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명문대보다 적성 강조하는 이상한 선생님

기록하는 사람 2009. 11. 30.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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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이한 고등학교 교장 선생님 한 분을 만났다. 그는 "고등학교에서 서울의 명문대에 몇 명의 학생을 보내느냐는 실적은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말하는 교장이었다. 자칫 자기 자식의 명문대 진학에 목을 매는 학부모들이 들으면 위험할 수도 있는 말이다.

하지만 그 교장 선생님은 "자신의 소질이나 적성과는 무관하게 명문대 진학만을 목표로 삼는 게 오히려 위험하다"고 말한다. 학과가 아니라 대학 이름만 보고 명문대에 진학했다가 적성에 맞지 않아 인생을 그르치는 학생들도 적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 교장이 있는 고등학교는 학생들의 다양한 소질과 적성을 찾아 살려주는 '진로탐색교육'을 가장 강조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할 수도 있는 이야기가 기자에겐 왜 특이하게 들렸던 것일까? 아마도 기자가 알고 있는 교장에 대한 선입견이 작용했을 수도 있다. 대개의 교장은 명문대 진학실적을 높여 자기 학교의 이름을 알리는 데 기를 쓰는 캐릭터로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자가 가지고 있던 선입견이 잘못된 것일 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 글을 쓰기에 앞서 이 블로그에 '이런 교장선생님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는 글을 올려 봤다. 물론 교장 선생님의 이름과 학교는 밝히지 않았다.

그랬더니 3000명이 넘는 사람들이 글을 읽고 10여 명이 댓글을 통해 "그 교장 선생님을 인터뷰하여 널리 알려달라"고 요청해주었다. '우리나라에서 천년기념물로 지정해야 할 교장'이라는 댓글도 있었고, 중학생을 둔 학부모라며 그 교장이 있는 학교에 진학시키고 싶다는 반응도 있었다.

마산 합포고등학교 김운열 교장. 그는 "성적별로 끊어서 대학 진학률만 높이려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이라고 말한다.


그 선생님은 마산 합포고등학교 김운열 교장(58)이었다. 그는 지난해 9월 합포고에 부임한 후 70여 명의 교직원들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서울의 명문대에 갈 몇몇 학생들에게 교육의 초첨을 맞춰선 안 됩니다. 명문대에 갈 아이들은 관리만 잘 해줘도 됩니다. 선생님들이 더 관심을 가져야 할 아이들은 오히려 어중간한 지대에 있는 학생들입니다."

김 교장은 무조건 4년제 대학에 학생을 많이 보내는 것도 능사가 아니라고 했다. "4년제 대학을 졸업한 후에도 적성에 맞는 직업을 찾지 못해 전문대학으로 역류하는 학생도 많습니다. 그것은 결국 중·고등학교 때 교사들이 진로지도를 제대로 하지 않은 탓입니다. 성적별로 끊어서 대학 진학률만 높이려는 것은 아이들에게 죄를 짓는 일입니다."

그는 합포고 출신 학생들이 훗날 만족스러운 직업을 찾아 살아가면서 '고등학교 때 진로지도를 잘 해주신 선생님들 덕분'이라는 말이 나올 수 있도록 하는 게 교육의 목표라고 했다.

"학습지도는 누구나 할 수 있습니다. 인터넷에 들어가도 수많은 정보가 있고, 학원 강사들이 오히려 학교 선생님들보다 더 잘할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공교육에서는 오히려 진학·진로지도가 더 중요합니다. 학생 개개인의 능력과 소질, 적성을 잘 살려주는 게 교사의 역할이라는 거죠."

하지만 문제가 있었다. 평탄한 가정 환경에서 자라나 별다른 시행착오 없이 교사가 된 젊은 선생님들이 정작 직업의 세계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김 교장은 우선 교사들을 상대로 한 진로교육이 먼저라고 생각했다.

합포고 교사들이 발간한 '진로교육의 길잡이'(왼쪽)와 교사들의 필독서인 '진로의 정석'.


올해들어 '맞춤형 진로지도를 통한 학생의 행복한 미래찾기'라는 주제로 경남도교육청과 교육과학기술부로부터 '선도학교' 지정을 받았다. 그 때부터 '진로지도를 잘 하는 학교, 10년 후 학생의 진로를 고민하는 학교'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교사들에게 '사이버 진로지도 연수'를 받게 했다. 또한 역경을 딛고 성공한 각 분야의 전문가들을 초청해 강의를 듣게 하는 한편 <진로의 정석>이라는 교재를 구입해 나눠주고 읽도록 했다. 지금까지 4차례 진행된 교사 대상 전문직업인 강의에서 '교사의 진로교육이 학생의 인생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가'에 대한 생생한 경험담을 듣고 많은 교사들이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고 한다.

이런 과정을 통해 다양한 직업군에 대한 지식을 얻고 진로지도 전문성을 갖춘 합포고 교사들은 자체적으로 <일반계 고등학교 진로교육의 길잡이>라는 교사용 책자를 발간하기도 했다.

"엊그제 경남도민일보에 마산대학 평생교육원 이야기가 보도된 걸 봤는데, 거기에도 이미 4년제 대학을 나온 사람들이 다시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하더군요. 또한 폴리텍대학에도 그런 경우가 많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사례만 보더라도 중·고등학교 때 진로교육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알 수 있죠."

김운열 교장.


김 교장은 사실 중학교 때부터 진로지도가 이뤄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런 중학교가 별로 없다. 그래서 합포고등학교는 1학년생 전원을 대상으로 홀랜드 진로탐색 검사를 받도록 했다. 또한 전교생에게 설문조사를 하여 희망하는 직업군별로 매월 각분야의 직업인을 강사를 초빙, 강연을 열고 있다. 올해에만 8명의 직업인이 이 학교를 다녀갔다.

또 여름과 겨울방학에는 △회사 체험반 △봉사활동반 △예술체험반 △과학실험반 △요리반 등으로 나눠 학생들의 진로탐색캠프를 운영하고 있으며, 부모의 직업에 대한 자긍심을 갖고 자신의 진로 탐색을 위해 부모의 회사를 탐방하는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3학년은 인문사회계열, 교육계열, 자연공학계열, 의학계열, 예체능계열 등 희망 전공별로 학급을 편성해 선택할 수 있도록 했으며, 학생들이 언제든 자신의 진로를 검색해볼 수 있도록 컴퓨터 진로지도 프로그램을 개발하기도 했다. 이 프로그램은 학생이 원하는 직업을 입력하면 관련학과 정보는 물론 진학 가능 내신성적 및 필요한 자격증, 유망한 대학 등이 검색결과로 나타난다.


지역의 마산대학, 창신대학, 창원대학교, 마산상공회의소, 창원종합고용지원센터, 마산청소년종합지원센터 등과 진로지도 협약을 체결해 특성화된 학과 정보과 체험활동, 기업 탐방 등 프로그램도 운영하고 있다.


이런 노력을 통한 합포고등학교의 목표는 △후회없는 대학 전공 선택 △장래 직업을 걱정하지 않는 전공 선택 △실력으로 학벌의 벽을 허무는 진로 선택 △자신의 적성과 흥미에 맞는 직업 선택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솔직히 학부모 님들 중에서도 아이의 적성과 소질보다 주변의 눈치를 의식해 무조건 4년제 대학이나 명문대로 보내려는 분들이 있습니다. 학교의 노력도 중요하지만 학부모의 인식이 더 중요할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내년부터는 학부모를 상대로 한 진로 교육도 해볼 계획입니다."


이런 노력의 결과 진로 상담을 위해 상담실을 찾는 학생들도 꾸준히 늘고 있다. 박정남 상담교사는 "3년째 합포고에 있었는데, 올해들어 진로상담을 요청하는 학생들이 하루 평균 5명에 이를 정도로 늘었다"고 말했다.


혹시 아이들 성적에 집착하는 학부모들로부터 항의를 받지는 않는지 걱정스러웠다.


"그래서 진로교육과 관련한 강의나 프로그램은 방과 후에 합니다. 정규수업이 끝난 뒤 자율학습 시간에 하니까 그런 문제는 없습니다."


그는 스스로 '보수적인 교육자'라고 한다. 다만 기본에 충실하자는 게 그의 철학이다.


대개의 고등학교는 대학입시철이 지나면 서울의 명문대는 물론 4년제 대학 합격자들의 명단이 적힌 펼침막을 내건다. 합포고등학교는 어떤지 물어봤다.


"작년에도 그걸 걸어야 할지에 대한 논의가 있었는데, 우리학교는 걸지 말라고 했습니다. 동창회에서 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올해도 학교에서는 걸지 않을 생각입니다."


김 교장은 어떻게 이런 교육철학을 갖게 되었을까? 혹시 전교조 출신은 아닐까?


"하하하! 인성교육이나 소질과 적성에 맞는 교육은 진보나 개혁·보수를 떠나 기본적으로 공교육이 해야 할 일 아닙니까? 그걸 갖고 전교조냐 아니냐를 묻는 게 오히려 이상합니다."


그는 오히려 자신을 보수적인 교육자라고 소개했다. 그의 말대로 '당연한 일'이 '특이한 일'로 보이는 세상에 우리가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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