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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독립운동가 추모비를 꼭꼭 숨겨놓은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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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시 진동읍에서 지산교로 가는 도로변 산자락 모퉁이에는 낙석방지용 철망이 설치되어 있다. 산에서 돌멩이가 굴러떨어질 경우, 도로를 지나는 자동차를 보호하기 위한 것이다.

그 철망 뒤에 꼭꼭 숨겨진 비석 4개가 있다. 그 중 3개는 조선시대 진해현감들의 선정비이고, 1개는 성격이 전혀 다른 비석이다.

비석의 상단에는 '彰義碑(창의비)'라는 큼직한 글자가 음각으로 새겨져 있고, 그 아래에는 김수동, 변갑섭, 변상복 등 1919년 기미독립운동 당시 이 지역에서 일제의 총칼에 맞서다 순국한 8의사의 이름이 적혀 있다.

오른쪽에는 '기미독립운동시 순의 팔사', 왼쪽에는 '병술 3월 3일 구 진해인사 립(立)'으로 되어 있다. 즉 해방 이듬해인 1946년(병술년) 3월에 옛 진해현의 이름없는 인사가 세웠다는 뜻이다.
 

비석 아래는 콘크리트 기단이 되어 있다. 이걸로 보아 이 비석은 원래 이 곳이 아닌 다른 자리에 서 있다가 도로 확장공사 때 옆의 선정비들과 함께 일괄적으로 옮겨진 것 같다. 창의비는 또한 상단 1/3 부분이 부러진 것을 붙인 흔적이 역력하다. 비석을 이전할 때 부러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 창의비의 의미는 해방 후 처음 맞이하는 기미독립운동일을 기념해 세웠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1919년 마산 삼진의거로 순국한 8의사를 가슴깊이 추앙해오던 지역의 한 인사가 해방이 된 후 첫 3월이 되자 곧바로 이 비석을 세웠다는 것이다. 게다가 설립자인 자신의 이름도 남기지 않았다.

이 창의비를 좀 더 지나 지산교를 건넌 후 맞은 편에 보면 '8의사 창의탑'이 있다. 창의탑은 창의비보다 17년 뒤인 1963년에 세워진 것이다. 그러니까 박정희 정권 때다.


창의탑의 설립주체는 '삼진 지방민 일동'으로 되어 있지만, 1963년 당시 '삼일운동순국팔의사창의탑 건립위원회'가 주도했고, 관도 함께 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따라서 실제로는 관민합동으로 세워진 것으로 볼 수 있다. 당시 박정희는 정권의 정통성을 과시하기 위해 독립운동 기념사업을 적극적으로 펼치고 지원했다.

따라서 어쩌면 해방 직후 한 무명인사가 세운 창의비가 더 애절하고 의미있는 유적으로 볼 수도 있다.

문제는 그런 창의비가 아무도 볼 수 없는 곳에 꼭꼭 숨겨져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역 근현대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조차 이 창의비의 존재를 몰랐다. 이 존재가 알려진 것은 2002년 경남대 연구팀이 학술용역조사를 하면서 창의비를 찾았고, 이를 당시 경남도민일보가 보도하면서부터였다.

당시 경남대 연구팀은 낙석방지철망 뒤에 숨어 있는 이 창의비를 많은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창의탑 주변이나 또다른 적절한 곳으로 옮겨야 한다는 의견을 마산시에 제출했다.

그러나 경남대 연구팀의 요청은 묵살당했다. 이유가 황당하다. "그냥 그 자리에 있어도 된다"는 것이었다.

재야사학자 박영주 씨가 철망 뒤의 창의비를 촬영하고 있다.


낙석방지용 철망 뒤에 창의비와 현감들의 선정비를 갖다놓았다는 것은 뭘 의미할까. 산에서 암석이 떨어져 비석들이 파괴되어도 좋다는 것이다. 비석들이야 어떻게 되든 철망 밖의 도로와 자동차들만 보호하면 된다는 뜻이다. 마산시는 이 비석들을 보호하고 보존할 의지가 전혀 없다.


위의 사진처럼 옆에서 철망 안쪽을 봐도 창의비는 잘 보이지 않는다. 존재를 알고 일부러 찾아가는 연구자들 외에는 아직도 창의비의 존재를 아는 사람이 거의 없다.

마산시는 왜 이렇게 창의비의 존재를 꼭꼭 숨겨놓고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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