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우리나라 사람들이 의존적 수동적이라고?

김훤주 2008. 3. 7. 19: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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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사람들,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다?

언제인지는 뚜렷하지 않지만, 우리나라 사람들은 의식구조가 의존적이고 수동적이라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 말할 때 '자기'가 아닌 상대방을 주체로 삼아 표현하는 때가 많다는 사실을 보기로 들었습니다. 저는 그 때 그냥, '그런가?' 하고 고개를 갸웃거리고는 더 생각해 보지는 않았더랬습니다.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얘기는 맞지 않습니다. 우리나라 사람들이 말할 때 자기를 내세우지 않는다는 말은 맞습니다. 그러나 그것을 두고 수동적.의존적이라고 해석하면 맞지 않습니다.

"곤충은 다리를 떼면 귀가 먹는다"

한 곤충학자가 실험을 했습니다. 메뚜기에게 다리를 떼어내고 "뛰어라!" 했습니다. 불쌍하게도 다리가 잘렸으니 뛸 리가 없지요. 이를 두고 곤충학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렸습니다. "메뚜기는 다리가 없어지면 귀가 먹는다."

우리나라 사람들 의식구조는 상대방을 먼저 생각하게 돼 있습니다. 그런 의식구조가 자기 대신 상대방을 주체로 내세우는 방식으로 표현이 됩니다. 물론 이것은 만인이 인정하는 이른바 정설은 아니고, 그냥 제 생각일 뿐입니다.

"애프터 유"와 "먼저 타세요"의 차이

엘리베이터 따위에서 상대방에게 앞 차례를 양보할 때 우리나라 사람은 "먼저 타세요." 합니다. 먼저 타는 주체는 '내'가 아닌 '당신'입니다.

영어를 쓰는 지역의 사람들은 "애프터 유(After you).", 한답니다. 우리 말로는 "당신 다음에."쯤이 되겠지요. 당신 다음에 타는 주체는 당연히 상대방인 '당신'이 아니고 '내'가 됩니다.

다시 엘리베이터 얘기입니다. 엘리베이터는 우리나라가 아닌 영어권이 원산지입니다. 그래서 엘리베이터 작동 이치도 영어권 방식으로 돼 있습니다. 아래와 위에 하나씩 있는 단추가 그렇습니다. 위에 단추는 '(누르는) 주체가' 올라가겠다는 뜻이고 아래 단추는 '주체가' 내려가겠다는 뜻입니다. 영어식 말투와 사고방식 그대로입니다.

우리나라 전통 사고는 그렇지 않습니다. 이 사고에 따르면, 위에 있는 단추는 '(주체가 아닌) 상대-여기서는 엘리베이터가 되겠지요.-'더러 올라오라 할 때 누르고 아래 단추는 이 '상대'더러 내려오라 할 때 씁니다.

요즘 아이들은 별로 헷갈리지 않지만 저는 지금도 한 번씩 헷갈릴 때가 있습니다. 시골서 오래 사신 어르신이 엘리베이터를 타실 때 한 번 눈여겨 보십시오.

가장 아래에서 올라가실 때는, 위에 단추 말고 아래 단추를 누릅니다. 5층쯤에서 내려가실 때는 어떻게 하시려나 궁금하시죠? 엘리베이터 있는 표시가 8층쯤에 있으면 (내려오라고) 아래 단추를 누릅니다. 엘리베이터 있는 표시가 2층쯤이면 (올라오라고) 위에 단추를 누릅니다.

주체인 내가 어떻게 하겠다는 신호가 아니고, 상대방인 엘리베이터더러 (내가 있는 데로) 내려오라거나 올라오라거나 하라는 신호인 것입니다.

나보다 먼저 상대 생각해도 배려는 아니다

이처럼 '나보다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의식구조'가 우리한테 체화돼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 자체가 아름답고 좋은 현상이 될 수는 없습니다. 이를 두고 '상대에 대한 배려'를 우리나라 사람들이 잘한다고 해석한다면, 요즘 말로 '오버'입니다.

옛날에 들은 것처럼, 말하거나 생각하면서 자기를 주체로 내세우지 않는다고 해서 곧바로 수동적이고 의존적이라고 해석해서는 안 됩니다. 물론,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의식구조에서 그런 표현이 비롯됐다 해도, 그 자체가 바로 장점이 될 수는 없습니다. 눈치채셨겠지만, 결국 관건은 태도 또는 자세입니다.

사극(史劇)에 자주 나오는 장면입니다. 솟을대문 앞에 양반 하나가 뒷짐을 지고 "이리 오너라!" 외칩니다. 이른바 '마당쇠'가 종종걸음으로 뛰어나와 굽신거립니다. 주체인 양반이, 상대방인 마당쇠를 자기보다 먼저 생각하고 말까지 지껄였지만, 여기에 상대 배려는 전혀 없습니다. 뻣뻣한 태도로 상대방을 업신여기면 절대 '배려'하는 미덕을 자기것으로 삼을 수 없습니다.

어떤 겨레붙이든, 겨레붙이 단위로 미덕 또는 악덕을 운명처럼 타고나는 경우는 없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어 혼자 중얼거려 봤습니다. 형태는 시대에 따라 이리저리 달라질 수 있겠지만, 이 같은 민족성론(民族性論)은 아무리 좋은 껍질을 덮어쓴다 해도 맞을 때보다 틀릴 때가 훨씬 더 많을 수밖에 없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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