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⑥ 일제의 빛나는 승전지

김훤주 2018. 6. 12. 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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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군기지에 어울리는 이름, 진해


지금부터는 진해로 떠납니당~~^^. 친구들!! 웅천이 진해로 바뀐 사연은 다들 기억하고 있지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지금의 삼진지역의 지명이었던 진해를 1908년 마음대로 바꿔버렸다 했지요.(복습입니당^^) 


~~ 그렇다면 러일전쟁에 대해서 좀 상세하게 알아보는 것도 재미있겠죠^^ 일본은 우리가 생각하기에는 작은 섬나라지만 1895년에 이미 강대국(청나라)을 꺾을 만큼 힘이 쎘어요. 일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제국주의 야욕을 키워나갔어요. 10년 후 당시 무적함대로 이름을 날리던 러시아 발틱함대에 치명상을 입히면서 강대국 러시아도 이겨 먹었어요.


1906년부터 일제는 진해를 본격적으로 장악하기 시작합니다. 경계 지정과 토지 수용 같은 준비 작업을 마친 후 19096월 군항 건설에 들어가지요

일제강점기 초소 역할을 했다는 팔각정. 알고 보면 육각정입니다.


잠깐~!! 우리가 흔히 말하는 진해만은 진해의 앞바다만 일컫는 것이 아니에요. 동쪽으로는 웅천만에서부터 마산만·율구만·명주만을 거쳐 서쪽 거제 옥포만·하청만까지 다 진해만에 속하지요


1910년 경술국치를 강요한 일제는 진해만 여기저기에 있던 각종 군사시설을 진해에 집결시키기 시작해요. 먼저 1903년 거제 장목면 송진포에 설치했던 해군 진해방비대를 1912년 진해로 옮겨왔어요


이어서 마산에 있던 진해만 요새사령부도 1914년 옮겨오고 19164월에는 진해요항부(鎭海要港府)까지 설치를 해요. ‘요항이란 당시 일본 해군 규정을 따르면 군항은 아니지만 그에 버금갈 정도로 군사상 중요한 항구랍니다. 이렇듯 진해는 일본 해군의 본거지 역할을 톡톡히 했어요.

 

일본 해군의 빛나는 전승지


러일전쟁에 이겨 기고만장해진 일본은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엄청난 기념탑을 세워요. 바다와 시가지가 한 눈에 내려다보이는 제황산에 34.85m 높이의 탑을 세웠어요. 친구들!! 34.85m가 얼마나 높은 지 짐작을 할 수 있나요? 족히 아파트 10층 높이는 넘을 것 같은데 어마어마하지요


그런데 지금은 남아 있지 않아요. 해방이 되면서 조선 사람들이 다 때려부수어 버렸거든요. 원한이 얼마나 사무쳤을까 그 마음은 충분히 짐작이 되지요. 그래도 그게 지금 그대로 남아 있다면 아픈 역사를 알려주는 훌륭한 증거가 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에요.(아쉽아쉽~^^::)

진해탑 전망대에서 중원로터리 등 진해 옛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모습.


일제 흔적 중에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여덟 갈래로 낸 길이 있어요. 러일전쟁승전기념탑이 사라지고 1960년대 새로 자리를 잡은 진해탑 전망대에서 내려다보면 아주 선명하게 볼 수 있어요. 여기 일대는 조선 사람들은 거주할 수 없는 일본인 전용 주거지역이었어요


그 이유가 참 거시기해요. 조선 사람들은 더러우니까 들어오면 안된다는 게 이유였거든요. 멸시와 차별이었습니다. 여기 살던 조선 사람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총칼로 다 내쫓겼던 거지요. 국가가 힘이 있어야 국민들이 잘 살 수 있는 건 예전이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라는 사실!!


북원로터리, 중원로터리, 남원로터리로 이어지는 여덟 갈래의 길을 두고 욱일승천기(旭日昇天旗)’ 모양을 하고 있다 해서 말들이 많았어요. 그런데 그런 증거는 특별하게 없어요


짐작할 수 있는 건 그 당시에는 사방팔방 뻗어나가는 이런 도로 구조가 가장 효과적인 교통망으로 세계적으로 유행을 했다는 거지요. 1870년대 완공된 프랑스 파리 신시가지도 개선문을 중심으로 열두 갈래 도로를 냈거든요. 진해탑에 올라가면 이 길을 꼭 한 번 살펴보도록!!

 

일제 침탈이 낳은 근대문화유산


중원로터리를 중심으로 주변에는 일제의 침탈을 보여주는 근대문화유산이 촘촘하게 박혀 있어요. 진해우체국은 1912년에 준공이 되어 2000년까지 역할을 했어요. 지금은 우체국이 어떤 역할을 하고 있나요? 택배, 보험, 저금 뭐 그런 기능이 많잖아요. 그런데 예전에는 이보다 아주 중요한 기능을 담당했지요

진해우체국.


지금은 휴대폰이 다 있지만 예전에는 우체국을 통하지 않으면 아무런 소식을 전달할 수가 없었어요. 공적이든 사적이든 전국과 지역의 모든 정보와 통신이 집결되고 전파되는 핵심이 우체국이었어요. 말하자면 우체국을 통해 일제가 모든 정보 통신을 장악했다 그리 생각하면 맞아요. 우체국에 그런 중요한 역사가 숨어 있었다는 것을 잘 몰랐죠~!!


팔각정 건물도 볼 수 있어요. 처음에는 조선인들의 출입을 통제 관리하던 초소로 쓰였어요. 나중에는 일본 사람들 술 마시고 춤추던 요정으로 사용되었다가 지금은 새 수양회관간판을 단 밥집으로 변했어요. 이름은 팔각정이지만 실제로 모서리를 헤아려보면 육각정이랍니다.


앞에서 북원로터리, 중원로터리, 남원로터리가 여러 갈래로 난 도로로 이어져 있다고 했지요. 그런 그림을 상상하면서 이야기를 들으면 더 실감이 날 것 같아요. 중원로터리와 남원로터리 사이에 1920~40년대 지은 2층 목조건물이 늘어서 있습니다.


일본 말로는 나가야(長屋)’ 우리말로는 장옥이라 해요. 긴 건물이라는 뜻이지요. 1층은 가게로 쓰고 2층은 주택이나 여관 같은 숙박시설로 사용했어요. 요즈음의 복합상가쯤으로 보면 맞아요. 지금도 그 모습이 허름하게 남아 있는데 1층 건물은 여전히 상가로 장사를 하고 있어요. 간혹 텔레비전에 소개되기도 하지요.

장옥. 나가야.


선학곰탕 식당도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이 되어있는 건물이랍니다. 간판에서도 알 수 있지만 지금은 곰탕집을 운영하고 있는데 맛이 깔끔하니 좋아요^^ 이 건물은 1912년 지어졌는데 진해요항부 해군병원장 관사로 쓰였어요


들어가면 신기한 옛날 물건이 단번에 눈길을 사로잡아요. 정각이 되면 여전히 댕댕울리는 괘종시계라든지 축음기·전화기 등이 오래된 건물과 더불어 문득 타임머신을 타고 들어간 듯한 느낌을 주어요. 이런 물건들의 소중함을 알고 간직해 온 주인의 안목 덕분이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 생각해 볼 것이 있어요. 일제강점기 우리가 침략을 당한 것은 부끄러운 일일까요? 아닐까요? 맞아요. 우리 스스로를 지킬 힘이 없어서 이웃나라 일본에게 주권을 빼앗겼으니 정말 처참한 노릇이지요. 그런데도 왜 일제가 이 땅을 침략하여 들이세운 건물들을 지금 남겨두고 있을까요? 어때요, 궁금하지 않나요?


김훤주


※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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