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진주 가스차 탈취 시위가 6월항쟁 최대고비였던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17. 6. 18. 13: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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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PG가스차 위에서 횃불 들고 "죽자! 죽자!"


해방 이후 세대가 과연 이런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해방의 그날이 오면 '종로의 인경을 머리로 들이받아…두개골이 깨어져 산산조각이 나도 기뻐서' 죽겠다고 노래한 심훈의 심정을 말이다.


마찬가지로 민주화 이후의 요즘 세대가 87년 LPG 운반차량 위에서 횃불을 들고 "죽자! 죽자!"라고 외치며 진격하던 선배들의 비장했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랬다. 87년 6월 17일 남해고속도로에서 LPG 차량탈취 시위를 벌이던 학생들의 구호는 '죽자'였다.


◇러닝셔츠로 횃불 만들어 = 87년 8월 1일자로 발행된 월간 <말> 부록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몇 차례의 공방 끝에 고속도로를 점거한 학생들은 오후 7시쯤 경찰가스차 2대와 LPG운반차 2대를 빼앗았다. 학생들은 연행자 전원 석방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요구는 거절됐고 8시쯤 시내 진출을 못한 학생들과 합류, LPG차에 10여 명씩 올라타 횃불을 들고 시내 쪽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학생들은 '연행자를 석방하지 않으면 가스차를 폭파시켜 모두 죽겠다'고 주장하고 3천여 명이 '죽자, 죽자'고 외치며 행진해 갔다."


18일자 중앙일보에 보도된 연합뉴스 사진


또 당시 시위를 주도했던 진홍근씨는 '서부경남지역 6월민주항쟁 약사'(6월민주항쟁 20주년 기념 서부경남추진위원회 발족식 자료집)에서 당시 상황을 이렇게 묘사했다.


"LPG 차량 위에서 러닝을 벗어 횃불을 만들어 불을 붙이다. 수십 개의 횃불이 봉화처럼 이글거리며 타오르다. 마침내 LPG차량을 앞세운 시위대가 학교 앞에서 제1시위대와 합세하다. 시위대열은 이미 3천 명을 넘긴지 오래다. LPG차 1량이 터지면 반경 1킬로미터가 폭발범위라는 말이 누군가에게서 나오다. 순간 눈 앞에 많은 장면이 스쳐지나가다. '호헌철폐'도, '독재타도'도 더 이상 구호가 되지 못하고 입가에서 쓴 미소와 함께 사라져가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가에서 '죽자'라는 주문이 낮게 흐른다. 여기 저기서 '죽자'는 유언이 스펀지 위에 떨어진 잉크처럼 삽시간에 번져 저문 해를 따라 죽음의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다."


이처럼 당시 학생들은 실제로 LPG차량이 폭발할 수도 있음을 각오하고 있었다.


당시 <경상대학보> 학생기자의 취재메모에도 경찰의 기습공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


"전경들은 약 1백여 발의 최루탄을 동시에 쏘아댔다. 만약에 그것으로 인해서 LPG 차가 폭발할 경우 반경 4km 내에 있는 모든 사람이 순식간에 죽는다는 것을 그들은 몰랐을까? 이미 그들은 이성을 잃은 짐승들이었다."


◇경찰의 기습작전 배경은 = 그렇다면 학생기자의 말대로 최루탄을 쏘며 기습 진압에 나선 경찰은 LPG차량의 폭발 위험을 과연 몰랐을까? 경찰도 처음에는 폭발을 우려해 시위대에 접근하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경찰도 당황한 나머지 곳곳에 폭발 가능성을 문의했다.


당시 정보과 형사로 시위현장에 있었던 한 경찰관은 "우리도 처음엔 학생들이 마음만 먹으면 폭파시킬 수 있는 줄 알았다. 반경 2km 이내가 쑥대밭이 된다는 얘기도 들었다"면서 이렇게 증언했다.


"폭파 가능성에 대해 서울에까지 전화로 문의하는 등 난리가 났다. 학생들의 구호도 '죽자'였다. 그런 와중에 LPG운반차량 운전기사를 경찰이 찾았다. 그가 3000도의 열을 동시에 가해야 터진다고 했다. 또 안전장치가 돼 있으므로 최루탄을 쏴서는 절대로 폭파되지 않는다고 했다. 운전기사의 이런 이야기가 결정적이었다. 또 가스조절장치가 운전석에 있었고, 그걸 조절할 수 있는 열쇠를 운전기사가 갖고 내렸다는 것도 확인했다. 그래서 최루탄을 쏘며 기습진압에 나설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진압현장의 전경 소대장이었던 경찰관의 증언도 이와 비슷했다. 그는 당시 청와대에서도 진주의 상황을 묻는 전화가 걸려왔었다고 기억했다.


진압작전은 LPG차량을 앞세운 학생들이 개양의 열차 철교를 지나 정촌파출소를 불태운 후 시작됐다. 후퇴하는 듯하던 경찰이 수십 발의 최루탄을 일제히 쏘며 가스차를 급습했다. 가스차에 타고 있던 18명의 학생들이 경찰에 폭행당하며 연행됐다.


워싱턴포스트 6월 18일자 '한국 시위, 지방도시로 확대'


가스차를 빼앗기고 후퇴하던 학생들은 철로 위로 올라가 마산발 진주행 비둘기호 열차를 세웠다. 이들은 다시 '연행자를 석방하지 않으면 열차를 불태우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나 기관사가 나서 승객의 안전을 호소하자 학생들은 순순히 물러났다. 뒤늦게 경찰은 최루탄을 쏘며 철로로 진격했다. 이 때문에 승객들이 최루가스로 고통을 겪기도 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남해고속도로 LPG 차량탈취 시위는 18일 전국의 조간신문에 대서특필됐다. 14일 밤 서울 명동성당 농성이 해산되면서 시위가 소강상태를 보이던 때라 진주의 격렬한 시위소식은 전국에 충격을 안겨줬다. 이튿날인 18일은 마침 국민운동본부가 선포한 '최루탄 추방의 날'이었다. 전국의 시위가 다시 격렬해졌다. 특히 부산에선 6·10 이후 가장 많은 시민이 시위에 참가했다.


◇전국 시위 격화 계기 제공 = 전두환 정권은 이날 이후 두 가지 방안을 놓고 고민하기 시작했다. 국민의 민주화 요구를 수용하느냐, 비상계엄을 통해 군 병력을 투입하느냐는 두 가지였다.


LPG 차량탈취 시위가 있었던 17일 밤 전두환과 노태우 등 5공화국 권력실세들이 청와대 안가에서 심야 모임을 했고, 18일에는 청와대와 보안사령부 사이에 군 병력 투입 논의가 오갔다. 또 19일 오전 10시 30분 청와대에서 전두환과 안기부장, 국방부 장관, 3군 참모총장, 보안사령관, 수방사령관 등 군 고위회의를 열었으며, 저녁에도 시국대책회의를 열고 군대 개입 여부를 고민한 것으로 나타나 있다.(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 1980년대편 3권)


결국 전두환 정권은 군 투입을 포기하고 직선제 개헌을 수용할 수밖에 없었지만, 17일 진주시위가 6월항쟁에서 주요한 고비가 되었음은 분명하다.


타임 지에 보도된 전국 주요 시위발생지역. 경남에서는 진주와 마산이 분명하게 표기돼 있다.


그러나 정작 전국의 시위를 다시 격화시키는 계기를 제공했던 경상대생들은 18일부터 지리멸렬해져 버렸다. 전날 밤 시위를 제대로 지도하지 못한 총학생회에 대한 학생들의 불만이 폭발하면서 구심점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경상대신문> 학생기자의 취재메모는 17일 밤 상황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민주해방광장에 재집결한 1500여 명의 학생들은 총학생회와 총대의원들에게 배신당한 것을 폭발시키기 시작했다. 그동안 그들이 보여준 기회주의적이고, 어용적인 기질은 이날 확연히 드러나고 만 것이다. 싸움을 부추겨 놓고서 결정적인 순간에는 빠져버리는 것이다. 그리고 싸움이 거진 다 이겨가면 다시 나타나는 이들을 학생들은 더 이상 용서치 않았다. 그들은 총학생회실을 부수고 그들을 찾았으나, 이들은 벌써 사라진 뒤. 뚜렷한 지도부의 부재와 너무 흥분한 이들은 다음날의 싸움 준비를 확실히 하지 못하고 12시경 자진해산."


이로 인해 다음날인 18일에는 학생들이 거의 모이지 않았다. 겨우 50여 명의 학생들이 교문 앞에서 시위를 벌이다 해산하고 만 것이다.


◇진주교대에서도 시위 = 반면 그동안 조용했던 진주교대에서 처음으로 시위가 벌어졌다.


400여 명의 학생이 이날 오전 8시30분부터 교내에 모여 '호헌철폐' '학내언론자유 보장' 등을 주장하며 시위를 벌였던 것이다. 이들은 집회에서 교문 통제 및 게시판 벽보부착 제한 완화를 요구했고, 학보사와 방송국 등 학내언론의 비판활동 자유화를 주장하는 결의문을 채택하기도 했다.


이후 진주지역에서는 23일 진주 강남감리교회에서 오태열 목사가 '6·23 시국기도회'를 개최한 것 말고는 시위가 거의 없었다. 그후 '6·26 전국민 평화대행진'의 날 국민운동본부 진주지부 창립과 함께 다시 대규모 시위로 이어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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