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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 이 '집막걸리'에는 무엇이 담겨 있을까?

김훤주 2014. 12. 1. 09: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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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남도민일보가 사회적 기업으로 만든 '갱상도문화공동체해딴에'가 올 8월부터 진행하고 있는 경남이야기탐방대도 이제 마무리가 되고 있습니다.

 

한국콘텐츠진흥원이 주최하고 경남문화예술진흥원이 주관하는 이번 탐방대 활동은 11월 안에 마치도록 예정돼 있는데요 11월 2일 토요일 중간고사를 마친 청소년탐방대의 의령 의병장 곽재우 유적 둘러보기가 마지막이었답니다. 

 

경남이야기탐방대를 이루는 셋 가운데 하나인 블로거탐방대와 예술인탐방대는 14일과 20일 세 번째 탐방길을 제각각 남해로 잡았습니다. 남해 두 군데 집막걸리를 누리는 걸음이었지요.

 

남해 남면집 농주와 뜯어 먹다 남은 지짐.

 

사실 우리나라에서 막걸리만큼 품고 있는 이야기가 풍성한 대상도 드물 텐데, 시어머니 손에서 며느리 손으로 또 어머니 손에서 딸 손으로 전해오는 막걸리를 맛보고 그에 걸맞은 이야깃거리를 찾아내어 구성해 보기 위해서랍니다.

 

막걸리는 이렇습지요. 대체로 보자면 식량 자급자족이 우리나라 최대 정책 과제가 되면서 쌀막걸리는 공식 자리에서 한순간 사라졌습니다. 1970년대 즈음이었습니다. 옛날 고을마다 있던 술도가에서는 쌀 대신 밀가루를 써서 막걸리를 빚었습니다.

 

옛날 집에서 담가 먹는 막걸리는 세무 당국한테 한 번씩 털렸는데요, 거기엔 정식으로 주세(酒稅)가 매겨져 시장에 나오는 '주류'를 보호한다는 뜻과 더불어 <쓸데없는 데> 쌀을 쓰지 못하도록 막는다는 뜻이 담겨 있었습니다.

 

남면집 안주들.

 

하지만 세상은 바뀌었습니다. 쌀 자체에 대한 개량이 거듭된 끝에 엄청난 다수확이 가능해졌고요 나라 전체 차원에서 보자면 쌀 소비량은 계속 줄어들고 있습니다. 요즘 들어 새로 생겨난 현상이 아니고 오래전부터 계속돼 온 경향이랍니다.

 

막걸리를 빚지 못하게 했던 원인인 쌀 부족은 사라졌습니다. 이제는 막걸리를 빚는 솜씨가 이어지지 않거나 못하는 현실이 문제입니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담가 먹으면서 대대로 막걸리 빚는 방법과 솜씨가 이어졌지만 이제는 그렇게 이어주는 매듭 자체가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이어지는 집막걸리 두 군데를 공교롭게도 남해에서 찾아냈습니다. 다른 지역에도 없지 않으나 이번에 찾아낸 지역이 남해라는 정도로 여겨주시면 좋겠습니다.

 

지짐 부치는 남면집 할매 옆에서 블로거 실비단안개가 사진을 찍고 있습니다.

 

남해 읍내 장터에 있는 남면집(010-2045-9133)이 하나고 설천면 문의마을 양모리학교 이르는 길모퉁이에 이름도 없이 나앉은 가게(010-3840-7136)가 다른 하나입니다. 남면집은 올해로 일흔아홉 연세인 할매가 하시고 문의마을 가게는 쉰 줄에 올랐으려나 하는 아줌마가 한답니다.

 

할매는 이렇게 말하십니다. "나이 마흔여덟에 혼자 돼서 겪은 고생은 말도 못한다. 아이 셋을 혼자서 키웠다 생각해 봐라, 보통이겠는지. 남면 덕월마을에 시집가 살다가 읍내 나왔는데 재산도 없고 할 거리도 있어야지. 남의집살이에 식당일까지 정말 오만가지 안 한 일이 없다. 그러다 누가 막걸리 빚을 줄 아니까 한 번 해봐라 했는데 지금껏 하고 있다. 한 스무해 됐나 모르겠네."

 

할매 고생이 남편 잃고 혼자가 된 뒤로만 있었던 것 같지는 않습니다. 아무 가진 것 없이 읍내로 나왔을 정도면 그 전부터도 삶이 고단했음은 분명합니다. 할매는 얘기하는 도중에 가끔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가슴에 맺혀 여지껏 풀리지 못한 한이나 분도 있는 것 같았습니다. 그렇지만 지난 일은 지난 일이고 지금은 지금입니다. 과거는 그랬어도 지금 모습은 어디 내놓아도 그 이상을 찾기가 어려울 정도로 좋았습니다.

 

요즘 연세가 여든 가까운 이들 가운데 허리를 곧게 하고 사는 이들이 얼마나 귀한가요! 가게에서 일하는 양을 봐도, 70대 후반 할매답지 않게 허리가 꼿꼿하답니다.(본인이야, 겉은 멀쩡해도 속은 썩어빠진 고목나무 등걸에다 자기를 견주곤 했습니다만.)

 

또 새벽마다 텃밭에 일하러 나간다고 하시는데 또한 건강이 그만큼 받침해 준다는 얘기이지요. 더욱이 지금 가게도 남의 것이 아니라 자기 소유라 했습니다.(지난해 7월 처음 찾았을 때는 세로 얻어 쓴다고 들었었거든요.)

 

남면집 들머리 풍경. 장바구니 걸린 이 자전거는 할배들 자가용입니다.

 

남면집이 스무 해 가까이 이어오면서 아는 이들이 늘어났습니다. 바깥에서 찾아오는 이들도 많지만 그래도 으뜸 손님은 남해 할배들이랍니다. 읍내에 사는 할배 또는 장이 설 때마다 읍내에 다니러 오는 할배들입니다.

 

어떤 할배는 막걸리를 한 잔만, 어떤 할배는 소주를 한 잔만, 어떤 할배는 소주도 막걸리도 말고 단술을 한 잔만 마십니다. 안주는 시원한 열무물김치가 전부일 때가 많은데요, 이렇게 한 입 다신 할배들은 500원짜리 동전 두 낱을 탁자에 올려놓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냥 떠난답니다.

 

이런 '한 잔 쟁이'들도 많지만 소주 한 병 또는 농주 한 주전자 주문해 놓고 퍼질러 앉는 할배도 없지 않습니다. 이런 때는 혼자가 드물고요, 두셋 정도가 어우러져 술판을 벌이는 것입니다. 목소리도 때로는 높아지고 얼굴도 불콰해지는 모습입니다.

 

가운데가 남면집 주인 할매. 양쪽 할매 할배는 따로 왔는데 한 상에 어울렸습니다. 뒤쪽 아재는 한 잔 마시고 퍼뜩 나가는 길입니다.

 

어떤 경우는 이웃에서 할매 친구가 놀러 옵니다. 그 할매한테 막걸리를 권해 올렸더니 거듭 비웠더랬습니다. 한 데 어우러지면서 주전자 막걸리도 마셨고 병소주도 마셨습니다. 해물이 알맞추 섞인 나물전도 할매 상에 올렸습니다.

 

커다란 한 판에 3000원인데요, 지짐에 섞이는 나물은 그날그날 다르다고 합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할매가 아침 나절 밭에서 거둔 대로 부쳐주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면서 이야기도 덩달아 무르익어 갑니다. 실없는 말씀도 나오고 흥에 겨운 소리도 나옵니다. 성내며 다투는 소리도 나고 기분좋게 웃으며 하는 소리도 납니다. 평일인데도 이런 정도면 장날은 어떨는지 짐작이 되고도 남았습니다.

 

앙숙인 듯한 할배끼리는 다투기도 했습니다. 그이들 서로 흘기거나 슬그머니 피하는 눈길이, 저희 같은 젊은 치들한테는 오히려 순진하게 보였습니다. 어떤 할배는 하모니카 부는 재주가 대단한 모양으로 신이 나면 그것을 꺼내 흥겹게 불어 보입니다. 할매·할배들 어울리는 공간으로 적격입니다.

 

오른손으로 추임새를 넣으며 하모니카를 부는 할배.

 

문의마을 양모리학교 들머리 가게는 남면집에 견주면 아직 제대로 시작도 안한 셈이지요. 이 집 아지매는 올여름 들어 장사를 시작했습니다. 처음에는 양모리학교로 체험하러 오가는 이들을 겨냥해 아이스크림과 간단한 마실거리를 내놓았더랬답니다.

 

아지매 손맛을 아는 이들이 국수라도 한 번 말아보라 권했고 그게 이어져서 시어머니 빚던 막걸리까지 한 번 빚어보라고 청을 들였다고 합니다. 아지매는 올 봄에 세상을 떠난 시어머니한테서 어깨 너머로 막걸리 빚는 방법을 배웠답니다.

 

 

아지매가 차려내는 술상·밥상을 보면 먼저 깔끔하다는 느낌이 듭니다. 가까운 횟집에서 찬모 노릇을 10년 넘게 한 이력이 나타나는 대목입니다. 아지매는 시어머니 세상을 떠나면서 찬모 노릇을 그만뒀답니다. 그러고는 예전처럼 집안일 농사일을 하는 한편 따로 가게도 차린 셈입니다.

 

상에는 그날 논밭에서 거둔 곡식 과일들이 그대로 올라옵니다. 지금은 가을이라 밤도 홍시도 단감도 대추도 오릅니다. 때를 놓치고 있다가 뒤늦게 여문 방울토마토도 오르고요 제대로 삶은 고구마도 함께 오릅니다.

 

문의마을 아지매 가게 안방에서. 예술인탐방대.

 

문의마을 아지매 가게 바깥 자리에 앉은 손님들. 멀리 바다가 보입니다.

 

여기에 국수를 더해 한 사람에 4000원을 받고 막걸리는 때로 그냥 주기도 하지만 정가는 한 주전자에 5000원이랍니다. 이 집은 좋은 사람과 더불어 좋은 육수에 담긴 국수 한 다발과 옛날 맛 집막걸리 한 잔 기울이면서 시원하고도 멋진 풍경을 눈에 담기에 좋습니다.

 

갯가 문항마을을 거쳐 멀리 창선섬과 삼천포대교까지 눈맛이 이어집니다. 이렇게 한 잔 하고 나서 마을 여기저기를 거닐다 보면 "여는 머하로 왔능고?" "오데서 왔능고?" 물으시는 할매들 더러 만나집니다.

 

마을 들머리 포구나무 아래에서 만난 할매 한 분. 허리가 잔뜩 굽으셨지만 표정은 해맑았습니다.

 

그런 할매 눈에 띄지 않거든 동구밖 덩치 커다란 팽나무 아래에 앉아서 기다릴 일이랍니다. 얼마 지 않아 할매가 나타날 텐데요, 대부분은 얼굴이 웃는 상이고 말씀도 즐겨 하시는 편입니다. 물론 허리는 굽어 있어서 지팡이를 짚은 모습이기 십상입니다.

 

남해 할배들 사귀려면 읍내 남면집 막걸리 기울이면 되겠고요, 남해 할매들 사귀려면 설천면 문의마을 길가 가게와 동구밖 팽나무 그늘에 들면 되겠습니다. 그런 다음 거기서 막걸리를 버무리면 좋은 이야기가 엮여나오지 않을까 싶습니다만.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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