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겹겹 쌓인 생명 씨앗 '갯가 유산' 꽃피웠네

김훤주 2016. 2. 1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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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경남 이야기 탐방대 (4) 

사천만 일대 갯벌 


갯벌은 생산성이 높습니다. 갯벌은 생명이 꿈틀거리는 현장이고 더러움을 없애는 정화의 터전입니다. 생명과 정화는 같은 말이랍니다. 이를테면 게 같은 생명체가 더러운 물질(유기물)을 삼켜 거기서 영양분은 목숨을 잇는 자양분으로 삼고 나머지는 내뱉어 깨끗하게 만듭니다. 


사람들은 그런 게·조개·낙지 등등을 잡아 호구지책으로 삼습니다. 갯벌은 그래서 '자연생태복지관'이기도 하고 또 그런 까닭에 갯벌은 사람들 삶이 이야기로 아롱져 있습니다. 


10월 18일 이야기탐방대 세 번째 나들이가 사천만 일대로 향한 까닭입니다.(한국콘텐츠진흥원 주최, 경남문화예술진흥원 주관, 갱상도문화공동체 해딴에 진행) 윤병렬 경남생명의숲 운영위원과 어른 넷, 고등학생 청소년 넷이 함께했습니다. 



◇석장승이 네 쌍이나 거기 서 있는 까닭 = 발길이 처음 닿은 데는 가산마을 들머리 석장승입니다.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에 남녀장승이 두 쌍씩 있습니다. 다른 데는 석장승이 남녀 합해 한 쌍이 고작이지만 여기는 모두 네 쌍이나 됩니다. 


사천만은 전통시대 훌륭한 항구였습니다. 요즘은 밀물·썰물 차이가 적고 물이 깊어야 좋은 항만이지만 예전에는 정반대였습니다. 옛날에는 배가 바닥이 평평하고 노나 돛으로 움직였습니다. 그래서 밀물 때 그 흐름을 타고 깊이 들어와 짐을 부린 뒤 썰물 때는 마찬가지 그 흐름을 타고 다시 나가야 했던 것입니다. 


(지금은 배가 크고 바닥이 뾰족하기에 좋은 항구는 물이 깊어야 합니다. 또 모터로 움직이기 때문에 밀물이나 썰물과 같은 바닷물 흐름을 탈 필요도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은 밀물-썰물 수위 차이가 크지 않을수록 더 좋은 항구입니다.)


종포~대포 일대 갯벌을 거닐고 있는 사람들. 사천만에 조창(漕倉)이 여럿 있었던 까닭입니다. 조창은 조세로 곡식을 거둬 모아두려고 강가·바닷가에 지은 곳집이었습니다. 그리고 그것들을 임금과 조정이 있는 서울로 가져가는 중간기착지였습니다. 


동쪽 용현면 선진리와 사남면 유천리에 통양·유천창이 있었고, 서쪽 축동면 구호리와 가산리에 장암·가산창이 있었습니다. 물론 같은 시기에 여럿이 동시에 있지는 않았습니다. 말하자면 통양창은 고려 시대 조창이고요 지금도 자취가 있는 가산창은 조선 영조 때 산물입니다. 


가산창 석장승 앞에서.


가산창을 지키는 수호신이 이 석장승이었습니다. 사천 둘레 일곱 군현에서 거둔 공물을 가산창으로 모아 서울로 보냈다는데, 사람들은 이 석장승들에 대고 뱃길도 평안하게 해주고 조창도 잘 지켜주십사 빌었습니다. 


그리고 석장승은 관립인 가산창이 없어진 뒤에도 민립으로 남아 마을도 지켜주고 고기도 많이 잡게 해주십사 비는 대상이 됐습니다. 


일행은 가산리 석장승 특이한 모습에 끌렸습니다. 보통 장승은 눈이 퉁방울로 생겨 부리부리하고 덩치 또한 커다랗습니다. 하지만 여기 석장승은 무덤 옆 문인석 같습니다. 게다가 여자 석장승은 도깨비처럼 머리에 뿔이 두 개 난 꼴을 하고 있습니다. 실은 머리카락을 그렇게 둘로 묶은 모양이지만 보기에 그렇다는 얘기입니다. 


석장승은, 바다와 더불어 살았던 갯가 사람들의 험난하고 고달픈 삶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바닷일 갯일 뱃일이 편하기만 했다면 이리 장승을 세우고 무사안녕을 빌 까닭이 없습니다. 때로는 목숨까지 걸지 않을 수 없을 정도로 위험했기에 이렇게 신상(神像)을 세웠고 미래에 대한 불안함을 없애려고 기대었던 것이 아닐까요. 


◇매향 공양은 왜 미륵불에게만 했을까 = 뒤이어 찾아간 데는 사천매향비. 곤양면 흥사리 들판이 산기슭과 만나는 언저리입니다. 


사천매향비. 글자가 이 정도면 또렷한 편이라 하겠습니다.


제대로 된 향은, 지금도 그렇지만 옛날에는 보통 백성들은 접근조차 못 할 정도로 비싸고 귀했으며 또 부처님께 바치는 으뜸 공물입니다. 향을 바치는 대상은 현세불인 석가모니불이 아니고 미래불인 미륵불이었습니다. 


현실이 암담할수록 사람들은 미래를 기대합니다. 매향비가 세워진 고려 말기는 권문세족과 왜구 탓에 일반 백성과 노비들은 죽음보다 못한 삶을 살아야 했다고 합니다. 그에서 벗어나고픈 희망이 바로 56억7000만 년 뒤에 일체 중생을 구제하는 미륵불이었습니다. 


사천매향비는 우리나라 전체 갯벌 관련 문화유산 가운데 으뜸이라 할 수 있습니다. 고려 우왕 13(1387)년 세워졌지요. 첫머리는 "많은 사람이 계를 모아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다(千人結契埋香願王)"입니다. 끄트머리는 "모두 4100(計四千一百)"이고요. 


4100명이라면 옛날은 물론 지금도 어마어마한 숫자입니다. 중앙귀족과 지역토호에게 겹겹이 시달렸던 당시 민중들의 바람이 간절했기에 가능했겠지 싶습니다. 


윤병렬 경남생명의숲 운영위원이 사천매향비를 두고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빗돌은 재질이 단단한 화강암이 아니라 무른 퇴적암입니다. 진흙 따위가 쌓여 만들어진, 갯가에서는 아무렇게나 구할 수 있는 돌입니다. 만든 주체가 존엄스런 귀족이었다면 절대 선택하지 않았을 재질이기도 합니다. 가난했기에 이렇듯 손쉽게 장만할 수 있는 바위를 빗돌로 삼았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갯벌에 묻어 만들어지는 매향(埋香)·침향(沈香)은 금강석보다 더 단단하고 향기는 그 무엇보다 감미롭습니다. 미래불 미륵불에게 바치는 공양물로 으뜸이라 하지 않을 수 없겠습니다. 


◇갯잔디와 대추귀고둥·기수갈고둥 = 윤 위원은 이어 곤양면 환덕리 고동포마을 덕진길수문이 있는 바닷가로 일행을 이끌었습니다. 사천만의 일부이면서도 그 자체만으로 아주 너른 광포만 갯벌이 시작되는 지점입니다. 광포만으로 흘러드는 물줄기는 곤양천·목단천·묵곡천 셋인데요, 동쪽 깊숙한 데 있는 덕진길수문은 묵곡천과 바다를 이어주고 또 끊어줍니다. 


광포만 갯벌.


여기서는 갯잔디의 실체를 볼 수 있었습니다. 갯잔디는 콘크리트 제방 같은 인공시설물이 있는 데서는 자라지 않는다고 합니다. 광포만 갯잔디는 대한민국에서 으뜸이라 합니다. 자연 해안선이 그대로 있다는 증표입니다. 


사천만은 많이 매립돼 동쪽은 공단 따위로 바뀌었지만 서쪽은 그대로입니다. 그리고 광포만은 사천만 서쪽의 일부이고요. 덕분에 경남에서 가장 넓은 갯벌이 사천만의 그것이랍니다. 


갯잔디는 갯벌 생태계 먹이사슬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입니다. 갯잔디는 대추귀고둥과 기수갈고둥 등등을 품어 기릅니다. 대추귀고둥은 멸종위기야생동물2급으로 그 서식지는 법률로 보호를 받습니다. 


사천만 서쪽도 매립하자는 압력이 거셌던 시절, 그것을 뿌리칠 수 있었던 근거가 대추귀고둥이었습니다. 대추만한 대추귀고둥이 사천만 서쪽을 지켜준 셈입니다. 윤 위원은 '10월이면 대추귀고둥이 겨울을 나려고 펄로 들어가기 시작하는 때'라고 했습니다. 그래서 일행은 살아 있는 실체는 보지 못했지만 죽고 남긴 껍데기와 배설물은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묵곡천과 광포만이 만나는 지점에서 갯잔디 사이를 더듬어 고둥 같은 생명체를 찾아보는 청소년탐방대.


갯잔디가 품는 또다른 생명체인 기수갈고둥은 철새들한테 먹이가 됩니다. 손톱보다 작은 이것들이 여기 없었으면 어떻게 될까요? 먹황새 같은 귀한 겨울철새들이 동쪽 낙동강 하구와 서쪽 순천만을 오가면서 한가운데 광포만에서 쉴 때 배를 채우기 어려웠으리라 손쉽게 짐작할 수 있습니다. 


갯잔디는 또 사람한테 땔감이기도 했습니다. 추운 겨울 갯일로 입술이 새파래진 동네 아낙들이 그 덤불을 그러모아 불을 피웠던 것입니다. 갯잔디 하나가 들어서 여러 가지 생명을 돌보고 키워줍니다.


일행은 조도 일대 옛날에는 갯벌이었으나 지금은 논으로 바뀐 지대를 둘러보고는 종포~대포 바닷가로 향했습니다. 동쪽 사천만인 여기는 갈대가 자랄 만한 지역(물에 잠기지는 않지만 그래도 소금기는 배여 있는 지대)은 죄 매립됐지만 그래도 갯벌은 널렀습니다. 



생명력을 예전보다는 많이 잃은 갯벌이겠으나 노을은 아주 그럴 듯한 갯벌이었습니다. 갯벌의 높은 생산성과 갯벌이 품은 사람들 문화유산에 대해 말을 섞기에는 더없이 적당한 풍경이었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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