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천과 문화] (8)
1765년 설치된 조세창고
낙동강·밀양강 한눈에
해질 녘 노을·물새 '장관'
아전·뱃사공 규정 무시해
환곡 사채놀이 등 전례도
◇조선시대 경남 내륙 조세 창고
조선 시대 조세 창고가 경남에는 셋이었다. 창원 마산창, 사천 가산창, 밀양 삼랑창이다. 삼랑창은 1765년, 마산창·가산창은 1760년 설치되었다.
삼랑창은 낙동강 강가에, 나머지 둘은 남해 바닷가에 있다. 조세로 받은 물품을 운송하는 수단이 주로 배편이라 그랬다.
김정호가 1860년대 작성한 <대동지지>에는 이렇게 나온다. "밀양·현풍·창녕·영산·김해·양산 여섯 고을의 전세(田稅)와 대동미(大同米)를 운송하여 서울로 보냈다. 밀양부사가 받는 것을 감독하고 제포만호가 거느리고 가 바쳤다."
<영조실록>은 당시 정황을 1765년 11월 14일 자 기사에 적었다.
"이익보가 '밀양·창녕·영산·현풍 네 고을은 대동을 쌀로 바쳤다가 (창원과 사천에) 조창을 설치한 후에는 거리가 다소 멀어 베로 바꾸어 바치도록 하였는데, 지금은 또 쌀로 바치기를 원합니다' 하였다. 임금이 새로 경상도관찰사를 지낸 조엄에게 물었더니 밀양 삼랑창을 후조창으로 삼으면 좋겠다고 청했다."
삼랑창을 후조창이라 한 까닭은 앞쪽 바닷가에 있지 않고 뒤(後)쪽 내륙이 있었기 때문이다. 밀양시 삼랑진읍 삼랑리 일대 밀양강이 낙동강으로 흘러드는 어귀다.
삼랑창 뒤편 후포산에는 방어를 위한 산성이 있었다. 낙동강 상·하류와 밀양강이 한눈에 드는 요충이다. 서쪽은 낙동강, 남쪽은 밀양강에 붙은 벼랑이라 접근이 어렵다. 동쪽은 트여 있기에 성벽을 쌓아 막았으나 지금은 흔적도 찾기 어렵다.
꼭대기에 여기를 지켰던 박씨와 손씨 두 장군을 모시는 사당 의충사가 있었는데 2016년 허물어지고 콘크리트 제단과 노거수만 남아 있다.
◇지는 노을에 외로운 물새
마을 위쪽에는 오우정(五友亭)이 있다. 민구령이라는 인물이 1510년 세운 정자라 한다. 자기네 다섯 형제가 한 베개 한 밥상을 쓰며 공부도 하고 자연도 즐기려고 지었다.
1563년 지역 선비들이 이들의 우애를 기리는 사당 오우사(五友祠)를 두었다. 그 뒤 삼강사(三江祠)와 삼강서원으로 바뀌면서 확장되었다. 지금 오우정은 1868년 서원이 헐린 자리에 1897년 세웠다. 내려다보이는 앞에는 1775년 세운 삼강사비가 있다.
원래는 삼랑루 자리였다. <동국여지승람>에 고려 스님 원감국사 충지(1226~93)가 쓴 시와 함께 나온다. 충지는 강 건너편 김해 감로사에 1266년 주지로 와서 3년 동안 머물렀다. 삼랑루와 직선으로 11km 정도 떨어져 있다.
"호수 위에 푸른 산이요 산 아래 누각이라. … 물가 가게는 늘어놓은 달팽이껍데기 같고 물결 따라 바람 받은 배는 … 춤추네. 뽕나무에 연기 깊어 천리가 저물고 마름꽃과 연꽃이 늙어 강이 온통 가을빛이라. 낙하고목(落霞孤鶩)은 이제 낡은 말일세. 새로 시를 지어 명승을 기록하네."
낙하고목은 '지는 노을에 외로운 물새'인데, 당나라 시인 왕발이 처음 썼다고 한다. 멋진 시어(詩語)를 상투어로 만들 정도로 빼어난 풍경이라는 뜻이다. 비록 누각은 없어졌지만 가을철 해 질 무렵 노을과 물새의 조화는 지금도 장관이다.
◇물건 쌓이니 욕심도 노고도 모이고
물건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견물생심은 언제나 진리였다. <정조실록> 1793년 9월 11일 자 기사에는 밀양부사와 창녕현감을 귀양보냈다는 얘기가 나온다. 세곡을 실어나르는 조운선(漕運船)이 침몰한 데 따른 조치였다. 관찰사 조진택이 아뢰었다. "(두 관리가) 국가의 정당한 조세 규정을 무시하고 쌀과 돈을 바꿈질하는 통에 아전과 뱃사공이 빌붙어 농간을 부린 결과입니다."
<정조실록> 1798년 11월 29일 자에 실린 양산군수 윤노동의 상소는 적나라하다.
"밀양은 … 아전은 협잡질하고 백성은 간사한 술수를 부려 온갖 폐단이 생겨납니다. 사공과 격군은 모두 감독관이나 아전의 청탁으로 뽑히므로 대부분 용렬하고 잡스럽습니다. 격군에게 꾸는 양곡과 축날 것을 대비해 더 거둔 쌀은 이미 묵은 빚과 인정가(불법 수수료)로 다 나가므로 원곡식을 떼어먹지 않을 수 없습니다. 환곡 사채놀이는 예사로 보고 제때에 갚지 않는 포흠은 거짓 처리가 전례가 되어 심지어 돌아가며 나누어 먹는 몫이라는 말이 이미 오래전부터 퍼져 있습니다."
서울까지 뱃길은 위험했다. <고종실록> 1877년 10월 16일 자다.
"후조창 운송 책임관 제포만호가 공문을 보냈다. '13척 중 한 척이 처지고 12척이 9월 29일 팔금도(전남 신안군) 앞바다에 정박하였습니다. 동북풍이 세게 불어 세 척은 바람에 밀려 어디 갔는지 알 수 없고 두 척은 갑판이 움직이면서 주저앉아 물에 잠겼습니다. 10월 1일에는 한 척이 화재가 나서 곡식과 격군 17명이 불탔습니다.'"
배가 가라앉으면 실려 있던 곡물을 물어내야 했다. 침몰된 고을과 본래 곡물을 냈던 고을, 배에 탔던 이들이 나누어 책임지도록 되어 있지만 실제는 달랐다.
<정조실록> 1794년 12월 30일 자에서 재난 당한 백성을 위로하는 위유사 이익운이 아뢰었다.
"모든 수량을 배에 탔던 감독관·아전·사공·격군 등에게 거두었습니다. … 삼랑창에 이르니 … 마을이 쇠잔하고 인가도 드물었습니다. 백성들은 '친족에게 징수하는 데 시달리다 도망간 사람이 많고 남은 이도 흩어질 생각을 하고 있다' 했습니다. … 포구에 사는 가난한 무리로 죽음을 무릅쓰고 위험을 겪어도 입에 풀칠하는 정도이니 쌀 한 되 돈 한 푼도 받아내기 어렵습니다."
지금 삼랑창 옛 모습은 모두 사라지고 석비와 철비 몇 개만 남았다. 오우정 올라가는 언덕 꺾어지는 길목의 '후조창 유지(遺址) 비석군'이 그것이다.
제일 안쪽에 棠梅臺(당매대)라 새겨진 바위가 있는데 그리로부터 바깥쪽으로 여덟 개가 줄지어 있다. 안쪽이 가장 오래되어 1766년에 세워졌고 바깥쪽 셋은 그중 새 것이어서 1872년 같은 해에 세워졌다.
셋째와 넷째는 쇠로 만든 철비고 나머지는 석비다. 하나하나 새기면서 보면 여기 빗돌에도 옛적 사람살이 물정이 담겨 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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