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1일 창녕 만옥정에 들렀습니다. 창녕우포늪생태관광협회와 함께 진행하는 ‘람사르습지도시 인증을 위한 창녕옥야고 습지 기자단’ 활동을 벌인 뒤끝이었습니다. 7월로 예정되어 있는 ‘창녕의 숨은 매력 블로거 팸투어’ 준비를 위한 답사를 겸한 걸음이기도 했습니다.
만옥정의 문화재들
만옥정은 어릴 적 뛰어놀던 곳입니다. 올망졸망 언덕이 있고 여기저기 문화재가 박혀 있습니다. 흥선대원군이 세운 척화비, 신라 진흥왕이 가야 비사벌 영토를 자기것으로 삼고 지경을 둘러보면서 세운 척경비, 다른 지역에 있었으면 명물로 꼽혔겠지만 창녕에 있는 바람에 저평가를 받는 토천삼층석탑, 6·25전쟁 당시 낙동강전투 승리를 기리는 유엔군전적비 등은 옛적에도 있었고요, 창녕객사는 읍내 옥만동 장터에 있다가 1980년대 만옥정으로 옮겨져 왔습니다.
또 현감들 선정비 무리는 옛날에는 만옥정 울타리 바깥에서 도로와 같은 높이로 있었는데 이번에 가서 보니까 그 자리를 통째로 돋우어 만옥정과 같은 높이로 삼은 다음 울타리 안으로 집어넣었더군요. 덕분에 다시 바깥으로 내려가는 수고로움 없이 선정비들을 둘러볼 수 있었습니다.
한 마디로 말하자면, 다른 지역 선정비 무리보다 많은 편이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특징적인 몇몇이 있어서 눈길을 끌었습니다. 현감·군수들 치적을 기린다는 빗돌은 (애민)선정비(愛民)善政碑=(백성을 사랑하고) 선정을 베풀었다 또는 청덕비淸德碑 맑은 덕을 기린다가 대부분입니다.
물론 애민선정한 훌륭한 원님이 떠난다니 그저 눈물이 떨어질 따름이라는 타루비墮淚碑도 어쩌다 있기는 합니다. 그런데 창녕 선정비 무리를 보니 타루비도 그 앞에 ‘보덕輔德’ 두 글자가 붙어 있었고(갚을 보報가 아니라 도울 보輔인 것도 이채로웠습니다) 더 나아가 다른 데서는 보기 어려운 흥학비興學碑까지 둘이나 있었습니다.(견문이 좁은 탓인지 흥학비는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창녕 교육 역사의 증거 흥학비
흥학, 배움 또는 학문을 진흥한다는 얘기인데요, 둘 가운데 잘 보이는 녀석을 골라 사진을 찍었습니다. ‘현감 이후 성순 흥학비縣監李候性淳興學碑’입니다.(바로 오른쪽 잘 보이지 않는 것은 ‘현감 정후 동기 흥학비縣監鄭侯東驥興學碑’.)
집에 와 찾아보니 이랬습니다. 이성순李性淳은 조선 정조 치세인 1786~88년 창녕 현감을 지냈고 빗돌이 세워진 때는 1789년 3월입니다. 2014년 8월 1일 이문재고개 근처 대숲에서 발견되었습니다. 창녕박물관을 지나 경북 청도로 넘어가는 국도 24호선 인근인데 옛적 이문재以文齋라는 교육시설이 있었던 장소라 합니다.
이문재는 1786년 이성순에 앞서 현감으로 있던 정동기鄭東驥라는 사람이 세웠는데요, 이성순은 이 이문재가 제대로 자리잡고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도록 재임 기간 힘을 쓴 셈이 되겠습니다.(정동기는 제가 사진찍지 않은 흥학비의 주인.)
여러 정황을 헤아려보면 이성순 흥학비는 원래 이문재에 세워져 있었다가 세월이 흐르면서 시나브로 땅에 묻히게 되었고 2014년 발견되면서 여기 창녕 선정비 무리로 이사를 왔습니다. 이렇게 더듬고 보니 이 흥학비들이 예사로 보이지 않았습니다.
창녕은 이미 1580년대 한강 정구(寒岡 鄭逑)가 현감으로 학문을 한 번 진흥시킨 바가 있었습니다. 한강은 여기 현감으로 있으면서 지역 역량을 모아 읍지 창산지를 발간했으며 지금도 남아 있는 팔락정·부용정을 비롯해 여덟 개 정자를 세우고 학생들을 가르치게 했습니다.
연꽃을 조그맣게 새긴 머릿돌.
그러니까 이문재를 창설·운영한 정동기·이성순은 한강 정구의 훌륭한 후배입니다. 이문재는 또 남창학교(1905년) 창녕보통학교(?) 창녕심상소학교(1938년) 창녕국민학교(1946년) 창녕초등학교(1996년)로 지금까지 이어진다니 창녕 교육 역사에 나름 뜻깊은 빗돌인 셈입니다.
그래서 이들 흥학비를 여러 선정비·청덕비·타루비와 뒤섞어 놓지 말고 손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표시도 하고 설명도 달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빗돌 글귀는 두류문화연구원 최헌섭 원장께 여쭈었더니 이렇게 일러주었습니다. 성심육재(誠心育才) 삼재여일(三載如一) 화흥석류(化興石留) 거사미절(去思彌切) : 성심으로 인재 기르기를 3년을 한결 같이 하셨네. 그 교화와 진흥을 돌에 남기니 가신 이 생각이 더더욱 절절하네.
자유분방의 절정 머릿돌의 용과 연꽃
창녕 선정비 무리를 둘러보는 재미는 이것이 전부가 아니었습니다. 제멋대로 생겨먹은 거북과 용과 연꽃이 압권이었습니다. 빗돌은 세 부분으로 나뉜다고 들었습니다. 몸통 비신碑身과 머릿돌 이수螭首 받침돌 귀부龜趺입니다. 이수는 달리 하엽荷葉이라고도 한다는데요, 이는 연꽃과 그 잎사귀를 뜻한답니다. 한자를 풀어보면 바로 알 수 있는대로 머리에는 용螭 또는 연꽃荷을 새기고 받침돌에는 거북龜을 새기는 모양입니다.
먼저 이수 머릿돌입니다. 조선 후기 들어서면서 양반 위주 문화보다는 서민-일반 백성이 누리고 즐기는 문화가 상대적으로 크고 많아졌다는 사실은 익히 알고 있습니다만 그 본보기를 창녕 선정비 무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양반은 권위과 격식을 따집니다. 그래야 신분에 따른 차이나 차별을 유지할 수 있고 그래야 일반 백성들을 지배·통치할 수 있었기 때문이지요.
연꽃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일반 백성들은 그렇게 따질 권위나 격식이 없거나 적었습니다. 그렇게 따지며 지내기에는 하루하루 먹고 살아가는 일생이 팍팍했기 때문이겠지요. 격식·권위를 따지기보다는 그저 자기네 마음과 몸에서 우러나오는대로 표현하는 편이 속도 편하고 만만했을 것이라고 짐작해 봅니다.
이를테면 이수를 하나 만드는 데에서도 용머리나 연꽃 봉오리는 어떻게 그려야 하며 거기에 용 발톱은 몇 개를 오므리고 펴서 갖다붙여야 하는지, 또 꽃잎은 둥글게 말아야 하는지 길쭉하게 펴야 하는지 또 몇 개를 이어붙여야 하는지 따위에 매임이 없었습니다. 그냥 주어진 조건에서 할 수 있는 만큼 또 하고 싶은 만큼 그리고 새기고 붙이고 했을 것 같습니다.
뱀처럼 새겨진 용.
여기에 새겨진 어떤 용은 꼭 뱀처럼 가느다랗습니다. 머리에 장식도 있는 듯 없는 크게 신경 쓰지 않고 되는대로 만들었습니다. 어떤 용은 어쩌면 이상하게 보일 정도로 눈도 크고 머리도 크게 새겼습니다.
연꽃도 마찬가지입니다. 연꽃인지 아닌지 알아보기 어려울 정도로 조그맣게 흉내만 낸 녀석도 있고요, 아니고 전체 바닥이 꽉 차도록 크게 새겨진 녀석도 없지 않습니다. 어떤 연꽃은 줄기가 너무 굵어서 풀이 아니라 나무 같이 여겨질 정도인 경우도 있습니다.
연꽃을 표현한 것 같습니다만.
또는 전설 속 이상향이라는 삼신산처럼 머릿돌 가득 올망졸망 둥글고 길쭉하게 산 모양을 새겨넣어 놓기도 했습니다. 솜씨는 떨어지는지 몰라도 자유분방함 만큼은 어디에도 처지지 않습니다. 솜털처럼 깃털처럼 가볍게 날면서 바람에 할랑거리는 느낌이 확 끼쳐옵니다.
자유분방의 절정 받침돌의 거북 표정
그러나 이런 정도는 어쩌면 다른 고을 선정비 무리에서도 아주 흔하게는 아니지만 그다지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을 것입니다. 창녕 만옥정 선정비 무리에서 단연 돋보이는 녀석은 바로 받침돌과 거기 거북의 생동하는 얼굴 표정이었습니다.
여기 이 녀석을 보면 웃는 듯 우는 듯 화가 난 듯 그렇지 않은 듯 마옴 속내를 살짝 여미면서 은근히 숨기는 품새입니다. 그래서 좀 응큼하게 여겨지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음흉한 느낌까지 주지는 않고 있습니다.
일부러 그랬는지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는지는 모르겠으나, 오른눈은 바로 뜨고 왼눈은 조금 찡그린 형상이 음흉한 느낌이 일지 않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좀 의뭉스러운 느낌을 주는 데서 그치도록 만든 전체 얼굴의 조화입니다.
이어지는 이 녀석은 또 뭐라고 하면 좋을까요? 거짓이나 꾸밈이 없는 표정입니다. 동그란 두 눈은 아무 생각이 없는 듯이 비치도록 하고 위쪽으로 빠끔 뚫린 들창코 콧구멍은 어린아이처럼 때묻지 않은 느낌을 줍니다.
입은 조그맣게 웃음을 머금은 채 아래위로 슬쩍 벌리고 옆으로 길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위에서 내려다보면 슬그머니 대드는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나 눈높이를 맞추어 바라보면 ‘이리 와 같이 놀자’ 하고 어르는 듯이도 보입니다. 입술 언저리에는 즐거움과 기쁨이 없는 듯이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이 녀석은 드러내놓고 기쁩니다. 기쁨을 참지 못해 웃음이 크게 터졌습니다. 하도 크게 웃느라 입술은 말려 어디로 간 곳 없고 이빨은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습니다. 거북 얼굴을 통째로 차지한 이빨들은 크고도 가지런합니다.
마구 웃는 덕분에 가로로 가늘게 나타나게 된 눈은 보는 이의 마음을 좀더 가볍게 해줍니다. 한가운데 주먹만하고 뭉툭한 코는 함부로 생겨먹은 사내아이에게서 느낄 수 있는 투박하면서도 귀여운 맛을 한껏 내뿜습니다.
받침돌 조그만 돌구멍과 옛 기억
그리고 마지막 이 친구는 덤입니다. 이 받침돌은 장식도 꾸밈도 없습니다. 바라보는 오른편에 둥근 구멍이 하나 있을 뿐입니다. 같은 창녕의 술정리에 있는 동삼층석탑·서삼층석탑의 기단에도 이런 돌구멍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옛적 어머니들이 아들을 얻기 위해 돌가루를 내어 먹은 자취라 하고 어떤 이는 옛적 어린 꼬마들이 소꿉놀이(우리는 ‘빤주까리’라 했습니다.)할 때 밥짓고 반찬 만들려고 돌가루를 빻은 흔적이라 합니다.
과연 어느 것이 사실과 가까울까요? 저는 소꿉놀이 흔적에 한 표 던집니다. 왜냐하면 제가 알기로 아들을 낳으려고 할 때는 석불의 코라든지 빗돌의 글자라든지를 갈아 돌가루를 내었습니다. 여기 돌구멍은 그렇게 고상하거나 영험이 있는 데가 아니라 낮은 곳에 나 있습니다. 아이들이 가장 손쉽게 구멍을 낼 수 있는 자리라는 얘기입니다.
이러고 보니 문득 기억이 났습니다. 어릴 적 이런 돌구멍은 돌가루를 빻아내는 자리인 동시에 나물을 무치거나 밥을 안치는 소도구이기도 했습니다. 아이들은 이런 비석 무리 사이에서 쪼그리고 앉아 흙장난을 하면서 놀았겠지요.
50년이 다 되어가는 그 옛날, 옆집 여자아이(누나였을 수도 있는데)랑 둘이서 부부가 되어 상을 차리고 갓난애를 돌보고 누군가는 일하러 나가고 누군가는 남아서 배웅을 하고는 했습니다. 직장에서 일하는 시늉도 하고 논밭에서 일하는 시늉도 하고 냇가에서 물고기 잡는 시늉도 하곤 했었지요.
그러다 한 순간 배역이 바뀌어 누군가는 물건 사러 장에 가고 누군가는 장사꾼이 되어 흥정도 하고 말다툼도 하다가 다시 부부가 되어 돌가루 쌀밥에 쇠비름 나물을 해서 저녁 차려 먹기도 했고 그러고 나서는 참 잔망스럽게도 이불 덮고 같이 자는 흉내까지 한 번씩 내었었겠지요.
선정비 받침대 조그만 홈에는 이처럼 이제는 가물가물하지도 않는 어린 시절 기억까지 빗물처럼 슬몃 고여 있었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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