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1화


[연재를 시작하며] 한 출판사에 초대받아 직원들과 차를 마실 기회가 있었다. 출판사는 '나는 왜 진보(보수)가 되었나'를 주제로 인터뷰한 내용을 엮어 책을 내고자 했다. 내부 회의에서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 수 있는 작가로 내가 거론됐나 보다. 고마운 평가였다. 


또 진보와 보수는 언제나 흥미로운 주제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분법으로 세상을 나눠 생각하는 것은 언제부터인가 관심 밖이 됐다. 대신 그 자리를 '네트워킹'이라는 주제가 채웠다.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네트워킹을 한다. 돈을 빌리고, 어울려 놀고, 일을 맡기고 모두 네트워킹이다. 시민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연대 성명을 내는 것도 이른바 '사회적 네트워킹'이다.


내 첫 작품인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석궁 사건'이 배경이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인권운동사랑방, 구속노동자후원회, 교수노동조합 등 단체들이 모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단체들은 모였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의문은 '확장성'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같은 소셜네트워크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확장성을 보장한다.  이런 네트워킹 기반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이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네트워킹을 한정하는 게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처럼 삶에서 불쑥 의문은 들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는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네오도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삼키고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부패 검사님!" 이 편지 한 통에 무죄가 유죄로


글 서형 작가 | 그림 공갈만


'석궁 사건'의 숨겨진 이야기




이야기는 네트워킹에 눈을 뜨게 된 경험부터 시작한다. 2008년 6월 석궁 사건 항소심이 기각되자 원고 쪽은 대법원에 상고했다. 당시 민교협 원로였던 김세균 교수는 선고하는 날까지 대법원 앞에서 교수들이 릴레이 1인 시위를 한다는 성명을 냈다. 점심 때 한 시간 정도 피켓을 들다가 가는 일이었지만, 먼 지역에 있는 교수에게는 하루를 들여야 하는 일이었다.


잘 이어지던 1인 시위는 17일째에 고비를 맞는다. 서울 광화문 촛불집회로 모든 이슈가 몰리던 때였다. 시위에 동참할 교수가 더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서울지역 교수 1000명에게 연대를 호소하는 편지를 보냈다. 교수 두 명에게 답장을 받았다. 못하겠다는 내용이었다. 그 답변을 읽고 생각했다. 이런 고민은 처음이었다. 


'내가 무슨 일을 제안할 때 어떻게 하면 사람들이 바로 동참할까?'


특정 사안에 대한 관심이 높다면 동참이 쉬울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 사람은 모든 분야에 관심을 두지 못한다. 답은 김세균 교수에게 있었다. 당시 17일 동안 시위를 끌고 온 것은 김세균 교수 인맥이었다. 


1인 시위가 이어지는 동안 매일 시위에 나선 교수와 얘기를 했는데 정작 '석궁 사건' 당사자인 김명호 교수와 친한 사람은 없었다. 평소 존경하는 김세균 교수 제안을 거절하지 못했던 것이다.


김세균 교수. ⓒ 교수노조


이처럼 상대가 나를 좋아하면 연대 요청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다음 고민은 어떻게 해야 사람들이 나를 좋아할 것인지로 넘어갔다. 경청, 존중, 이해 같은 덕목은 누구나 아는 것이다. 하지만 이를 실천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사람들을 만나는 태도부터 달라질 수밖에 없었다. '석궁 사건'을 거치면서 깨달은 것은 이 정도다.


'석궁 사건'을 계기로 2009년 서민들이 벌이는 소송 전쟁으로 관심사가 넘어갔다. 이는 두 번째 작품 <법과 싸우는 사람들> 배경이 됐다. 2009년부터 2011년까지 이 주제에 매달렸는데 하루하루가 전쟁이었다. 


당시 취재원은 임정자(1943년생)씨다. 힘은 없지만 신념 하나는 강한 분이었다. 하지만 이런 유형은 현실에서 파멸로 향하는 기차였다. 힘없는 그녀가 강하게 부딪히는 상대는 현실에서 힘을 쥔 사람이었다.


가령 이런 식이다. A는 법을 어겨도 검찰에 가면 벌금 백만 원에 그쳤고, 그걸 또 정식재판청구를 하여 법원에 가면 무죄를 받았다. 그 판결문을 다시 지상파 뉴스가 받아주며 A의 기세를 높였다.


도저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당시 1심 법원이 무죄를 선고하자 검찰이 항소한 상태였다. 나는 언론사를 찾아다녔는데, 기사 거리가 안 된다며 손사래를 쳤다. 언론은 서울대 출신 교수가 판사에게 석궁을 쏜 것과는 비교할 수 없는, 평범한 억울한 일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언론과 연대는 기대할 수 없었다.


또 한 번 확인한 네트워킹의 위력


이 상황에서 법원에 제대로 된 판결을 해달라는 신호를 보낼 방법은 뭘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매우 제한적이었다. 서울중앙지검 형사1부부터 5부까지 부장검사에게 편지를 보냈다. 말도 안 되는 사안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검사님! 부패검사의 실력을 보여줍시다'라고 썼다. 


그랬더니 검찰이 반응을 했다. A의 항소심에 내가 보낸 편지를 추송서(재판과 관련된 일체의 추가 서류)로 제출한 것이다.  


내가 검찰에 편지를 보낼 때마다 검찰은 이를 추송서로 법원에 넘겼다. 


검찰 추송서 ⓒ 김민정


결국 A는 항소심에서 50만 원 벌금형을 받았다. 


세상에 '악의 축'은 없었다. 사안에 따라서 누구와도 네트워킹이 가능했다. 그걸 더욱 절감하게 된 계기가 영화 <부러진 화살>이다. 당시 저작권 문제로 나는 마음 고생이 심했다. 


사법부를 비판하는 영화인데, 영화사와 갈등을 못 풀어 이 문제를 법원으로 끌고 간다면 나는 대중에게 욕먹게 돼 있었다. 밤새 고민하다가 법조계 관련자에게 이메일을 보냈다. 이미 책 <부러진 화살>을 읽어본 사람들이었다. 나에게 유리한 답변을 했는데, 그들 중에는 이름을 밝힐 수 없지만 판사도 있었다. 그리고 그 답변을 모아서 영화사에 보냈다.


2011년에는 다른 일도 많았다. 2011년 6월 <법과 싸우는 사람들> 주인공 임정자씨가 법정구속됐다. 신념 하나로 살아온 그는 재판장 앞에서도 절대 굽히지 않았다. 무거운 형량이 선고됐다. 


당시 임씨는 사선변호사를 선임했다. 변호인은 구치소 접견에서 임씨 신념을 이해해줬지만, 임씨는 그를 해임했다. 왜 그랬을까? 막상 변호인이 쓴 항소이유서 내용이 딴 판이었기 때문이다. 항소이유서에는 임정자씨가 구치소 내에서 반성하고 있고,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 가득했다. 사법피해자 경험을 들으면 이런 일은 비일비재하다.


사실 대다수 사람은 감형을 받으려면 선처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한다. 정말 그 방법밖에 없을까? 나는 당시 임정자씨가 신념을 지키면서 집행유예로 나올 방법을 고민했다. 통상 법원은 여론에 민감하다고 한다. 그래서 항소심 판결을 앞두고 언론인들 탄원서를 모아서 왕창 집어넣었다.


언론인들 동맹탄원서 ⓒ 김민정


탄원서 내용에는 '잘못했다'는 구절이 들어 있지 않았다. 연로한 사람을 감옥에 두는 건 가혹하니 다른 방안을 강구해달라는 내용이었다. 항소심 재판부는 임정자씨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2012년 여름의 일이었다. 당시 나는 몹시 지쳤다. 약 5년간 피해자들만 만나다 보니, 더는 만나 이야기를 들을 기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서 한 해 동안 서울을 떠나기로 했다. 그리고 거기서 대한민국 네트워킹 대가들을 만나게 된다. 우선 <오마이뉴스> 대전충남 주재 기자인 심규상을 소개한다. 


(다음회에서 계속)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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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기록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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