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일 토요일 오랜만에 텔레비전을 볼 시간이 좀 생긴데다가 사람들이 재미있다는 얘기도 하고 해서 <선덕여왕>을 봤습니다. 채널 15에서 1부에서 6부까지 한꺼번에 내보내더군요.
이야기는 나름대로 재미있게 전개가 되더군요. 짜임새도 탄탄한 것 같고요, 미실로 나오는 고현정을 비롯해 등장인물들도 전형성을 띠고 있고 배경 음악도 정말 그럴 듯했습니다.
같이 보던 중3 딸 현지가 흠뻑 빠져들 정도였습니다. 6부가 끝나고 나서 현지가 아쉬워하기에 인터넷에서 거금 5000원인가를 들여 '다시 보기'로 나머지도 더 봤습니다. 저는 먼저 잠들었지만, 현지는 제가 자는 옆에서 계속 컴퓨터 모니터에 눈을 꽂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몇몇 대목이 눈에 거슬렸습니다. 스토리의 전개에는 크게 영향을 미치지 않는 정도였지만, 조금만 더 세심하게 준비를 했더라면 훨씬 낫지 않았을까 싶었습니다.
1. 임금 호칭에 일관성이 없다
드라마를 보면 "진흥대제" 이런 표현이 나옵니다. "진흥대제의 유업을 받들지 못하고" 운운하지요. "진지제"도 나옵니다. "진지제도 폐위했는데……" 뭐 이런 대사랍니다. 그런데 진지왕을 왕위에 올릴 때 미실이 "저를 황후로 삼으신다면" 하는 대목도 나옵니다. 그리고 임금을 부를 때 "폐하"라고도 합니다.
이런 호칭들은 황제에게 쓰는 것들입니다. 진흥대제는 진흥 대황제이고 진지제는 진지 황제가 됩니다. 황후 또한 황제의 아내를 일컫는 말이고 폐하 또한 황제를 받들어 이르는 말입니다. 그런데 진평왕은 자기를 스스로 이를 때 "과인은" "과인이" 이렇게 말합니다.
그런데 과인(寡人)은 황제가 쓰는 낱말이 아닙니다. 제후나 왕이 쓰는 말입니다. '과(寡)'는, '적다'는 뜻입니다. 황제는 스스로를 이를 때 '짐(朕)'이라 합니다. 중국에서 '짐'은 그냥 1인칭일 뿐이어서 원래는 누구나 다 쓸 수 있는 낱말이었으나, 진시황이 천하를 통일하고 나서 황제만 쓸 수 있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황제-폐하-황후-짐 이렇게 한 묶음이 됩니다. 그냥 왕일 때는 어떻게 될까요? 제가 알기로는, 임금(왕)-전하-왕후-과인 이렇게 됩니다. 그러니까 <선덕여왕>에 나오는 대사들은 황제일 때 쓰는 말과 그냥 임금(왕)일 때 쓰는 용어가 뒤섞여 있는 셈입니다. 이런 정도는 쉽게 잡을 수 있을 텐데 왜 그랬을까요?
2. '이불 뒤집어쓰고 만세 부르는' 황제
<선덕여왕>에 나오는 것처럼 옛날 진흥왕이나 진지왕이나 진평왕이 과연 이런 용어를 썼을까요? 저는 그렇게 하지 않았으리라 봅니다. 임금(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임금은 이사금과 곧바로 통하는 말이기도 하지요.
왕의 호칭은 아시는대로 거서간-차차웅-이사금-마립간-왕, 이렇게 바뀝니다. 거서간은 박혁거세 하나뿐이고 차차웅도 남해 차차웅 하나뿐입니다. 그 뒤에는 이사금이라 했답니다. 이(齒)로 금을 내어 연장자를 가렸다는 데서 유래합니다. 그 다음 마립간을 썼다는데, 보면 아시겠지만 마리는 머리 또는(그리고) 마루에 해당되고 간은 남자 또는 사람을 이릅니다. 우두머리라는 얘기이지요.
그러다가 지증마립간이 즉위 네 해째인 503년 중국 제도를 들여와 왕이라 이릅니다. 나라 이름도 '신라'라고 정합니다. 그 전에는 '사라' '사로' '신라'를 섞어 썼습니다. <삼국사기> 지증마립간 4년 기사를 보면 "예로부터 나라를 가진 분들이 모두 황제를 칭하고 왕을 칭했는데(稱帝稱王) 우리 시조가 나라를 세우고 지금까지 22대에 이르나 아직 존호를 정하지 않았으니 이제 신하들이 한 뜻으로 삼가 신라 국왕이라는 존호를 올립니다."라 돼 있습니다.
이런 지증왕 다음이 법흥왕이고 법흥왕 다음이 바로 <선덕여왕> 들머리에 나오는 진흥왕입니다. <삼국사기> 법흥왕 8년 기사에는 "중국 양나라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遣使於梁 貢方物)"고 돼 있습니다.
법흥왕을 뒤 이은 진흥왕은 더합니다. 중국에 조공을 할 뿐 아니라 중국으로부터 책봉을 받기도 합니다.(그리고 이런 책봉이 신라의 위세를 오히려 드높이는 구실을 합니다.) 25년(564)에는 "북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遣使北濟朝貢)"고 <삼국사기>에 돼 있습니다.
<삼국사기>는 이듬해 봄 2월 북제의 무성황제(武成皇帝)가 "조명으로 왕을 사지절 동이교위 낙랑군공 신라왕으로 삼았다(詔以王爲使持節東夷校尉樂浪郡公新羅王)"고 적어 놓았습니다. 조공을 하는 황제라니요, 다른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는 황제라니요. 성립할 수 없는 얘기입니다.
그런데 드라마는 왜 그리 할까요? 그냥 대단하게 보이려고 그럴 것입니다. 황제라고 하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인다고 여기는 모양입니다. 그러나 가만 생각해 보면, '당시' 황제가 아니었는데도 '지금' 황제라 하는 것이 전혀 쓸모 없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신라 진흥왕을 우리가 진흥대제라 한다고 해서 아무것도 달라지지 않습니다.
그냥 서푼 어치도 안 되는, 다른 나라 사람들은 알아주지도 않는 자존심을 혼자서라도 세우려는 서글픈 모습일 뿐입니다. 가난한 사람을 깎아내리려는 생각은 없지만, 비유를 하자면 찢어지게 가난하게 살면서도 속은 텅 빈 채 겉차림에만 신경쓰는 얼간이 짓이라고도 할 수 있겠지요.
더욱이 이런 자기 도취는 현실을 잊게 만드는 효과도 있습니다. 옛날의 대단하지도 않은 영광을 엄청나게 빛나는 역사인 것처럼 알아듣게 되면 눈 앞에 있는 고달픔 괴로움이 제대로 보이지 않을 수 있다는 얘기입니다. <선덕여왕> 제작진이 그런 효과까지 노렸겠습니까만, 은연 중에 작으나마 분명 그런 노릇을 하고는 있습니다.
3. 김유신의 군화가 이상했다
7부에 나오는 장면이지 싶습니다. 천명공주(선덕여왕 덕만의 쌍둥이 언니)가 국선 문노를 만나러 만노성에 갔다가 뜻하지 않게 미실과 설원랑의 보종 일당으로부터 공격을 당해 다치게 됩니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김유신 일행에게 붙잡히게 되는데 어쨌거나 그 덕분에 천명공주는 아버지인 진평왕을 다시 만날 수 있게 됩니다.
바로 여기에서, 어린 김유신이 진평왕 알현을 앞두고 문전에서 왔다갔다 하는 장면이 연출됩니다. 김유신은 지금 진평왕이 자기를 혼낼지 어떨지 몰라 조바심을 내고 있는 것입니다. 천명공주가 김유신한테 붙잡혀 갖은 모욕을 겪었다고 하면 혼이 나고 김유신 덕분에 살아돌아왔다고 하면 칭찬을 받게 돼 있는 국면입니다.
좀 있다 보면 알게 되겠지만 천명공주는 미실에 맞서기 위해 '만노성 촌 구석'에 있던 화랑 김유신을 경주에 데려가 자기 세력으로 키우려고 김유신 덕분에 살아올 수 있었다고 합니다. 이에 따라 아버지 진평왕은 불려온 김유신을 칭찬하고, 만노성을 지키던 김유신의 아버지 김서현도 칭찬합니다.
이 때 김유신의 조바심을 나타내기 위해서인지 김유신 오가는 발길에 카메라가 초점을 맞췄는데 군화가 이상했습니다. 까만 색이었는데. 지퍼가 달려 있었던 것입니다. 게다가 앞에는 신발 묶는 끈 따위도 없었고요. 당시는 아마 행전으로 발목 둘레를 감쌌을 텐데 그런 것이 없었습니다.
다리 부분을 집중 촬영해 내보내면서 지퍼 달린 신발을 신기는 제작진의 무신경은, 보는 사람이 오히려 당황스러워해야 할 정도로 황당했습니다. 70년대 초반에 봤던 <성웅 이순신> 영화가 생각났습니다. 이순신 장군이 오른손으로 칼을 높이 빼들고 "공격!" 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때 흘러내린 전포 위 팔뚝에서 하얀 시계가 햇빛을 받아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습니다. 그 기억은 지금도 선명하답니다. 하하.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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