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형 작가/대한민국 네트워크 종결자들

5화. 김순재 네트워킹과 경남의 연대 문화

기록하는 사람 2016. 5. 19. 16: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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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네트워킹 종결자들 5화


사회 구성원은 누구나 네트워킹을 한다. 돈을 빌리고, 어울려 놀고, 일을 맡기고 모두 네트워킹이다. 시민단체가 정부를 상대로 현안에 대한 연대 성명을 내는 것도 이른바 '사회적 네트워킹'이다.


내 첫 작품인 <부러진 화살>은 2007년 1월 발생한 '석궁 사건'이 배경이다. 당시 이 사건이 터지자 인권운동사랑방, 구속노동자후원회, 교수노동조합 등 단체들이 모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이 터질 때마다 이 단체들은 모였다. 


이들을 지켜보면서 생긴 의문은 '확장성'이었다. 페이스북(facebook), 트위터(twitter) 같은 소셜네트워크 (Social Network Service) 기반은 이전과 비교할 수 없는 확장성을 보장한다.  이런 네트워킹 기반은 꾸준히 생겨나고 있다. 이런 환경에서 운동이 확장성을 지니지 못한다면 이는 기술 문제가 아니다. 스스로 문제를 되돌아봐야 할 것이다.


어느 순간 네트워킹을 한정하는 게 편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영화 <매트릭스> 주인공 네오처럼 삶에서 불쑥 의문은 들지만 우리가 얼마나 갇혀서 생각하는지는 스스로 알 길이 없다. 네오도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을 삼키고서야 진실을 마주하게 됐다. 나는 이 글이 독자에게 모피어스가 건넨 '빨간 약'이 될 것이라고 확신한다. <서형>




5화. 김순재 네트워킹과 경남의 연대 문화

글 서형 작가 | 그림 공갈만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중에 여러 가지 지역균형발전 정책을 펼쳤다. 참여정부가 추진한 큰 정책으로 행정수도와 공공기관 이전을 꼽을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정책에 온 힘을 기울인 이유가 뭘까. 공간이 사고를 지배한다는 점을 고려하면 노 대통령이 서울이 아닌 부산에서 활동했기 때문이라는 설명이 설득력 있다. 


역대 대통령은 모두 고향을 떠나 서울에서 주로 활동했다.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은 김해 봉하마을에서 태어나 부산·경남을 기반으로 변호사 활동을 했고 인적 네트워크를 형성했다. 그에게는 우리 사회가 민주주의를 지향한다면, 지역 간 권력 배분이나 기회 균등이 확보돼야만 한다는 절실함이 있었다. 다른 정치인과 차별되는 지점이다.


하지만 이러한 지역균형발전정책들에 대해서 서울에 위치한 중앙언론들 시선은 곱지 않았다. 참여정부 말기 경남지역 시민운동가들은 주변에서 걸핏하면 내뱉는 '잃어버린 10년'이라는 넋두리에 힘이 빠지곤 했다. 


최소한 경남만 놓고 보면 보수 진영은 단 1년도 잃어버린 적이 없었다. 도지사, 시장을 비롯해 국회의원·광역단체의원·기초단체의원까지 대부분 한나라당 소속이었다. 그럼에도 '잃어버린 10년'은 지역에서 끊임없이 재생산되고 소비됐다. 이 같은 인식을 형성하는 재료를 한없이 공급한 매체는 물론 중앙보수언론이었다.


그런데 진보와 보수를 가리지 않고 우리 안에 깊숙이 침투해 있는 서울 중앙발 시각은 단연코 다음과 같다.


'우리나라는 KTX로 3시간이면 갈 수 있을 만큼 작다. 우리나라는 아파트라는 거주문화, 마트와 백화점이라는 소비문화가 어디든지 같다. 이런 시대에 지역성이라는 담론이 크게 제기될 것이 있는가.'


지역담론이 무의미한 시대라고?


중앙중심적 사고 ⓒ 공갈만


지역성은 하나의 지역이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독특한 특성을 말한다. '갱남 사람' 김순재씨 예를 들어 살펴보자.


1983년 진주 경상대학교에 입학한 김순재는 운동권을 맴돌았다. 낙농학을 전공한 그는 종종 진주와 가까운 사천에 사는 강기갑을 만나기도 했다. 그는 농사를 짓다 1976년부터 한국가톨릭농민회 활동을 해왔다. 김순재 또한 졸업하고 나서 1987년 6월 민주항쟁 이후 만들어진 전국농민회에 합류했다. 2003년경에는 경남 농민회 사무처장을 맡았다.


김대중 대통령은 퇴임 일주일 전, 칠레 라고스 대통령을 불러서 한-칠레 자유무역협정(FTA)을 맺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2년 뒤인 1947년 미국이 주도한 무역 체제가 '관세와 무역에 관한 협정(GATT·General Agreement on Tariffs and Trade)'이다.


여기서 농산물까지 포함한 게 '세계무역기구(WTO·World Trade Organization)' 체제가 된다. 이 과정에서 여러 나라에 동의를 얻자니 협상 속도가 지지부진해 국가별 협정으로 접근한 게 '국가 간 자유무역협정(FTA·Free Trade Agreement)' 제도다. 문제 발단은 한-칠레 자유무역협정 체결이었다.


2003년 5월, 김순재는 서울에서 열린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 회의에 참석했다. 한-칠레 FTA로 농가 피해가 예상되어 농민들이 크게 반발할 때였다. 당시 전국총연맹 상임집행위원회는 한-칠레 FTA를 막는 투쟁 방법으로 '고속도로 봉쇄'를 선택했다. 결행 날짜는 6월 20일로 정했다. 그날 밤 김순재는 창원으로 돌아오며 고민에 빠졌다.


"갱남에 고속도로가 밸시리 많다카네." 


충남은 서해안고속도로, 전남은 호남고속도로, 경북은 경부고속도로만 막으면 됐다. 하지만 경남은 남해고속도로, 88고속도로, 구마고속도로, 경부고속도로,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막아야했다. 


김순재는 돌아오자마자 경남지역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을 긴급 소집했다.


"고속도로 봉쇄로 결정 났다. 막는 방법은 내가 이야기하겠다."


먼저 진주농민회 사무국장을 쳐다봤다.


"일단 진주 사무국장! 니는 무조건 남해고속도로를 다 틀어막아라. 진주 니네는 다른 데 지원도 없다."


진주는 정읍·나주 등과 함께 농민회에서 '1급지'로 분류하는 곳이다. 그만큼 농민회원수가 많았다.


"거창·산청·하동·남해·합천은 통영-대전 고속도로를 틀어막아라. 수단과 방법 강구해서!"


88고속도로까지 막을 여력은 없었다. 답은 금방 나왔다.


"88고속도로는 차가 별로 안 다니니까 고마 놔두삐라. 김해·창원·고성·의령·함안 모두 구마고속도로로 간다!" 


고속도로 봉쇄투쟁 ⓒ 공갈만


시·군농민회 사무국장들은 각기 분주하게 계획을 짰다. 계획 중에는 고속도로에 인접한 국도 가드레일을 풀어 차를 올리는 방법도 있었다.


6월 20일 예정대로 각자 맡은 고속도로로 달려가 실행에 옮기기 시작했다. 경남경찰청 정보과장이 대화를 요구했다. 하지만 김순재는 거절했다. 총연맹에서 결의한 이상 협상할 여지는 없었다. 정보과장은 안타깝다는 듯 한마디 던졌다. 


"전국에 막은 데가 없는데 경남만 다 틀어막는다."


순간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김순재는 도연맹 사무처에 전화해 상황 확인을 부탁했다. 한 군데도 막은 곳이 없었다.


충남 당진에서는 이미 잡혀갔다는 소식이 들렸고 경북은 사전 차단돼 꼼짝하지 못했다. 경남은 자체적으로 판단해 마무리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충남 당진에서 연행된 농민들을 석방하는 조건으로 해산하겠다는 제안을 경찰에 전했다. 당연히 경남 경찰 손이 충남에 미칠 수는 없었다. 


며칠 뒤 고속도로 봉쇄 투쟁 사건으로 전국에서 130명이 입건됐다. 이 가운데 117명은 경남농민회 회원이었다. 깡마른 체구에 덥수룩한 수염을 휘날리는 경남농민회 의장 강기갑을 비롯해 김순재도 연행됐다. 


여기서 궁금해진다. 그 많은 고속도로를 일시적으로 봉쇄한 경남 농민회 저력은 어디서 오는가? 경남은 타 지역보다 상대적으로 강한 연대문화가 있다. 여기에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보수 신문 노조의 민주노총 가입, '마산·창원'이라 가능


고속도로는 우리나라 정치·경제 정책이 낳은 결과물이다. 경남에 고속도로가 많다는 것은 노동자들도 많다는 의미다. 수출주도형 공업화 전략 핵심은 '최소 투자와 최대 수익'이었다. 이는 당연히 노동자 희생으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산·창원지역은 1987년 6월 민주화 투쟁보다 연이어 벌어진 노동자 대투쟁이 더 격렬했던 지역이었다. 당시 마산 수출자유지역 노동자들은 끊임없이 집회를 했고 창원공단 노동자들은 정부가 투입한 백골단에 맞섰다.


전국민주노동조합총연맹(민주노총) 전신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전노협) 중심에는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마창노련)이 있었다. 전노협 핵심은 영남권과 수도권이었다. 국토 서쪽은 광주 아시아자동차를 비롯해 일부 업체만 전노협에 참여했다. 이는 훗날 영호남 간에 지역발전에서 극심한 불균형을 초래했다.


마창노련을 낳은 지역답게 마산·창원에는 독특한 연대 문화가 있다. 광주MBC는 2012년 총파업 때 지역 민주노총과 처음 교류했다고 한다. 하지만 마산MBC(현 MBC경남)는 지역 노동계와 정기적으로 교류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에는 민주노동당 사무국장이 라디오 프로그램을 진행하기도 했다. 


지역에서 보수적인 논조를 유지하는 <경남신문>도 민주노총 산하 언론노조 지부로 꾸준하게 활동한다. 서울로 치자면, <조선일보> 기자들이 민주노총에 가입하여 활동하는 모양새다. 서울에서는 상상이 잘 안 되는 대목일 것이다. 그러나 지역 언론이 논조와 관계없이 노동조합 활동에 적극적이다. 그 이유는 마산·창원지역에서 노동이 언론에서 다루는 주요 소재이기 때문이다. 


또 학계에서도 이 분야 연구자들 활동이 활발해 지역사회에서 늘 엮일 수밖에 없다. 필자는 민주노총 조합원이 소수인 한 회사의 직원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회사를 상대로 목소리를 내는 배경이 여기에 있다. 


회사가 노조원에게 부당한 징계를 하면 노조원은 지방노동위원회로 달려갈 것이다. 거기 구성원들은 대학원 지도교수부터 시작하여 모두 안면 있는 지역사람들로, 직간접적으로 민주노총과 관련될 확률이 크다는 점이다. 경남에서는 민주노총이 농민회만이 아니라 각 지역시민사회 단체와도 유기적으로 연결돼 긴밀히 움직인다. 


또한 경남은 고속도로만이 아니라 친일파도 다른 지역보다 많았다. 지방자치가 시작되면서 각 지방자치단체가 지역을 상징하는 문화 아이콘으로 지역 출신 유명 근현대 인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몇몇 인물들은 친일과 독재에 부역한 삶이 불거지며 논란을 낳게 된다. 지역 출신 근현대 인물 재조명 사업이 느닷없이 친일 문제에 대한 검증으로 이어지게 된 것이다. 


조두남기념관 개관식에서 황철곤 마산시장이 시민단체 회원들에 의해 밀가루를 뒤집어 쓴 모습(왼쪽)과 열린사회 희망연대 김영만 대표가 거세게 항의하는 모습. ⓒ 경남도민일보


마산시는 1999년 8월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 계획을 발표 했는데, 경남은 이은상·조두남 기념관 건립사업 뿐만 이나라, 진주 남인수, 통영 유치환, 창원 이원수까지 친일 행적이 있는 문화·예술인에 대한 기념사업을 반대했고 대부분 관철했다. 


그런데 전북 고창은 다른 지역에서는 시민단체와 지방자치단체간의 갈등이 한참 진행 중이던 2000년이 넘어서야 시작종이 울렸다. 이유가 무엇일까? 전북 고창 출신 시인 서정주가 다른 친일파들보다 장수했기 때문이다.


2000년 12월 24일 시인 서정주 사망 소식이 메인 뉴스를 장식했다. 이듬해 2001년 11월 3일 서정주 고향인 전북 고창군에서 '미당 시문학관'이 개관한다. 당시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는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 최재흔 씨였다.


같은 친일파 반대 운동도, 지역마다 달랐다


서해안고속도로 ⓒ 공갈만



2002년 11월 고창군이 '미당 시문학제'를 개최하려고 하자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를 비롯한 사회단체들이 군청으로 몰려가 항의했다. 2002년 10월 21일 <전북일보>에는 '미당 시문학제 취소'라는 기사가 소개됐다.


그런데 한국사회에서 미당 서정주는 문화 권력이었다. 그해 <중앙일보>는 '미당문학상'을 만들었다. 또 동국대학교에서 고창으로 문학기행을 오기 시작했다. '미당 시문학제'는 그렇게 이어졌다. 이 행사가 열릴 때면 미당 시문학관 입구에는 '차라리 일장기를 걸어라'라는 펼침막이 걸렸고, "시만 잘 쓰면 민족반역죄도 용서받을 수 있느냐!"는 구호를 외쳤다. 


결국 2004년 고창군은 미당 시문학관에 서정주가 남긴 친일작품까지 전시하기로 하며 반대 목소리를 높인 단체들과 합의한다. 친일 작품은 문학관 입구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방에 걸렸다.


최재흔씨가 이런 활동을 하며 가장 어려운 부분은 "왜 외지인이 우리 행사에 관여하냐?"는 말을 들을 때였다. 그는 그 지역 내 언론과 시민단체 등 중간집단의 호응이 없으면, 정당성을 입증받기가 힘들다고 했다. 그렇다면 고창 지역에서 어떤 사람들이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와 연대했을까?


고창지역에는 경남처럼 민주노총 소속 노동자들은 빈약하지만, 유족회 회원들은 풍부하다. 서정주가 1943년 경 조선 사람들에게 대동아전쟁 참가를 독려하고 찬양하는 홍보담당관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재흔씨는 반대 활동에 태평양전쟁희생자유족 고창지부와 고창 지역신문사가 연대한 점이 첫 번째 성공요인이라고 했다.


두 번째는 바로 2001년 12월 개통된 서해안고속도로 덕이었다. 최재흔씨는 전북 익산 남성여중 체육교사였다. 사안이 발생하면 군수를 만나야 하고, 유족회와 모임을 가져야 한다. 한 해에 적어도 20번은 익산과 고창을 왕복해야 한다. 미당 서정주가 타계한 그 해에 개통된 서해안 고속도로 덕분에 전북 익산에서 고창까지 1시간 40분이면 갈 수 있게 됐다.


대체 영호남 간의 극심한 지역발전 불균형은 어느 정도인가? 이런 불균형 때문에 한 도시는 다른 도시와 다른 풍경을 자아낸다. 한 KBS 기자는 2010년 10월 22일 목포방송국으로 출근하면서 본 광경을 잊지 못한다고 했다.


동네 빵 싹쓸이 ⓒ 공갈만


당일 전라남도는 영암에서 첫 F1레이스를 개최했다. 목포 시내에서 영산강 하굿둑을 지나 경기장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그는 집 앞에 있는 작은 빵집에서 매일 빵을 먹고 출근했다. 그런데 F1레이스 기간 내내 영국 BBC 스텝과 F1레이싱 팀인 레드불 스텝들을 포함한 외국인들이 동네 빵을 싹쓸이했다.


"자네, 레드불팀 빵 먹는 거 봤는감?" 


빵집 주인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영암군에 있는 경기장 근처에는 숙소와 식당 등 이들을 수용할 만한 기반시설이 없었다. 사람들은 한 시간 정도면 갈 수 있는 목포로 몰렸다. 밤이면 모든 술집에서 외국인들 노랫소리가 울려 퍼졌다. 경기가 끝나면 쏟아져 나오는 인파를 도로가 감당하지 못하면서 영산강 하굿둑에서 목포까지 4시간이 걸렸다고 한다.


물론 시간이 흐르면서 F1경기장 주변 인프라와 도로사정이 차츰 나아져갔다. 2012년 남해안고속도로 영암-순천 노선이 개통됐다. 순천에서 목포까지 2시간 걸리던 게 한 시간으로 줄었다. 이런 곳이 많다. 2005년에는 포항-대구 고속도로가 개통됐다. 대구에서 포항까지 40분 거리로 단축된 것이다. 


필자는 민족문제연구소 전북지부 대표였던 최재흔씨에게 친일잔재청산 운동을 왜 그리 열심히 하는지 물었다. 그는 '정체성 회복'이라고 답했다. 중간집단은 자기가 머물고 있는 공간이 중심이 돼 활동을 한다. 2005년 대구-포항 고속도로 개통에 맞춰 대구MBC에서는 '대구도 항구다'라는 리포터가 나오기도 했다. 자기만의 시각을 갖는 것, 이것이 바로 자기 정체성을 찾아가는 일이다.


계속해서 우리는 '강릉의 위키리크스'로 불리는 한 강릉의 지역언론을 통해서, 중간집단이 보여준 위력을 살펴보기로 한다. 


(다음6화-강릉의 위키리크스) 서형작가  연락처 seohyung224@gmail.com

※이 글은 오마이뉴스에도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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