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또 하나의 약속>을 보는데 거미가 생각났다

김훤주 2014. 2. 16. 1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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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또 하나의 약속>을 봤습니다. 보는 내내 거미가 생각났습니다. 거미는 끈끈한 거미줄을 쳐서 잘 움직이지 못하게 해서 먹이를 잡고 자기 소화액을 찔러넣어 먹기 좋은 상태로 만듭니다. 거미가 볼 때는 소화액이지만 먹이 처지에서는 독이지요.

 

거미한테는 자르거나 씹는 이빨이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소화액을 집어넣어 먹이를 물렁물렁한 액체 상태로 녹인 다음 빨아먹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거미한테 잡아먹힌 것들은 바싹 마른 채로 껍질만 남습니다.

 

영화는 익히 알려진 스토리여서 무슨 반전 효과는 없었지만 곳곳에 여울이나 굽이를 만드는 장치를 집어넣어 놓은데다 훌륭한 대사도 적당하게 섞여 있고 배우들 연기도 나름 좋은 완성도 높은 영화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숨진 딸 아버지가 진성 건물로 들어가려고 직원들을 뿌리치는 모습.

 

그런데 저는 영화 속 한윤미가 공장에 들어간지 이태만에 백혈병에 걸려 자기 집으로 돌아오는 장면에서 문득 창원공단 한 공장에 다니다 해고된 사람 얘기가 생각났습니다. 한때는 1000명 넘는 사람이 일했을 만큼 작지 않은 공장이었는데요, 거기 한 10년 넘게 다니면 다른 일은 할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현상은 자기가 다니던 공장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어지간히 규모가 있는 공장은 모두 그렇다는 얘기였습니다. 고등학교 나오자마자 들어간 공장에서 특정 부품 제작이나 조립 등 같은 공정 업무만 되풀이하게 되니 시간이 갈수록 다른 일은 할 수 없게 마련이라는 것이었습니다.

 

또 공장 생활을 하면 할수록 공장 바깥에 대한 관심과 상식은 사라지고 옅어지고 없어져서 공장 말고는 아는 것이 갈수록 없어진다고도 했습니다. 그래서 자기가 알고 있는 울타리 바깥으로 나가기를 더욱 무서워하고 점점 안으로 움츠러들어 결국에는 집에서 빈둥거릴 바에야 공장에 나가 일이나 하고 수당이나 벌자는 식으로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그런 공장에서 떨려나지 않으려고 생각도 말도 행동도 사용자 입맛에 점점 더 맞도록 하게 되고 사용자 눈치도 남보다 먼저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참 재미없는 인생입니다. 한 목숨 살아내야 하는 주체 관점에서 보자면 그렇습니다.

 

딸을 화장해 뿌린 자리에 앉아 있는 아버지. 옆에 노무사.

 

하지만 자본의 처지에서 보자면 이보다 멋진 인생은 없습니다. 자본이 욕망하는 생산과 노동에 최적화된 인생이거든요. 생산과 노동 말고는 할 줄 아는 것이 아예 없는 인생이 아닙니까? 그것도 자기 공장에만 요구되는 특정 부품 제조·조립 같은 공정에 딱 맞게 틀지워진 그런 인생이거든요.

 

이래서 저는 거미가 생각났던 모양입니다. 비정하고 또 무참하지만, 영화 속 한윤미는 그런 거미한테 잘못 걸리고 잘못 물려서 30년만에 40년만에가 아니라 겨우 이태만에 작살이 나버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뒤집어 말하자면 누구든지 거미한테 걸려들어 거미한테 최적화된 채 길든 짧든 살아가다 죽기는 다들 매한가지 아니겠느냐는 말씀입니다. 물론 영화가 그려 보여주는 자본의 비도덕적이고 비인간적인 행태는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하지만, 도덕적이고 인간적이라 해도 이처럼 인간을 인간 자체의 본성에서 떼어내어 특정 물품이나 서비스의 생산과 노동에 최적화시켜버리는 자본의 속성 자체에 대해서도 한 번 생각해 보게 하는 그 무엇이 <또하나의 약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을 흘렸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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