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녕을 두고 ‘제2의 경주’라고도 합니다. 규모나 내용으로 보면 둘은 비교 대상이 못 됩니다. 그러나 경주와 견주는 그것만으로도 창녕이 지닌 가치와 의의가 크다는 얘기가 됩니다. 신라·백제 문화보다 훨씬 덜 알려진 가야문화가, 500년대 들어 신라·백제의 각축 사이에서 거점 노릇을 했던 창녕에, 지나간 역사의 보석 같은 흔적이 되어 촘촘히 박혀 있습니다.

 

창녕은 태백산맥을 등으로 삼고서 서쪽으로 낙동강 건너 고령·합천, 남쪽으로 같은 창녕의 영산과 밀양·함안 등 주변 지역을 쉽게 제압할 수 있는 요지랍니다. 창녕을 확보하면 낙동강 본류를 가운데 두고 함안의 안라가야와 고령의 대가야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압박할 수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이 가야 진출의 교두보로 창녕을 병합하고 척경비를 세운 까닭이 여기에 있습니다.

 

탐방 루트

 

영산석빙고→0.8km 영산만년교→2.8km 창녕 관룡사→0.5km용선대(다시 관룡사)→1.2km옥천사터→14.4km창녕박물관→바로 옆 창녕 교동·송현동 고분군→0.6km 창녕진흥왕척경비→0.5km 창녕석빙고→바로 옆 창녕 장터→바로 옆 술정리동삼층석탑(석빙고에서 0.6km)→8.6km, 조민수장군 무덤→17.5km 현풍 석빙고→23.2km 대가야박물관(대가야 역사 전시관)→바로 옆 대가야 왕릉전시관→0.9km 지산동고분군(돌아나오면서 전시관을 지나)→4.6km 우륵기념탑

 

영산석빙고

옛 무덤 같은 외부, 과학적인 내부

 

창녕과 고령을 찾아 떠나는 기행은 영산석빙고에서 시작됩니다. 밖에서는 옛 무덤처럼 보이지만 내부는 과학적으로 세밀하게 만들어져 있습니다. 땅을 판 다음 벽은 석재로 쌓고, 바닥은 앞이 높고 뒤가 처지게 기울어지도록 해서 물이 잘 빠지게 했습니다.

 

바깥 모습. 안쪽 모습. 창녕군 제공.

 

천장은 기다란 장대석으로 무지개 모양을 만들었고 바람이 잘 통하게 돌을 얽고 지붕을 얹어 구멍을 냈습니다. 겨울에 강에서 깨끗한 얼음을 떼어내 여름에 쓸 수 있도록 저장했습니다. 일반 백성은 쓰지 못하고 양반이나 관에서 썼습니다.

 

경주석빙고(보물 제66호)·안동석빙고(보물 제305호)·창녕석빙고(보물 제310호)·청도석빙고(보물 제323호)·현풍석빙고(보물 제673호)·영산석빙고(사적 제169호) 등 남아 있는 석빙고는 모두 경상도에 있다는 것은 재미있는 일입니다. 신라 때부터 만들었다지만, 지금 남은 것은 모두 조선시대 산물입니다.

 

영산석빙고 아래에 만년교가 있습니다. 만년이 지나도 무너지지 않을 만큼 튼튼한 다리라는 뜻입니다. 하천 양쪽의 자연 암반 위에 화강석으로 반달 모양으로 무지개처럼 다리를 쌓은 위에 자연석을 올린 다음 흙을 깔아 길을 만들었습니다.

 

 

선암사 승선교· 벌교홍교와 함께 보기 드문 유물인 동시에 조선 후기 남부 지역의 홍예 축조기법을 알 수 있게 해줍니다. 다리에만 눈길을 주지 말고 꼭 하나 살펴봐야 할 것이 있는데, 들머리 ‘만년교’라고 새겨져 있는 비석이 그것입니다.

 

다리가 완성되던 날 밤 고을에 살고 있는 신통한 필력을 가진 열세 살 신동의 꿈에 산신령이 나타나 “네가 신이 내려준 필력이라던데 내가 다닐 다리에 네 글씨를 새겨놓고 싶구나. 다리 이름은 만년교니라”라 하고는 사라졌다는 이야기가 전합니다.

 

관룡사

잘 생긴 용선대 석조석가여래좌상

 

창녕 하면 관룡사를 빼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양산 통도사에서 보관하는 관룡사사적기(觀龍寺事蹟記)에 따르면 신라 흘해왕(訖解王) 40년 가락국 이시품왕(伊尸品王) 4년(349)에 창건됐습니다.

 

지리산 자락의 하동 칠불암과 함께, 불교가 가야를 통해 남방에서 바다 건너 전해왔다는 설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종종 꼽힙니다.

 

가운데 옴폭한 데가 관룡사. 용선대에서 바라봤습니다.

 

하지만 보통은 관룡사 창건을 583년(신라 진평왕 5)으로 본다. 이 때 증법국사(證法國師)가 처음 짓고 나중에 신라 8대 사찰이 돼서 원효 스님이 제자 1000명과 더불어 화엄경을 설법했다는 것입니다.

 

관룡사 가는 길은, 이제 쉽게 보기 어려운 예스러운 정취가 남아 있습니다. 눈길을 붙잡는 명물 석장승(경상남도 민속자료 제6호)도 만날 수 있습니다. 왼쪽 키가 큰 장승은 영감이고 오른쪽 작은 이는 할멈입니다. 영감은 입술 밖으로 나온 이가 아래로 향하고 할멈은 위로 솟아 있습니다. 자세히 보면 영감은 깐깐하고 할멈은 호탕합니다.

 

그다지 가파르지 않은 오솔길을 걸어 관룡사에 이르면 사람들은 대게 탄성을 내지릅니다. 뒤편 병풍바위에서 뿜어져 나오는 기운이 대단하기 때문이랍니다. 돌문과 돌계단도 다른 절에서는 보기 드문 운치와 멋이 있습니다.

 

특히 돌문은 흔히 보는 일주문 불이문과는 판이합니다. 오래 된 나무 두 그루와 함께 서 있는 모습은 성황당 같은 분위기를 풍깁니다. 규모는 작아도 품 안에 지닌 보물은 많은 절입니다.

 

세월의 끼침이 느껴지는 대웅전(보물 제212호) 단청에서는 자연스러움과 기품이 묻어납니다. 약사전(藥師殿)(보물 146호)에서 빌면 아픈 곳을 낫게 해준다고 믿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관룡사 대웅전.

 

앞에 있는 삼층석탑(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11호)과 마주해 전각 안에 들어앉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519호)은 묘하게 닮은 느낌을 줍니다. 튼실하고 우직한 남정네 같은 그런 모습입니다. 이 약사전은 고려 말에 만들어진, 관룡사에 하나뿐인 임진왜란 이전 건물입니다.

 

약사전 3층석탑. 약사전 안에 석조여래좌상이 보입니다.

 

전체로 보면 하지만 호젓한 맛이 예전만은 못합니다. 원음각(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140호)은 그런 아쉬움이 가장 큽니다. 사물(목어·운판·범종·법고)을 걸었다는 이 건물은 지금 막혀 있습니다. 드나듦에 걸림이 없어 사물 소리로 중생을 구해야 할진대 사방을 막아 놓았으니…….

 

 

원음각에 있어야 마땅할 목어는 대웅전 부처님 뒤쪽에 나뒹굴고 있습니다. 법고는 어설피 새로 만든 범종각 새로 만든 범종 옆에 놓여 있습니다. 거기 새겨진 괴수의 우스꽝스러운 표정이 불쌍하기까지 합니다.

 

관룡사의 화룡점정은 용선대입니다. 용선대 석조 석가여래좌상(보물 제295호)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얼굴이 두툼하고 아주 잘 생겼습니다. 석굴암 본존불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세계적인 명물 석굴암 본존물에 못 미친다고 해서 아무렇게 여겨도 될 부처님은 아닙니다.

 

 

용선대는 절간 마당에서 20분이면 족히 오를 수 있습니다. 정작 용선대에 오르면 부처님이 아니라 한 눈에 담기는 확 트인 세상이 눈길을 잡습니다. 부처가 바라보는 동쪽 동짓날 해뜨는 데도 좋지만 그 오른편 사람 사는 속세 풍경도 괜찮습니다.

 

 

여기 앉아 세상을 껴안으면 부처가 되지 못할 이 없겠다 싶습니다. 용선대 부처를 그럴듯하게 바라볼 수 있는 곳이 여럿 있지만 그 가운데 으뜸은 용선대 일대가 아니라 관룡사 마당이라는 점도 재미있지 않습니까? 마당 끄트머리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아득한 가운데 불상이 조그맣게 놓여 있습니다.

 

천국도 지옥도 그대 마음 속에 있다. 너무 가까이서 매달리지 마라. 그것이 그대들이 반야용선으로 이르고 싶은 극락이다. 용선대 석가여래가 관룡사 마당을 내려다보며 이런 깨달음의 이치를 던지고 있지는 않은지 모르겠습니다.

 

옥천사터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이 태어나 자란 곳

 

관룡사에서 나오다 화왕산 정상 가는 길과 관룡사 가는 길이 갈라지는 왼편 언덕배기에 옥천사지(玉泉寺址)가 있습니다. ‘향토문화재’입니다. 고려 공민왕 때 개혁을 이끈 신돈(?~1371)이 태어나 자란 데입니다. 역사는 대체로 승자가 기록합니다.

 

권문세가의 횡포 속에 신돈은 전민변정도감(田民辨正都監)을 만들어 빼앗긴 토지와 강압으로 노비가 된 사람을 원래대로 돌리는 개혁을 추진했습니다. 한 쪽에서 보면 성인이고 다른 쪽에서 보면 눈엣가시입니다. 결국 역모로 처형당한 신돈을 승자들은 ‘요사한 중(妖僧)’이라고 역사에 적었습니다.

 

 

신돈이 망가지면서 옥천사 또한 송두리째 망가졌습니다. 석탑·석등 따위는 죄다 부서졌고 기단석이나 장대석 또는 주춧돌 몇 개만 겨우 남았습니다. 정으로 깬 자국이 600년 넘게 지난 지금까지 뚜렷합니다. 이렇게 철저하게 망가진 절터는 찾아보기 힘듭니다.

 

권력무상이라지만, 그래도 사람들이 여전히 내려놓지 못하는 권력입니다. 망가진 옥천사를 돌아보며, 신돈에 대해 나쁘게만 덧칠된 이미지만큼은 이제라도 벗겨져야 하지 않겠나 싶은 생각이 절로 듭니다.

 

창녕박물관

교통 송현동 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 신라 유물

 

다음은 고분군과 함께 있는 창녕 박물관입니다. 창녕박물관은 바로 옆 교동·송현동고분군과 계성고분군 등에서 나온 가야·신라시대의 유물을 주로 보여줍니다. 고인돌도 있습니다.

 

계성고분 이전 복원관에는 창녕 계성면에 있는 계성고분군의 대형 고분 하나를 여기로 옮겨 복원해 내부를 살필 수 있도록 했습니다.

 

창녕 교동 고분군(사적 제80호)은 도로 바로 건너편 위쪽 송현동 고분군(사적 제81호)과 함께 가야시대 만들어졌습니다. 금동관을 비롯해 귀금속 장신구와 철제무구, 토기 등으로 미루어 5~6세기 지역 지배계층의 무덤으로 짐작된다고 합니다.

 

고분군과 창녕박물관.

 

일부에서는 순장 흔적도 발견됐습니다. 송현동고분군 15호분에서는 순장됐으리라 짐작되는 사람 뼈가 4인분이 나왔습니다. 열여섯 살 여성도 있었습니다. 꽃다운 여린 소녀는 가슴을 서늘하게 합니다.

 

그 어린 소녀도 누군가의 딸이고 누군가의 누나 언니 또는 동생이었을 테니, 사랑하는 사람을 그렇게 보내고도 살아내야 했던 남은 사람들의 슬픔이,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그렇게 생목숨을 접을 수밖에 없었던 처절함이 사무칩니다.

 

교동·송현동 고분군 출토 유물들은 신라와 밀접한 관계를 보여 이미 5세기에 창녕 지역이 신라 영역에 포함되었음을 알려준다고도 합니다.

 

 

진흥왕 척경비(국보 제33호)는 창녕이 정치·군사상 요충지임을 말해줍니다. 임금의 두루 살피며 돌아다님을 기리는 다른 순수비와 달리 ‘순수관경(巡狩管境)’이라는 글자가 빗돌에 있지 않아 영토 개척을 기념하는 척경비(拓境碑)라 합니다.

 

가까이 있는 경북 고령의 대가야 멸망 한 해 앞선 진흥왕 22년(561)에 세웠는데, 진흥왕에 대한 사실 기록과 지명, 신하들의 명단과 직위가 적혀 있답니다. 진흥왕의 창녕 순수는 이듬해 대가야 점령의 신호탄이었습니다.

 

술정리 동삼층석탑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과 비길 만한 작품

 

창녕 읍내에는 5일장이 섭니다. 3일·8일 장날에 맞춰 가면 수구레국밥을 맛볼 수 있습니다. 방송을 타면서 유명해진 음식인데 수구레는 소가죽 안쪽에 붙어 있는 질긴 고기를 이릅니다. 바로 이 장터 둘레에 창녕석빙고와 술정리동삼층석탑(국보 제34호)이 있습니다.

 

창녕석빙고는 영산 석빙고와 더불어 경남에 남은 조선 후기 얼음 창고로 규모는 작지만 구조는 경주와 안동의 석빙고와 다르지 않습니다. 고령 가는 길에 현풍석빙고를 둘러보며 이들 셋을 비교·대조해볼 수도 있습니다.

 

술정리동삼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 작품으로 2층 기단 위에 3층 탑신을 올렸고 몸돌(옥신석)과 지붕돌(옥개석)을 각각 돌 하나로 구성했습니다. 위로 올라가면서 적당한 비율로 줄어드는 몸돌로 안정감과 아름다움이 느껴집니다. 긴장도 팽팽하게 유지됩니다. 

  

 

수법도 정교해 그 기품이 석가탑으로 알려진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국보 제21호)과 비길만하며, 경주의 석탑 양식이 지방으로 확산되는 과정도 보여준다는 평을 받습니다. 지금은 둘레에 복원 공사가 한창 진행 중입니다.

 

대합면 신당마을 언저리 1080번 지방도가 왼쪽으로 휘어지는 들머리에는 ‘향토문화재’ ‘조민수 장군의 묘’라는 안내판이 서 있는데 무덤은 1962년 발견됐습니다. 조민수는 같은 창녕 출신 신돈과 대척점에 있었던 인물입니다.

 

신돈은 땅을 원래 주인에게 돌려주려 했고 조민수는 권문세가 출신이어서 그대로 갖고 있으려 했습니다. 조민수는 요동을 정벌하러 떠난 5만 고려군이 압록강 위화도에서 회군할 때 현지 최고 지휘관이었습니다.

 

당시 좌군도통수 조민수는 군사를 돌리자는 우군도통수 이성계의 설득을 따라 1388년 5월 22일 압록강을 도로 건넌 다음 6월 3일 개경에 이르러 팔도도통수 최영을 몰아내고 우왕도 폐합니다. 우왕에 이어 조민수 지지를 받은 창왕이 등극하지만 이어진 전제(田制)개혁 국면에서 대사헌 조준의 탄핵을 받아 창녕으로 귀양보내졌습니다.

 

그러다 곧바로 특사를 받았으나 이성계를 비롯한 개혁세력이 창왕을 죽이고 세운 공양왕 아래에 다시 창녕으로 귀양보내져 숨을 거둡니다. 창녕은 개혁파 신돈과 수구파 조민수를 동시대에 낳은 땅이랍니다.

 

경남 창녕에서 경북 고령으로 가는 길은 중간에 대구광역시 달성군 현풍면을 지납니다. 여기에는 현풍석빙고가 있습니다. 조선 영조 6년(1730)에 만들었는데 당시는 얼음 창고가 마을마다 설치되지는 않았음에도 크지 않은 현풍고을에 들어서 있으니 눈길을 끕니다.

 

대가야박물관

지산동 고분군 44호분 등 왕릉전시관이 중심

 

여기서 영산·창녕의 석빙고와 한 번 견줘본 다음 발길을 서둘러 대가야의 고장 고령으로 넘어갑니다. 대가야박물관의 중심은 대가야 왕릉전시관입니다. 최초로 확인된 대규모 순장무덤인 지산동고분군 44호분 내부가 실물 그대로 나와 있습니다.

 

무덤의 구조와 축조방식, 주인공과 순장자의 매장 모습, 껴묻거리의 종류와 성격까지도 바로 볼 수 있습니다. 대가야의 역사와 문화, 순장 풍습 등을 보고, 느끼고, 겪어볼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박물관을 좋아라 하지 않는 이들도 기억에 남을 만큼 인상적입니다.

 

 

옆에는 대가야역사관도 있습니다. 사람들은 가야라 하면 김해, 가락국만 떠올리지만,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내륙분지여서 방어하기도 쉽고 바로 옆 합천에서 손쉽게 철을 가져올 수 있었던 고령의 대가야는 후기 가야의 맹주였습니다.

 

낙동강 덕분에 교통도 좋았으므로 합천과 의령·창녕·현풍까지 함께 아울렀습니다. 지산동 고분군은 대가야의 세력이 절대 만만하지 않았음을 일러줍니다. 규모가 큰 것만도 수십 개에 이르고 아직 발굴도 안 된 채 머리에 나무를 인 작은 고분까지 꼽으면 200기를 훌쩍 넘습니다.

 

무엇보다 1977년 발굴된 크고 작은 널 35개는 우리나라 순장의 역사를 처음으로 확인해 줬습니다. 저승에서 주인공이 먹고 쓸 것을 넣었던 남·서 석실에도 창고지기가 한 사람씩 순장돼 있었습니다.

 

대가야 왕릉 전시관.

 

부부로 보이는 30대 남녀가 한 구덩이에 들어 있기도 하고 10살 남짓한 여자아이를 같이 넣은 석실도 있으며 30대 아버지와 8살가량 된 딸도 함께 있습니다. 주인공을 위해 파묻은 석실이 무려 32개라니 인간이 휘두르는 권력 앞에 또다른 인간은 그저 무기력할 뿐입니다.

 

우륵 기념탑은 우륵이 제자들과 함께 가야금(加耶琴)을 탔다는 금곡(琴谷) 언덕배기에 있습니다. 옆에는 우륵 초상을 모신 영정각도 있다. ‘정정골’이라고도 하는데 우륵이 연주하는 가야금 소리가 정정하게 들렸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라 합니다.

 

 

기념탑이 규모는 큰데 가야금 현이 휘어 있습니다. 대가야 가실왕(嘉實王)의 명을 받아 가야금 12곡을 제작한 3대 악성의 한 사람인 우륵의 생애를 기리기에는 조잡한 느낌이 든답니다. 정정한 느낌을 너무 기대했던 탓입니다. 

 

 

어쨌거나 우륵은 가야 멸망의 전조곡이었습니다. 대가야 직할지인 성열현(省熱縣:경남 의령군 부림면) 출신인 우륵은 나라가 어지러워지자 신라 진흥왕한테 항복합니다.

 

진흥왕은 국원(國原:충북 충주)에 머물게 하고 대나마 법지(法知)·계고(階古)와 대사(大舍) 만덕(萬德)을 보내 전수받게 했습니다. 전해 받은 세 사람은 뒤이어 새로운 곡을 만들었는데, 우륵은 이를 두고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뛰어넘은 곡임을 인정하고 맙니다.

 

우륵이 지은 12곡은 이름만 남았습니다. 하가라도(下加羅都)·상가라도(上加羅都)·보기(寶伎)·달기(達己)·사물(思勿)·물혜(勿慧)·하기물(下奇物)·사자기(師子伎)·거열(居烈)·사팔혜(沙八兮)·이사(爾赦)·상기물(上奇物)이 그것입니다.

 

김훤주

 

※2012년에 문화재청에서 비매품으로 발행한 단행본 <이야기가 있는 문화유산 여행길 경상권>에 실은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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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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