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순과 미선이 쓰러지던 날
지금 살아 있으면 십중팔구 대학생이 돼 있을, 그러나 영원히 여중생으로 남아 버린 신효순 심미선. 효순 미선은 2002년 6월 13일 아침 9시 40분부터 10시 사이 경기 양주군 광적면 가마울 마을에서 덕도 삼거리 가는 언덕길에서 길섶을 걸어가다 미군 장갑차에 깔려 숨졌습니다.
효순 미선의 목숨은 당시 군사훈련 하던 미군 제2사단 공병대대 44공병대 소속 부교(浮橋) 운반용 궤도차량에 앗겼습니다. 장소는 오른쪽으로 굽어져 야트막한 오르막 차로가 시작된 데서 35m 쯤 떨어진, 곧은 편도 1차로의 오른쪽 길섶입니다.
효순과 미선은 다음날인 효순의 생일과 13일인 다른 친구 생일을 함께 축하하려고 언덕 너머 300m 떨어진 ‘초가집’식당으로 가고 있었습니다. 효순 미선을 깔아뭉갠 사고 장갑차는 인도(引導) 차량과 장갑차 M113 APC 다음에 가고 있었습니다.
장갑차는 폭이 3.65m, 길이가 6.7m이고 맞은편에서는 브래들리 전투장갑차 5대가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효순과 미선이 쓰러진 곳은 중앙선에서 흰색 선 바깥까지 도로폭이 장갑차보다 좁은 3.23~3.31m였습니다.
흰 선 옆에는 너비 30~40cm 되는 아스팔트 갓길, 또 그 옆에 60~70cm 흙길이 있었지만 흙길에는 풀이 20cm 높이로 나 있고 옆에는 깊이 30~40cm 되는 고랑이라 걷기 어렵고 다시 가파른 언덕이 나 있는데 맞은편 도로도 사정이 마찬가지였습니다.
장갑차 바퀴 자국이 효순과 미선이 쓰러진 15m 앞에서부터 아스팔트 갓길을 벗어나 흙길쪽으로까지 40~50cm 들어가 있었습니다. 장갑차가 중앙선을 넘지 않은 상태에서 효순과 미선을 내리덮쳤음이 확인됐습니다.
장갑차가 좁은 도로에서 마주오던 브래들리 장갑차와 부딪히지 않으려고 효순과 미선이 있던 쪽으로 들이닥쳐 쓰러뜨리고 그 위로 캐터필러 무거운 몸짓을 진행시켜 버린 셈입니다.
식구들이 기억하는 효순과 미선 마지막 모습
2005년 3주기 추모집회에 나온 어린이
효순의 언니 : “어쩌다 사고 자리를 지나면 눈물만 나요. 그래서 가기도 싫어지는데……. “거실에서 같이 자곤 했어요. 엄마 아빠랑 막내랑 나란히 누워 잤는데 이제 한 사람 빈 자리가 너무 크게 느껴지는 거예요.”
효순 아버지 : 아버지 신현수씨는 초등학교 2학년 막내동생이 갖고 있던 딸 효순의 사진을 치우고 말았습니다. “막내 녀석이 누나 사진 걸어놓고 학교 갈 때 인사하고 다녀와서는 또 학교 얘길 다 하는 거예요.”
미선 할머니 : “요 앞에 있는데 뒤에 서 있더라고. 빨간 티에 하얀 바지를 입었는데, 어디 가냐 물으니 의정부에 간대. 그럼 왜 여기 서 있냐 했더니 효순이 기다린다고 하데.” 젖 떼고 나서 미선이 열다섯 될 때까지 데리고 잔 할머니는 그날 아침이 잊히지 않는답니다.
미선 어머니 : “막둥이다 보니까 정도 더 가더라고. 아침에 교복 입고 나서면 정말 이뻤어요.” “전날도 학교 다녀와서 품에 안기더니 ‘엄마 냄새가 좋아, 엄마 냄새가 너무 좋아.’ 하던 모습이 지워지지 않아요.” “그날 안아준 게 마지막이 될 줄 누가 알았겠어요?”
조중동은 어떻게 보도했을까
당시 마산 3.15의거 기념탑에 마련됐던 분향소
많은 국민이 스포츠 국가주의에 빠져 “대~한민국”을 외치는 한가운데서 효순과 미선은 숨을 거뒀습니다. 어쨌거나 오마이뉴스는 당일 ‘미군 차량 부주의로 여중생 2명 사망’기사를 내보냈습니다. 조중동은 어땠을까요?
또, ‘기계적 중립’으로 이름 높은 연합뉴스조차 바로 당일 ‘美대사 ‘장갑차 사고’ 조의’, ‘여중생 장갑차 사망사고 한미 합동조사’ ‘‘달리는 흉기’ 미군 차량, 주민 생명 위협’ 기사 들을 잇달아 보냈습니다. 조중동은 어땠을까요?
조선일보와 중앙일보와 동아일보는 외면했습니다. 조선은 14일치에서 미선과 효순의 죽음을 일절 보도하지 않았습니다. 중앙과 동아는 저마다 ‘미군 궤도車 덮쳐 여중생 둘 사망’(27면) ‘미군車에 치여 여중생 둘 사망’(31면)으로 발생 기사를 싣기는 했습니다.
그 뒤, 월드컵이 끝나고 나서 이른바 미국 선수 오노의 금메달 강탈 사건과 F-15K 비행기 강매 등과 맞물려 효순 미선이 숨진 사건은 국민 사이에서 엄청난 반미 기류를 만들어가기 시작했습니다.
11월 18일부터 22일까지 열린 재판에서 장갑차를 몰았던 페르난도 니노 병장과 마크 워커 병장이 무죄평결을 받고 신변 안전 따위를 이유로 27일 미국으로 돌아가자 반미 움직임은 걷잡을 수조차 없게 됐습니다.
사정이 이렇게 되니까 미국 대통령 부시가 11월 27일 자기네 한국 대사 허바드를 통해 ‘유감’ 뜻을 나타냈습니다. 이 때 조중동은 어떻게 보도했을까요?
조중동은 마치 미리 짜기나 한 듯이 28일치 1면에 모두 ‘부시 사과’라는 제목 아래 기사를 큼지막하게 실었습니다. 여기에는 쉽사리 눈에 띄지 않는 속임수까지 들어 있습니다.
부시의 간접 발언에는 ‘슬픔’이나 ‘유감’ 표명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잘못을 스스로 인정한다거나 용서를 해달라는 표현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도 조중동은 ‘사과’라 했습니다. 이날 조선은 1면 머리기사에 ‘부시, 사과 표명’이라고 제목을 달았습니다.
조선의 곡필은 같은 날 만평에도 이어졌습니다. 여기서 부시는 우리 국민 앞에 허리를 90도로 꺾어 절하면서, 함께 허리를 꺾은 군인에게 “더 숙여라!!” 호통 치는 모습으로 그려졌습니다. 그래 놓고는 11월 30일 있었던 서울 광화문 촛불시위는 또 빠뜨렸습니다.
중앙과 동아도 마찬가지였습니다. 28일치 1면 오른쪽 위입니다. 중앙은 ‘부시 여중생 사망 사과’, 동아는 ‘부시, ‘女中生 사망’ 사과’라 적었습니다. 어쩌면 이렇게 닮을 수 있을까요?
중앙은 이날 사설 ‘부시 대통령 사과 잘 했다’에서 “비록 간접 사과지만 사건에 대한 슬픔과 유감, 그리고 재발방지를 위한 한국과의 긴밀한 협력을 다짐하는 등 진솔함과 진지함을 읽을 수 있다”고 반겼습니다.
동아 28일치 사설 제목은 ‘부시 대통령이 사과했으니’였습니다. “아쉬움은 있지만 부시 대통령이 거세진 한국민의 분노를 제대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아 다행”이고 “미국 대통령이 주한 미군 관련 사고에 대해 처음으로 사과했다는 점도 평가할 만하다.”고 했습니다. 가톨릭마산교구 안명옥주교의 효순미선 시국미사
한겨레와 경향은 어떤 보도를 했는지
조중동의 이런 주장은 한겨레나 경향신문과 대조됩니다. 28일치 사설입니다. 한겨레는 ‘진정한 사과는 소파 개정이다’였고 경향은 ‘부시 사과로 끝낼 일 아니다’였습니다.
조중동이 보기에는 효순과 미선에게 일어난 사건은 어쩌다 일어난 ‘재수 없는’ 죽음인 반면, 한겨레나 경향에게는 평등하지 못한 한미관계를 바로잡지 못하는 이상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구조화된’ 죽음이었습니다.
한겨레와 경향의 최근 보도가 지난 시기 동안 쌓아온 노력의 소산이듯, 조선 중앙 동아가 요즘 ‘광우병’ 국면에서 보여주는 보도 양태 또한 지난날 그들이 해왔던 일들과 아주 빈틈없이 맞물려 있음을 여기서 한 번 더 확인할 수 있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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