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제가 좋아하는 소설가는 아닙니다만, 김훈이 쓴 소설 <칼의 노래>에 이런 장면이 나옵니다. 부역을 나온 백성들이 일을 끝낸 뒤에도 돌아가지 않고 남아 이순신 장군에게 선물로 줄 칼(환도)을 만들려고 합니다.

그 대장장이 백성들이 검명(劒銘)까지 새기겠다 나서는 바람에 장군이 一揮掃蕩일휘소탕 血染山河혈염산하, 라고 글을 적어주기까지 합니다. ‘한 번 휘둘러 쓸어버리니 피가 강산을 물들인다.’

백성들 장군에 대한 믿음과 장군을 받드는 마음과 왜적을 물리치자는 간절한 소망과 이순신 장군의 굳건한 충심이 도드라져 보이는 국면입니다.

김훈은 이렇게 썼습니다. “그 때, 나는 진실로 이 남쪽 바다를 적의 피로 염(染)하고 싶었다. 김수철은 글씨를 말아들고 물러갔다. 새 칼은 나흘 뒤에 왔다. 칼집에 자개를 박아 용무늬를 새겨넣었고 박달나무 손잡이에 삼끈을 감았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칼을 빼자 햇빛이 튕겨져 나갔다.’ -장군이 백성들에게서 선물 받은 칼을 빼어든 장면입니다. 소설가라면, 보통 여기에서, 갖은 말들을 다 보태 백성들 생각과 장군의 의지가 합치되는 그런 보람이랄까에 대해, 잔뜩 적어 넣었을 것입니다.

2002년 2월 양산여고 교정에서 찍은 이헌수 사진.

김훈은 그리 하지 않았습니다. 여기에 제 후배 이헌수가 반했답니다. 이헌수는 양산여고 국어 선생입니다. 군말 군소리 다 없앤 간결함입니다. 칼과 햇빛 두 이름씨와, 빼다와 튕겨지다 두 움직씨만을 담은 단 한 문장으로, 그 장한 장면을 남김없이 훌륭하게 갈무리했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이 장면을 두고 몇 차례나 감탄을 하다가, 학교 도서관에 동료 물리 선생이 놀러 왔기에, “정말 멋지지 않으냐?”고, 동의를 구하는 물음을 던졌답니다. 그런데 그 돌아온 대답이라는 것이, “그거, 당연한 일이야.”였답니다.

물리학으로 볼 때, 빛은 파동 성질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빛이 칼과 같은 금속 물체에 부딪히면 튕겨져 나오지 않을 도리가 없고, 그렇기에 그것은 당연한 사실의 적시일 뿐 무슨 대단하고 색다른 표현이 아니라는 것이지요.

저는 어제 양산에 갔다가 이헌수를 만난 자리에서 이 얘기를 듣고 콧구멍을 벌렁거리면서 한참 웃었습니다. ‘문학의 표현’이 ‘과학의 서술’로 영역을 옮겨가면 이리도 달리 읽힐 수 있는 노릇이구나. 하하, 하하하.

2.
이번에는 생물 선생한테 당한 사연입니다. 이헌수가 잇달아 해 준 얘기입니다. 이헌수는, 생태주의자인지 아닌지는 제가 모르지만, 어쨌든 자연 생태계를 참 아끼는 편입니다. 그래서 지금은 자전거를 타고서 학교와 집을 오가고 있기까지 하고요.

그러니까 양산천 제방 안쪽 어디쯤이 됐겠는데, 가다 보니까 풀에서 피어난 꽃들이 아주 예뻐 보였답니다. 저는 풀들 이름을 잘 모르지만 후배 이헌수는 학교 선생이니까, 듣고 보고 해서 아는 풀꽃들 이름이 많았나 봅니다.

그래서 이리저리 주섬주섬 그것들을 입에 올리며 “참 보기 좋다. 정말 아름답다.” 그랬다지요. 그랬더니 옆에 있던 누군가에게서 이리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답니다. “세상에, 남의 생식기 보고 예쁘다는 말이 나오나?”

꽃이 식물에게 생식 기능을 하는 데 견줘서, 그냥 웃으려고 한 번 해보는 얘기였겠지만, 그리 말한 이가 바로 생물 선생이어서 느낌이 좀 달랐다고 그럽니다. 자기 하는 일에 따라서, 사물을 이처럼 다른 각도에서 바라볼 수 있는 것이구나, 싶었겠지요. 하하.

3.
이러고 나니까 다른 후배 생각이 나는데요. 이 친구는 자기 배로 낳은 아들 녀석의 자지(그러니까 생식기)를 보고 아주 예쁘다고 제게 자랑을 한 적이 있습니다. 10년도 더 전에 그 녀석이 두 살이나 세 살 정도일 때 일어난 일입니다.

바지를 벗겨 아들 자지를 보이게 하더니 “참 정말 꽃봉오리 같아요. 예쁘지요?” 이랬습니다. 그럴 터입니다. 생식기라 하면 숨겨야 하고 더러운 무엇으로 여기는 인식은, 잘못된 우리 문화가 씌운 더께일 뿐이지, 실제 생식기는 아주 아름다운 무엇일 것입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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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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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놀랍습니다 2008.11.30 20: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빼자, 튕겨나갔다."

    .....진짜 대단.

  2. asd 2008.11.30 20:18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반대의 경우라면 어떨까요?
    치마를 올려 딸 X지를 보이게 하더니 “참 정말 꽃봉오리 같아요. 예쁘지요?”

    .....바로 야설이 되는군요.
    핀트가 다른 이야기긴 합니다만..
    아들의 그것은 드러내놓고 자랑스러워하고
    딸은 생리같이 당연한 생리현상도 쉬쉬 숨기는게 보통이죠.
    그게 사회적으로 어떤결과를 가져오는지는 좀 생각해봐야할 문제인 듯 싶습니다.
    어떤 남자분들은 이런부분에서 역차별을 느끼는 경우도 있구요.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11.30 21:18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런 측면이 숨어 있었네요...

      말씀대로 다른 얘기이기는 하지만, 이리 짚어 주시니까 제가 또 하나 배웁니다.

      고맙습니다.

    • 그렇게 2008.11.30 21:39  댓글주소  수정/삭제

      사회에 길들여져 온 것이겠지요.?.
      실은 똑같은데 말입니다.^^
      주인장님 덕분에 또 한가질 배우네요, 감사 합니다.

  3. 세계구조 2008.11.30 20:2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는 글입니다. 잘 읽었습니다.

    아, 그리고 다음번에는 굴림체보다는 고딕체 또는 최소한 돋움체를 쓰시는게 더 좋을 듯 합니다.

    성함 중 '훤' 자에서 'ㅓ'가 'ㅜ' 위로 올라타는 모습은 조금 과격하게 말하자면

    한글 파괴라는 느낌이랄까요... ㅎㅎ

    괜한 딴지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조금 심각하게 생각해보시길...^^

    • Favicon of http://ftk.idomin.com 상큼한 김선생 2008.11.30 20:30  댓글주소  수정/삭제

      소스를 살펴보니 저 부분은 폰트 설정이 안 되어 있네요. 개개인의 브라우저 설정이 작용하는 부분입니다. 님의 웹브라우저 기본 글꼴 설정을 바꾸는 것이 옳다고 보여집니다. ^^;
      저는 운영체제와 웹브라우저가 다르기 때문에 기본 글꼴이 다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님께서 말씀하신 것 처럼은 안보입니다. ^^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11.30 21:19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저도 잘 어울린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다른 글자체를 한 번 검토해 보겠습니다.

      그런데 같이 블로그를 하시는 김주완 선배가 이 자체를 써라 해서리.......

  4. Favicon of http://ftk.idomin.com 상큼한 김선생 2008.11.30 20:2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하하 거 참 재밌네요. 시각을 달리해서 생기는 감정이입의 차이 ㅋㅋㅋ

  5. 지나가다 2008.11.30 20:4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학교에서는 다양한 전공을 한 사람들이 모여서 대상을 바라보는 차이를 경험할 때가 많은 것 같습니다.
    조문하러 지하주차장이 있는 장례식장을 갔는데, 같은 차를 탄 사학 전공자가 천마총에 들어가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유승호가 등장하는 영화를 보고 치과 전공의는 유승호의 부정교합이 자꾸 눈에 띄어서 영화 내용에 집중이 안되더래요. ^^

    • Favicon of https://100in.tistory.com 김훤주 2008.11.30 21:27 신고  댓글주소  수정/삭제

      그렇습니다요. 저도 텔레비전에서 사극을 제대로 보지 못했던 대학 교수 한 분을 알고 있습니다.

      지금은 익숙해져서 괜찮아졌다고는 하셨는데, 사극에 배경 장면이 되는 나무들에 신경이 쓰여서 정작 줄거리는 챙겨보지를 못한다는 것입니다.

      저 나무는 고려 시대에 우리나라에 없었는데, 저 나무는 얼마 전 미국에서 들어온 귀화종인데, 저것은 나무도 아닌 미국자리공이잖아 따위들..... 하하하하하.

  6. Favicon of http://www.yupgiplus.com 엽기조아 2008.11.30 21:05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정말 멋진 표현들이어요. 관점에 따라서 달라지는 건 맞겠지만~

  7. 2008.11.30 21:30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속어로 생식기를 꽃이라고도 하지 않나요? 꽃 한 송이가 사실은 ㅈ 이라더라는 속설도 있구요.
    하지만, 반대로는 생각해본 적 없는데.. 좀 쇼킹 하군요. 남의 생식기 라니..ㅎ

  8. Favicon of http://maejoji.tistory.com/ 매조지 2008.12.06 12:44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 즐겨보는 블로그입니다.
    게을러 많이 돌아 다니지 않기에 주로 뉴스를 통해 오지만,
    티스토리 활동 중 첫 번째 즐겨찾기에 올립니다.

  9. 이풀잎 2008.12.18 20:26  댓글주소  수정/삭제  댓글쓰기

    재밌네요. 생식기를 연상시키는 대담한 꽃 그림으로 유명한 여성화가 조지아 오키프가 생각나네요. 요즘 시인, 작가들이 과학에 무지했다간 웃음거리 되기 딱이죠. 여담인데요, 지리선생님, 국어선생님하고 저하고 셋이 자동차 여행을 했던 기억도 떠오릅니다, 길 찾는 방법이 각각 전공답더라구요. 누구 방법이 잘 먹혔게요? 지도에 의존하는 지리선생님보다 차 세우고 사람들에게 물어보는 국어 선생님 방법이 훨~ 도움이 되었답니다. 진정한 전문가가 되려면, 전공을 뛰어넘어야 되는 시대인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