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PD수첩 무죄판결, 기뻐할 수만 없는 까닭

기록하는 사람 2010. 1. 20. 19:53
반응형

MBC PD수첩 제작진이 법원에서 무죄판결을 받았군요. 당연한 귀결입니다.

하지만 1심 법원의 무죄판결에 마냥 기뻐할 수만 없는 것은, 그동안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PD수첩 제작진이 겪었을 심신의 고통과 빼앗긴 시간·열정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게다가 검찰이 즉각 항소하기로 했으므로, 앞으로도 그런 무의미한 고생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면 오히려 가슴이 무거워짐을 느낍니다.

제가 이런 생각이 든 것은, 저 역시 제가 보도한 기사로 인해 공직자로부터 피소당한 후 고생 끝에 승소했던 경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이번 PD수첩 사건은 형사사건으로 진행되었지만, 저는 2002년 8월 언론중재위원회나 형사적 판단을 받는 절차도 없이 곧바로 무려 2억 원의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명예훼손 소송의 피고인이 되었습니다.

당시 친일 혐의를 받고 있던 작곡가 조두남의 기념관 건립 논란을 보도하는 과정에서 마산시와 황철곤 마산시장의 폐쇄적 행정을 비판한 기사가 명예훼손 소송의 빌미가 되었습니다.

PD수첩 판결을 보고 6년 전 소송이 떠올랐다


2004년 4월 8일 마산시장과 명예훼손 소송에서 승소한 후 법정동 앞에서 찍은 기념사진.

지금도 마산시장으로 재임 중인 황철곤은 창원지법에 접수한 소장에서 김주완·박근철 기자가 쓴 경남도민일보 6월25일자 1면 "조두남 기념관 추진과정 공개 끝내 거부, 황시장 '투명행정' 정면 역행"이라는 제목의 머릿기사와 3면 "행정정보 공개 투명지수 황철곤 마산시장 낙제점" 머릿기사·10면 "차라리 군사독재시절이 그립다" 칼럼 등이 원고들을 의도적으로 비방할 목적으로 작성 게재돼 명예가 훼손되고 정신적 고통을 입는 등 손해가 발생했다고 주장했습니다.

저 역시 마산시장의 소장을 보는 순간 무죄를 확신했습니다. 기사 내용에 허위사실이 없을 뿐 아니라, 제가 칼럼으로 쓴 글까지 명예훼손이라고 주장한 것은 그야말로 억지였기 때문입니다. 아마 그들도 소송을 내기 전 변호사의 자문 정도는 받아봤을텐데, 그런 터무니 없는 소송을 냈다는 것은 재판에서 이기겠다는 목적보다 신문사의 비판보도를 위축시키고 기자의 입에 재갈을 물리겠다는 의도가 다분해보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심에서 승소판결을 받기까지 8개월동안 제가 겪은 심신의 피로는 이루 말할 수가 없었습니다. 소송을 낸 마산시장은 시민이 낸 세금으로 비싼 변호사를 선임하고, 자신의 부하직원을 담당자로 지정해 소송을 진행시키면 그만이지만, 저와 신문사 입장에서는 괜한 일에 변호사 비용을 쓰는 것부터 부담스러운 일이었고, 일일이 '비방과 명예훼손의 의도가 없었음'을 입증하는 자료와 논리를 '준비서면'으로 작성해 제출하는 것도 보통 고역이 아니었습니다.

다섯 번 정도에 걸쳐 우리의 무죄를 주장하는 '준비서면'을 법정에 제출했는데, 그 '준비서면'이라는 게, 좀 과장해서 말한다면 거의 논문 한 편 쓰는 정도의 노력이 들어갔습니다. 특히 명예훼손 소송의 경우, 서구와 달리 우리나라는 피고인 기자와 언론사에 죄가 없다는 입증 책임을 부과하고 있기 때문에 방어논리를 스스로 만들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렇게 하여 8개월에 걸친 법정투쟁 끝에 우리가 얻은 것은 '원고의 청구를 기각한다'는 판결이었습니다. 다음은 당시 판결을 보도한 기록입니다.

황철곤 시장, 도민일보 명예훼손 소송 패소

황철곤 마산시장과 시가 경남도민일보의 조두남 기념관 정보공개 청구 관련 보도로 명예가 실추됐다며 경남도민일보사와 윤석년 전 편집국장·김주완 ·박근철 기자 등을 상대로 낸 2억원의 손해배상 청구소송에서 패소했다.

창원지법 제3민사부(재판장 조원철 부장판사)는 8일 오전 선고공판에서 경남도민일보사와 편집국장·기자 등을 상대로 한 마산시의 손해배상 청구는 이유없다며 기각 판결했다.

재판부는 판결문에서 "언론기관의 보도와 관련한 불법행위 책임을 판단함에 있어 표현 내용이 공적관계에 관한 것인가, 사적관계에 관한 것인가에 따라 차이가 있다"며 "경남도민일보 기사의 전체적 취지나 인상·관련 인물과 사안의 공공성·사회성 등을 종합했을 때 시장과 시의 명예나 신뢰를 침해 또는 실추시켰다고 인정하기 어렵고 증거도 없다"고 선고 이유를 밝혔다.

재판부은 "오히려 조두남 기념관 기념사업이 시의 주도로 시작됐고 국고보조금을 지원받은 점, 설계자문위원들을 시가 위촉한 점 등을 감안하면 설계자문위원들도 공인의 지위를 가진다"며 "(그들이) 공인이라면 그 이름이 자신이 의욕하는 바와 달리 어느 정도 알려지고 공개되는 것을 일반인도 예상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또"전체 취지를 종합하면, 피고들은 원고들을 비난하는 기사 외에도 조두남의 공과를 함께 기록한다거나 기념관의 용도를 바꾸자는 등의 대안을 제시하는 기사도 게재하였고, 전체적으로 조두남의 친일 행적에 대한 의혹을 밝히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돼 여론을 형성하고 관심을 불러일으켰으며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학계·문학계·사회단체 등으로 구성된 시민위원회가 설립되어 조두남기념관이 마산음악관으로, 노산문학관이 마산문학관으로 각 명칭이 변경된 면 등을 부정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이에 대해 경남도민일보 구주모 편집국장은 "기사내용이 진실에 기초하고 있고, 공공의 이익을 위한 것이었므로 오늘의 판결은 당연한 결과"라고 환영했다.

김주완 기자도 "애당초 이번 마산시의 소송은 비판언론에 대한 재갈물리기 의도에서 비롯됐다"며 "이번 판결은 상식이 살아있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마산시는 지난 해 조두남 기념관 건립사업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조두남의 친일문제가 제기되고 경남도민일보가 같은 해 6월 기념관 내부 전시물 등을 결정하는 설계자문위원회의 명단을 밝힐 것을 요구하는 정보공개를 신청하고, 시가 이를 거부한데 대해 폐쇄적 행정을 지적하는 비판보도를 하자 악의적 비방보도로 명예가 훼손됐다며 경남도민일보를 상대로 소송을 냈었다. (2004년 4월 9일자 경남도민일보)


재판에서 패배해도 권력은 잃는 게 없다


황철곤 마산시장.

결국 마산시장의 명예훼손 주장이 터무니없음이 그 판결로 밝혀졌지만, 우리가 얻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잃은 것은 변호사 비용과 시간·정열이었고, 남은 것은 심신의 피로 뿐이었습니다. 돌이켜보면 소송이 진행되는 기간 동안 원고인 마산시장을 정면 비판하는 보도도 제대로 없었습니다. 알게 모르게 신문사 구성원들도 위축이 되었다는 반증이죠. 결국 언론을 위축시키고자 하는 마산시장의 의도는 관철되었던 셈입니다.


당시 1심에서 패소한 마산시장은 '항고하지 않을테니 이쯤에서 끝내자'는 입장을 전달해왔을뿐, 사과 한 마디 없었습니다.

이처럼 행정권력과 예산을 쥐고 있는 공직자는 국민이 낸 세금과 부하공무원을 이용해 너무나 쉽게 언론에 본때(?)를 보이기 위한 소송을 할 수 있습니다. 물론 언론이 명백한 허위보도나 사익 등 불순한 목적으로 비방보도를 했다면 당연히 댓가를 치러야 합니다. 하지만 터무니없는 소송으로 국민의 세금과 공무원을 언론길들이기에 이용하고, 결국 패소했다면 해당 공직자 또한 권력과 예산 남용에 대한 댓가를 치러야 한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마산시장의 경우처럼 민사소송에서 패했다면 그 소송비용을 시장 개인에게 부담시킨다든지, 검사가 기소권 남용으로 결국 무죄판결이 났다면 징계라든지 최소한 인사고과에라도 반영해야 한다는 겁니다. 그런 것이라도 없다면 언론길들이기를 위한 권력 남용은 앞으로도 계속 이어질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어쨌든 고생 끝에 무죄를 받은 PD수첩 제작진이 앞으로 남은 재판에서도 지치지 말고, 그 기개도 꺽이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아마 이번 무죄 판결에도 불구하고 PD수첩 등 시사프로그램에 대한 대내외의 폐지 압력은 끊이지 않을 겁니다. 그걸 지켜주는 것은 우리 국민들의 관심과 성원입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