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쿠데타 시대를 살았던 김종직의 참 모습은

김훤주 2016. 2. 14. 07:30
반응형

2015 경남 이야기 탐방대 (5)

함양 김종직의 면모 


점필재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사림의 조종(祖宗)이라 일컬어집니다. 사림의 시작이고 으뜸이라는 뜻입니다. 김종직은 함양군수를 하면서 많은 자취를 남겼습니다. 백성을 아끼는 마음에서 조세로 말미암은 고통을 줄이려 했으며 자기 소신과 맞지 않는 기우제도 '백성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지냈습니다. 


김종직에 대해 대부분 사람들은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갖고 있습니다. 조광조 등등으로 대표되는 1500년대 사림파의 스승이다 보니 그렇게 된 모양입니다. 김종직 이후 형성된 사림파는 훈구파와 맞섰습니다. 세조의 단종 왕위 찬탈 등에 공훈이 있는, 그래서 권력과 재산을 많이 가진 기득권층과 대립해야 했던 이들에게는 '옳음'밖에는 무기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훈구파로 둘러싸인 가운데서 고군분투해야 했던 김종직에게는 '옳음'만 무기인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타협' 또는 '영합'이 더 큰 무기였습니다. 어쨌든 (중앙 정계에서) 살아남아야 했으니까요. 


◇관영 차밭과 용유담 = 관영 차밭 조성터는 함양 휴천면 동호마을 들머리에 있습니다. 동호마을은 옛적 큰 절 엄천사가 있었던 자리입니다. 김종직은 공물 부담을 크게 줄이는 성과를 냈습니다. 


당시 공물을 조정에서는 대체로 해당 지역 토산물로 바치도록 했지만, 함양에 대해서는 나지도 않는 차를 내도록 했습니다. 함양 백성들은 차가 나는 이웃 고을을 찾아가 쌀 한 말을 주고 차 한 홉을 받아와 바쳤습니다. 


김종직은 신라시대 당나라에서 차 씨앗을 들여와 지리산에 심었다는 기록이 <삼국사기>에 뚜렷하게 나오는데 함양에서 차를 재배하지 않았다니 이상했습니다. 함양은 다(咸) 볕(陽)이 아니던가요. 지역 유지들과 논의해 대책을 세웠습니다. 그것은 민영이 아닌 관영(官營) 차밭 조성이었습니다. 


그 자리가 엄천사 북쪽 대나무밭 아래였습니다. 지금 관영 차밭 조성터는 옛날 그 자리에 있지 않고 도로 건너편 정자(淸風亭) 옆에 있습니다. 김종직이 이를 두고 지은 한시 두 수에서는 백성 고통을 덜고 조금이라도 편하게 하려는 의지가 뚜렷이 나타납니다. 


관영 차밭 조성터.


관영 차밭 조성터 청풍정 아래에는 이처럼 돌로 만든 장기판이 놓여 있습니다.


일행은 청풍정 아래서 볕을 가리며 얘기를 주고받았습니다. 원래 조성됐던 차밭 자리를 가늠해 보기도 했고 정자 축대 석재들에서 옛적 엄천사 자취도 찾았습니다. 


이어 김종직이 백성들을 위해 기우제를 지냈다는 용유담으로 갔습니다. 용유담은 지리산 골짝물이 흘러내리는 바위가 크고 매끈하고 시원스러우며 아름답습니다. 말 그대로 용(龍)이 노니는(遊) 여울(潭)입니다. 


유교는 현실주의입니다. '괴력난신(怪力亂神)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는다'가 공자 이래 불문율인 까닭입니다. 김종직 또한 그에 철저했지만 백성을 위해서라면 그런 소신도 스스로 접었습니다. 가뭄이 오래가자 백성들은 고을 수령한테 기우제를 지내달라 요청했습니다. 


실은 기우제가 비를 내리게 하지는 않습니다. 김종직 또한 기우제가 효과가 있을 리 없다고 생각했지만 기꺼이 제상을 차리고 정성을 다해 빌었습니다. 그 자리가 용유담이었습니다. 


용은 상상과 전설 속에서 물을 관장하고 다스리는 신물(神物)이었기에. 이제 막 단풍이 들기 시작하는 용유담은 언제나처럼 아름다웠습니다. 일행 한 명이 말했습니다. "조용하네요. 기운이 좋아요. 제대로 빌면 하늘에서 비를 내려줄 만하겠네요." 


기우제를 지낸 용유담


◇학사루와 이은대 = 학사루는 객사에 딸린 누각입니다. 객사는 임금 궐패를 모셔 놓는, 그래서 고을 으뜸 건물입니다. 김종직에게는 그이가 '강직'하다는 이미지를 결정적으로 굳혀준 공간입니다. 


이른바 '유자광 현판 사건'은 1471년 일어났습니다. 당시 유자광은 관찰사(지금 도지사) 신분으로 함양 수동에 있는 친척집을 찾아가는 길이었습니다. 함양 읍내를 둘러보고 학사루에 올라 한시를 한 편 지어 현판으로 내걸었습니다. 


뒤에 이를 보고받은 김종직은 그 현판을 떼어내 불태워 버렸습니다. '유자광이 어떤 사람인데 감히 거기에다 현판을 건단 말이냐!' 참으로 강직합니다.(유자광은 이 일로 김종직에게 원한을 품었고 이는 나중에 김종직이 부관참시를 당하는 무오사화의 씨앗이 됐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유자광(1439~1512)은 서자 출신이었습니다. 아첨과 뇌물로 출세한 인물로도 알려져 있습니다. 더군다나 단종 폐위 쿠데타의 장본인 세조의 총신이기도 했습니다. 김종직으로서는 함께하기를 꺼릴 만한 존재였습니다. 


이은대 충혼탑이 마주보이는 자리에서 최헌섭 두류문화연구원 원장이 탐방대 구성원들에게 함양에 있는 김종직 관련 자취들을 설명해 주고 있습니다.


그래도 유자광은 군수인 자기보다 한층 높은 관찰사였습니다. 그런 유자광이 함양을 찾았으니 어지간하면 나아가 맞이하겠건만 김종직이 도저히 그럴 수는 없었습니다. '산골로 민정(民情)을 살피러 나갔다'는 핑계를 대고 숨었습니다. 김종직이 숨은 데가 이은대(吏隱臺)입니다. 


이(吏)는 벼슬아치=김종직이고 은(隱)은 숨는다는 말입니다. 학사루 유자광 현판을 떼어낸 그 기세에 견주면 조금은 옹졸해 보이기도 합니다. 어쩌면 김종직이 자기 방식대로 타협한 결과라 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이은대는 학사루에서 위천을 건너면 나옵니다. 함양 읍내가 한눈에 장악되는 언덕배기입니다. 일제강점기에는 신사가 있었고 지금은 현충탑이 우뚝합니다. 


함양 백성들은 김종직이 떠나자 여기 생사당(=이은당)을 세웠습니다. 산 사람을 기리는 사당은 드물었습니다. 함양에서 베푼 김종직의 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됩니다. 이 생사당은 훗날 유자광 세력에게 철거됐다고 합니다. 이런 내력을 안고 이은대는 이름만 남은 채 흐르는 위천과 멀리 상림숲을 굽어보고 있습니다. 


학사루에 오른 이야기탐방대


◇학사루 느티나무 = 함양초교 교정 학사루 느티나무는 김종직 개인의 인간적인 아픔과 슬픔이 엉겨 있는 자취입니다. 1474년 봄에 다섯 살 셋째 막내아들을 잃고 그 슬픔 속에서 심은 나무라 합니다. 


막내는 아명(兒名)이 목아(木兒)였습니다. 나무처럼 오래 살라는 뜻으로 목아라 했을까요. 그렇게 심긴 학사루 느티나무는 이제 500년 넘는 세월을 견디며 아름드리로 높다랗게 자랐습니다. 김종직은 당대뿐만 아니라 후대에도 이름이 높지만 인간적으로는 매우 불운했습니다. 


같은 해 여름에는 외동딸이 죽었고 가을에는 장남마저 세상을 버렸습니다. 게다가 일곱 해 뒤(1481년)에는 둘째아들과 그 둘째가 낳은 손자까지 잃고 말았습니다. 그야말로 천지가 끝없이 아득한(天地極茫茫·막내를 잃고 쓴 한시에 나오는 표현) 지경이었겠습니다. 


학사루 느티나무.


어쨌거나, 그렇다면 김종직은 과연 어떤 사람이었다고 해야 적당할까요? 성품이 강직한 사림의 조종? 처신이 옹졸한 양반 관료? 백성을 대단하게 위했던 고을 수령? 자식 넷을 모두 앞세운 불운한 아버지? 


그런데 이 모든 것이 그 자체로는 그냥 한 단면이지 않을까요? 전체를 더한 위에 시대 상황까지 얹어야 김종직의 원래 본모습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요? 가만 있자, 그이의 시대는 세조 왕위 찬탈로 조성된, 지금으로 치자면 박정희·전두환 치하와 같은 상황이었지 않나요? 


한국콘텐츠진흥원과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최·주관하고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가 진행한 경남이야기탐방대의 함양 김종직 탐방은 2015년 10월 21일 이뤄졌습니다. 


김훤주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