맡았다.

이와 함께 선전부장에는 기독교인으로 이후 한민회 간부와 미국 CIC 통역관을 지내기도 한 이일래가 선임됐고, 친일파로 부회의원을 지낸 손형업도 재무부장이 됐다.

전날 모임을 주선한 강태호는 산업부장, 유도에 능한 스포츠맨 박삼조는 치안대장, 최명출의 계매로 모스크바 공산대학을 졸업한 사회주의 운동가 김종열은 서기를 맡았다.

3파가 뭉친 마산 건준

이처럼 마산의 건국준비위원회(건준)는 다른 지역과 달리 일제시대 친일파와 무정부주의자, 중도 좌파 민족운동가, 사회주의자 등 각기 다른 성향의 인사들이 모두 참여하고 있다.

서울의 경우도 우파 민족주의자들이 참여하고 있기는 하지만 친일파들은 배제된 조직이었고, 부산에서 결성된 '건준 경남도지부'도 참가자격을 항일투쟁 경력이 있는 자에 한정했으며, 일제 때 공리 또는 일제에 협력한 사람은 철저히 배제했던 것이다.

그러나 마산 건준도 조직의 핵심적인 부분은 사회주의 계열에서 장악하고 있다. 조직과 서기, 그리고 실질적인 행동대 격인 치안대장을 모두 진보인사들이 맡고 있었던 것이다.

2005년 제막된 마산 봉암로의 허당 명도석 선생 기념비. /경남도민일보

어쨌든 3파가 연합한 마산 건준의 지도자가 된 허당은 이후 건준의 진보적인 색채에 불만을 품은 손문기, 조병기, 이일래, 강태호, 손형업 등이 한민회를 만들어 딴살림을 차리고, 그후 건준마저 인민위원회로 개편되는 등 좌우 분열조짐을 보이자 아예 어느 쪽에도 참여하지 않는다.

그후 '조선독립촉진 마산협의회'결성을 계기로 3파가 다시 연합하게 되자 여기에 인사부장으로 참여한다. 이후 그는 미군정이 시작되자 고문으로 추대됐다가 46년 좌우합작을 지지하던 민족혁명당 마산 조직책을 맡아 다시 한번 양측의 연합을 시도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러나 끝내 좌우 대립이 심화되자 일체 공직에 나서지 않고 은거하다가 6·25전쟁을 겪으면서 '빨갱이'로 몰려 고초를 당한 후 그 후유증으로 54년 6월 4일 생을 마감한 것으로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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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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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09.01.24 1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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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 2009.03.31 15:4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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