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진해에는 왜 진해 동헌이 없을까

김훤주 2008. 3. 29. 2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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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진해시에는, 해마다 벚꽃 잔치를 벌이는 지금 진해에는, 옛날 진해현 관아가 없는 반면에, 마산시 진동면에 엉뚱하게도 진해 동헌이 있습니다. 왜 그런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부산 서면(西面)은 부산 서쪽에 있지 않고 한가운데에 있습니다. 그런데도 왜 서면이라 하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마산시 내서읍(內西邑)은 마산의 안쪽에도 있지 않고 서쪽에 있지도 않습니다. 그런데도 왜 내서라 하는지 궁금하시지 않습니까?

진해 동헌이 진해에 있지 않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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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산 진동 진해 동헌

먼저 진해 동헌과 진해 객사가 왜 마산시 진동면에 있을까요? 보통 사람 상식을 따르면 진해에 있어야 마땅한데 왜 바깥에 나가 있을까요? 간단합니다. 해마다 벚꽃으로 난리를 일으키는 지금 진해가 진짜가 아닌 사이비 진해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진해는 일제 침략 이전에는 없었습니다. 지금 진해시 권역에서 나름대로 무리를 이뤄 산 데는 웅천입니다. 여기 가면 일제시대 신사참배 거부로 이름 높은 주기철 목사가 일했던 교회도 있고 읍성 자취도 생생하게 남아 있습니다. 그러니까 진해가 아니라 웅천이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러다가 일제가 들어서면서 지금 진해 시가지에 해군기지를 만들었고 여기다 이름을 진해라고 붙였습니다. 옆 동네에서 쓰던 진해라는 이름은 쓰지 못하게 하고 말입니다.

동헌 양쪽에는 오동나무가 한 그루씩 서 있습니다. 1832년 현감이던 이영모가 지었다고 돼 있습니다. 진해현은 1018년 고려 현종 9년에 처음 기록에 나옵니다. 조선 태종 때는 고현에서 진동으로 치소를 옮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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벚꽃 우거진 지금 진해 여좌교 둘레

고현(古縣)이 왜 고현인지 알 것 같지 않습니까? 치소를 옮기면서 고현은 아마 고현이 됐을 것입니다. 현청이 그대로 있는데 어떻게 옛 '고'자를 써서 고현이라 할 수 있었겠습니까? 조금은 다르지만, 거제시에 있는 신(新)현과 고(古)현이 같은 관계일 것입니다.

진해현은 1895년 진해군으로 바뀌었다가 1908년 창원군에 편입되면서 사라집니다. 대신 일제가 해군기지를 건설하던 곳은 1905년 러일전쟁에 맞춰 ‘웅천군 진해면’으로 바뀌었고, 일제의 이 ‘신도시 건설’은 1930년 시가지의 일본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본뜨기와 벚나무 심기로  마무리됐습니다.

부산 서면이 한가운데 있으면서도 서면인 까닭

부산 서면은 부산에서 으뜸가는 번화가입니다. 부산 전체를 놓고 보면 한가운데에 있는데, 그래서 중앙동이라 해야 마땅할 텐데, 서면이라 합니다. 양산과 기장 쪽으로 영토를 넓히기 전 시점에서 본다면 오히려 동쪽에 있다 해야 맞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이름이 서면인 까닭은 따로 있습니다. 동래군이 있었습니다. 동래군에는 남면도 있고 서면도 있고 북면도 있고 동면도 있었습니다. 물론 구포 사상 사하도 죄다 동래군 소속이었습니다.

서면은 동면과 짝을 이루는 땅이름입니다. 서면이 부산에 들어간 때는 1936년입니다. 동면은 그 뒤 부산에 들어가지 않고 1973년 양산으로 편입됐고, 이로써 통일신라시대부터 있어온 '동래군'은 박물관 수장고로 들어갔습니다.

부산은 이렇게 동래를 접수했을 뿐만 아니라 비슷한 방식으로 김해를 접수하고 양산을 접수하고 기장을 접수하고 함으로써 오늘날 엄청난 대도시가 됐습니다.

마산 북동에 있는 내서읍이 내서인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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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른내서문화제 한 장면

마산 내서도 우습기는 매한가지입니다. 지금 마산을 지도로 보면 내서는 동쪽에 있으며 동시에 북쪽에 있습니다. 방향으로만 치자면 동북읍 또는 북동읍이라 해야 맞을 것입니다.

마산포가 예전에는 창원부 소속이었다는 점이 작용합니다.(창원시는 올해가 창원 600년이라 엄청 떠들고 있습니다. 1408년(태종 8) 의창·회원 두 현(縣)을 합쳐 창원부로 만들었다가 1415년 창원도호부로 승격했다는 얘기입니다.)

창원(도호)부 치소(治所)는 지금 소답동에 있었습니다. 소답동은 내서읍에서 볼 때 동쪽에 있습니다. 소답시장 언저리에는 지금도 읍성(邑城) 자취가 많이 남아 있습니다. 소답동 치소에 앉아 있는 부사가 보기에 지금 내서는 딱 내서가 맞습니다.

서쪽인데 바깥은 아니고 안이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외서(外西)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진동.진북.진전면이 있는 삼진 지역을 그 때는 외서라 일렀다고 합니다. 내서에서 더 서쪽으로 두척산(=무학산)이나 광려산을 넘어야 삼진 일대가 나옵니다.

(오상진 기자 고마운 지적을 댓글로 받고 이렇게 고쳐씁니다. 서쪽인데 바깥은 아니고 안이라는 뜻입니다. 당시는 외서도 있다고 들었습니다. 지금 진동.진북.진전면이 있는 삼진 지역이 진해군이던 시절, 당시 창원군 외서면은 지금 마산시 신월동과 월영동 등지입니다.

이 동네 역사는 굴곡이 심합니다. 1898년 마산 개항을 한 해 앞두고 이른바 열강의 압력을 받아 신월.월영 일대는 여러 나라의 공동 거류지로 지정됐다가 1908년 4월 무슨무슨 마찌(町) 하는 일본식 이름으로 일본이 바꿉니다. 1910년 경술국치 직후인 10월에는 일제가 원래 있던 창원부에다 진해군.웅천군을 더해 마산부로 이름을 갈았습니다.(여기 나온 이 마산이 지방 행정 단위로 쓰인 첫 이름이랍니다.)

이 때만 해도 외서면은 남아 있었는데, 1914년 새로 마산부가 들어서면서 외서면으로 일컫던 일대를 마산부가 자기 영역으로 삼았습니다. 그러면서, 기록에 따르면, 이 때 성호리(지금 마산 성호동) 일부를 빼고는 외서면이 모두 무슨무슨 마찌(町)들이 됐답니다.

그러면 내서면은 어떻게 됐을까요? 1914년 행정 개편 때 창원군에 내서면으로 들어갔다가 1942년 9월 내서면의 회원리 교방리 산호리 석전리 양덕리가 다시 마산부에 편입됐다는군요. 마산 사람들은 잘 아시겠지만, 마재(斗尺)고개 남쪽은 회원동 교방동 하는 식으로 바뀌고 고개 너머가 지금 내서읍으로 남은 셈입니다.)

땅이름을 이처럼 따져보면, 그 땅을 터전삼아 살아온 이들의 숨결과 살결이 되살아 나타납니다. 잘만 하면 생물과 무생물까지 버무려진 자연까지도 엮여나옵니다. 물론 제가 높은 경지에 이르지는 아직 못했습니다. 그렇기는 하지만, 이렇게 따져보면서 이리저리 머리 굴리는 것만으로도 즐겁습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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