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원치 않았던 전쟁, 끝나지 않은 아픔

김훤주 2016. 2. 2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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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 탐방대 (9) 

거제도포로수용소 유적 


9월 21일 사천 대곡숲과 고자치고개로 첫걸음을 내디딘 '2015 경남 스토리랩 이야기탐방대'가 11월 22일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을 끝으로 탐방을 마쳤습니다. 여덟 차례에 걸쳐 하동·함양·창원·사천 등에 어려 있는 역사·문화·생태 유적을 둘러보고 이야깃거리를 찾거나 꾸리는 것이었습니다. 


소설가나 시인 같은 문인과 블로거들로 구성된 일반인 탐방대는 11월 9일 거제 지심도가 끝이었고 진주의 청소년신문 <필통> 기자들이 참가한 청소년탐방대는 11월 22일 거제도포로수용소가 마지막이었습니다. 


◇거제도와 포로수용소 = 한국전쟁 당시 포로수용소가 거제도에만 있었을까요. 아닙니다. 부산·대구를 비롯해 전국 여러 군데에 있었습니다. 전투가 있었던 전국 곳곳에서 포로들이 잡혔기 때문이겠습니다. 교통 사정이 좋지 않았기에 멀리까지 실어나르기도 어려웠겠지요. 



그래도 거제도 가장 큰 수용소를 설치한 데에는 한편으로 이런 사정이 있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부산·대구 같으면 탈출이나 공격이 쉬웠겠지만 바다로 둘러싸인 거제도는 그런 것이 어려웠겠습니다. 1971년 거제대교가 들어서기 전에는 배를 타야만 드나들 수 있는 섬이었던 것입니다. 이에 더해 거제도는 여느 섬과 달리 지어먹을 농토가 적지 않았고 물까지 풍부하다는 이점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1년 2월부터 1953년 7월 27일 휴전으로 포로가 송환·석방될 때까지 가동됐습니다. 포로가 가장 많을 때는 북한 포로 15만, 중국 포로 2만, 의용군·여자 포로 3000명 등 17만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여기에 원래부터 살던 주민 10만과 피란민 15만까지 더해져 40만 인구가 전쟁이 끝날 때까지 부대끼며 살아야 했습니다. 


◇포로수용소와 포로들 = 거제도포로수용소는 청소년 탐방대에 많은 느낌을 불어넣어줬습니다. 멀리 있던 한국전쟁을 가까이로 데리고 나왔던 것입니다. 여태 교과서나 이런저런 동영상에서 '전쟁의 참상' 운운하는 모습을 봐왔지만 실감은 못했었다고 합니다. 


물론 포로수용소가 전쟁이 한창 벌어지고 있었던 현장은 아닙니다. 그런데도 청소년 탐방대는 여기서 한국전쟁의 실상을 제대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전쟁이란 무엇일까요? 그 허상과 실상은 무엇일까요? 


여태 일어난 전쟁에서 뚜렷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그런 전쟁으로 말미암아 지배집단이 치명상을 입는 일은 없다는 것입니다. 정치, 경제, 영토, 에너지, 이념, 식량 등등 전쟁을 치르는 명분 또는 목적은 끊임없이 바뀌어 왔지만, 전쟁이 일어나면 춥고 배고픈 사람만 더욱 추워지고 배고파진다는 사실만은 변함없이 되풀이돼 왔습니다. 


포로수용소유적공원 들머리.


한국전쟁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맞닥뜨린 나라는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미국입니다. 그런데 남한과 북한 그리고 중국과 미국에서 한국전쟁으로 말미암아 지배집단이 바뀌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나라마다 지배집단은 더욱 커지고 단단해졌습니다. 


전쟁 탓에 굶고 얼고 곪고 하다가 결국 죽어나가기까지 했던 존재는 원래부터 춥고 배고픈 사람들이었습니다. 전쟁은 지배집단이 일으켰고 그 피해는 지배당하는 민중이 뒤집어썼습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남한 또는 미국의 선행과 선처를 더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공산포로들은 그와 같은 선행과 선처를 받았음에도 거듭 악행을 저질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를 두고 모조리 틀렸다고 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이야기탐방대 청소년들은 이런 측면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한편으로 전쟁의 본성 자체에 대해서도 들여다볼 수 있게 됐습니다. 


◇포로수용소와 대한민국 = 최인훈이 쓴 소설 <광장>은 주인공이 이명준입니다. 이명준은 남과 북을 오가는 우여곡절을 겪다가 낙동강전투에 인민군으로 나선 끝에 사로잡힌 포로입니다. 


당시 거제도포로수용소에는 이런 이명준이 수도 없이 많았습니다. 이명준은 친공도 아니고 반공도 아닙니다. 이명준은 중립국 인도로 가는 배에서 투신해 죽습니다. 


한국전쟁이라는 국제전쟁은 한반도 지배권을 둘러싼 충돌이었습니다. 공산과 반공이 맞붙은 이데올로기 전쟁이기도 했습니다. 거기에는 지배하는 집단의 이해관계만 있을 뿐 지배당하는 이들의 권리나 인권은 발조차 붙일 수 없었습니다. 


반공도 좋고 친공도 나쁘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도 좋고 공산주의도 나쁘지 않습니다. 다만 사람에 대한 이해와 존중만 이뤄지고 보장된다면 말씀입니다. 그러나 친공도 반공도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또한 그러하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소설 <광장> 주인공 이명준을 보면, '제3지대', '중립국', '반공도 아니고 친공도 아닌 땅'도 그러하지 못했지 싶습니다. 과연 선택은 어떠해야 했나요? 선택할 수 있는 여지가 언제 주어지기라도 했던가요? 


1950년 부서진 대동강철교 그림 앞에서.


전쟁 피해자 보호를 위한 국제조약인 제네바협약을 따르면 포로는 출신 지역(국가)별 일괄 송환(석방)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승만 정부는 반공포로와 공산포로로 나눠 반공은 남한에 석방하고 친공은 북한으로 송환했습니다. 포로를 친공과 반공으로 구분하는 데에 숱한 공작이 개입됐음은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포로들한테 반공 또는 친공은 무슨 의미였을까요? 반공은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이고 친공은 돌아간다는 것이었습니다. 어떤 사람은 왜 돌아가지 않았고 어떤 사람은 왜 돌아갔을까요? 여러 까닭이 있었을 테지만, 대부분은 먹고사는 문제와 인간관계가 핵심이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먹고살기 위해 돌아갔고 먹고살기 위해 돌아가지 않았으리라 보는 것입니다. 가깝고 친한 사람이 있기에 돌아갔고 가깝고 친한 사람이 사라졌기에 돌아가지 않았으리라 보는 것입니다. 



물론 이데올로기에 따라, 이데올로기가 낳은 잔인함, 잔인함에서 잉태된 어떤 뜨거운 정념 때문에 돌아가거나 돌아가지 않거나 한 사람도 분명 있었겠지요만. 


거제도포로수용소는 1953년 7월 27일 휴전이 이뤄지면서 원래 하던 일을 멈췄습니다. 지금 거제도포로수용소 자리에 들어선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은 하는 일이 무엇일까요. 청소년탐방대는 거제도포로수용소유적공원에 와서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들여다봤습니다. 


거제도포로수용소를 들여다보니 한국전쟁과 전쟁 일반의 실상과 본성이 보였습니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지구상 모든 인간사회가 전쟁터였습니다. 극히 일부분을 제외하고는 말씀이지요.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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