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로 언론인 임재경 선생 회고록을 읽으며
격월간지 《녹색평론》에 언론인 대선배 임재경 선생(전 한겨레신문 부사장)의 회고록이 연재되고 있다. 벌써 7회째다. 이번 5·6월호에 재미있는 일화가 실렸다.
1961년 6월 <조선일보> 수습기자로 입사해 1년 만에 사회부를 거쳐 경제부에 배치됐을 때였다. 이 분은 영문학과를 나왔다. 경제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희망부서도 아닌 경제부로 덜컥 배치되었으니 난감했을 것이다.
게다가 발령 며칠 뒤 통화개혁(1962년 6월 10일)이란 청천벽력이 닥쳤다. 마침 그의 취재 담당이 한국은행을 비롯한 금융기관이었다.
한국은행 총재가 기자회견을 하는데 "금융기관의 대출 쿼터를 늘려 기업활동을 돕겠다"는 말뜻을 알아듣지 못했다고 한다.(이 글을 쓰는 나도 모른다.) 신문사에 돌아와 수첩에 메모한 대로 써낸 기사는 보기좋게 퇴짜를 맞았다고 한다. 그때 상황을 그대로 옮기면 다음과 같다.
채현국 선생과 임재경 선생. 두 분은 사돈지간이다. 지난 3월 20일 서울에서. @김주완
"데스크는 어느 신문사인가에 전화를 걸어 '마감시간인데 담당기자가 아직 안 들어와서 그런다'며 '총재 기자회견 내용을 알려달라'고 부탁했다. 땅에 구덩이라도 있으면 들어가 죽고 싶었다. 저녁때 신문사 사옥을 나서며 다음 날 사표를 써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문기자 초년에는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그런데 '죽고 싶었다'니, 사표를 쓸 생각을 했다니…. 어지간히 자존심이 강하거나 자괴감이 심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가 실제로 한 행동은 퇴근길에 서점에 가서 책을 산 것이었다. 이정환의 《경제원론》과 성창환의 《화폐금융론》을 샀다고 한다. 며칠 동안 두 권을 처음부터 끝까지 깡그리 읽었다. 그러나 두 책이 우리 경제현실을 설명하는데 별반 도움을 주지 못했다고 한다.
이번에는 미국 MIT 교수 폴 새뮤얼슨의 《경제학》을 독파했다. 600~700쪽 부피와 큰 사이즈의 이 책을 이를 악물고 읽었단다. "승수효과를 해설하는 대목은 압권"이었다고 그는 평했다. 그러나 이런 책들은 기사 작성과 경제담론 참여에 큰 보탬이 되긴 했으나 한국 경제가 작동하지 않는 이유를 들춰내고 대안을 제시하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고 한다.
녹색평론에 연재되고 있는 임재경 선생 회고록.
그래서 다시 읽은 책이 케인스와 슘페터의 저술이었다. 하지만 이 책도 "지적 호기심을 어루만져 주는 보람은 적지 않았"으나 "후진국 민중의 가난한 이유를 '낮은 저축률, 낮은 투자율, 낮은 성장률'에서 찾는 자본주의 경제이론이 과연 맞기나 한 것인지에 대한 근본적인 회의를 떨쳐버리지 못했다"고 한다.
특히 영국과 프랑스와 미국의 경제발전이 약소국들의 자원 강탈, 식민지 착취, 노예(흑인) 노동에 뿌리 둔 사실을 의도적으로 외면하는 데는 구역질이 났다고 한다.
그래서 그는 좌파 이론가와 경제사가들의 저술에 끌리기 시작했고, 모리스 돕, 폴 바란, 폴 스위지가 자연스럽게 다가왔다고 술회했다.
사실 나도 경제에는 문외한이어서 여기서 언급된 책 중 끝까지 읽은 건 한 권도 없다. 생전 처음 들어보는 이름도 있다.
다만 임재경 선생의 회고를 읽으며 드는 생각은 '과연 요즘 경제부 기자들 중 이렇게 공부하고 고민하는 기자가 있을까' 하는 것이었다. 물론 공부를 많이 한 경제부 기자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을 바탕으로 한 기자의 고민이다.
기자로서 자신의 무지를 깨닫고 끊임없이 공부하고 고민하는 임재경 선생의 자세는 오늘날의 기자들도 본받을 필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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