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쉽게 써본 창원의 역사 ③ 마산어시장

김훤주 2018. 5. 31.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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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산2



조세 물품 거두던 마산창


이제부터는 본격적으로 마산 이야기가 시작됩니당~ ~~!!! 앞에서 태종이 행정개편을 하면서 창원이 전면에 등장하게 되었다는 이야기 기억이 나나요? 그 이후로 미미하게 남아 있던 마산이라는 지명이 다시 화려하게 부활을 하게 되는 계기는 무엇이었을까요? 마산의 부활은 뭐니뭐니해도 조창으로부터 시작돼요.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에 친구들의 이해를 돕기 위한 알아두면 쓸데없는 이야기 하나~`!! 자동차가 움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하지요. 자동차뿐만이 아니라 사람도 먹고 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필요해요


자동차의 에너지가 가스, 기름, 전기 등이라면 사람들이 필요한 에너지는 뭘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우리 친구들 아주 근사한 답을 막 쏟아내요~건강, 도전정신, 근면, 성실~(하하하^^) 다들 도덕 시간에 졸지 않았군요!! 


그것도 틀린 건 아니지만 정답은 바로 돈!!(딩동댕) 돈이 없으면 음식도 못 사고 옷도 못 사고 그러면 움직일 수도 없고~맞죠!! 에너지는 자동차나 사람에게만 필요한 게 아니라 국가가 제대로 돌아가기 위해서도 필요해요. 이 에너지가 바로 세금이랍니다. 그러면 우리 친구들 아하~ 세금 이야기를 하려는구나 이렇게 눈치를 채요, 좋아요~^^


요즘은 세금을 돈으로 내지요. 그런데 옛날에는 돈이 아니라 곡식이나 옷감, 특산물 등 물건으로 냈어요. 만약에 돈으로 냈다면 엽전을 지게에 지고 머리에 이고 크~ 이런 풍부한 상상력이라니~^^ 지금은 인터넷으로도 쉽게 낼 수 있는데 말이에요

조창은 돈 대신 세금으로 거둬들인 그런 물건들을 보관하는 창고 이름이에요. 그런데 이 조창이 아무 곳에나 들어설 수 없었어요. 이 까닭도 생각해보면 그렇게 어렵지 않아요. 요즈음은 화물을 수송하는 수단이 철도나 고속도로 같은 것이잖아요


하지만 육로가 발달되지 못한 옛날에는 물건을 실어 나르는 데 물길이 최고였어요. 그러니 조창이 들어설 수 있는 곳은 당근 바다 근처였다 이 말씀이지요.


고려 성종 때 남쪽 해안 지대에 조창(漕倉)을 열두 군데 설치를 했어요. 그 가운데 하나인 석두창(石頭倉)이 회원=합포에 있었다는 기록이 있어요. 조선 태종 때(1403) 조창이 폐지되었다가 350년 뒤인 1760년 되살아나는데요, 이 때 마산창이 다시 설치되었지요


경남에는 사천 가산창, 밀양 삼랑창과 더불어 세 곳밖에 없었어요, 마산창에는 창원·마산뿐만이 아니라 김해·함안·칠원·진해(지금 삼진 일대웅천(지금 진해) 전역과 의령·고성 일부에서 거둔 공물이 모두 다 모였어요. 7~8개 고을에서 현물로 거둔 세금이 어마어마했을 텐데 그것을 쌓아두는 창고의 규모는 또 얼마나 컸을까요.


250년 전 창고들이 줄지어 들어서 있는 창동을 한 번 상상해 보세요. 정말 대단했을 것 같지 않나요? 지금은 마산 앞바다가 많이 매립이 되어 창동에서 바다까지 거리가 떨어져 있지만 예전에는 그렇지 않았어요지금 어시장이 있는 자리까지 옛날에는 바다였어요


그러니 창동 언덕배기에서 엎어지면 코 닿을 만큼 가까운 곳에 바다가 있어서 창고에서 배로 배에서 창고로 곧바로 물건을 실어 나르고 짐을 부릴 수 있었던 거지요. 지금의 창동(倉洞)이라는 동네 이름이 바로 마산창 조창에서 왔다는 것을 눈치 챈 친구들이 있다면 최고~~!!!


친구들은 조용하고 한적한 곳에서 살고 싶나요? 사람들이 많이 모여드는 도시에서 살고 싶나요? 물론 개취(개인의 취향^^)이기는 하겠지만 젊을수록 사람이 많은 곳에서 살고 싶어 하지요. 왜 그럴까요


사람이 많이 모여들수록 그만큼 만들어내는 에너지도 왕성해진다고 그래요. 젊은 사람들이 다 서울이나 대도시로 가고 싶어 하는 것도 과학적으로 그런 근거가 있다고 해요


창동도 조창이 생기면서 여기저기서 모여드는 사람들이 만들어내는 에너지가 굉장했을 것 같지 않나요. 창동은 조창을 배경으로 각지에서 모여드는 사람들 덕분에 힘이 넘치는 도시 마산으로 점차 변모를 하게 된답니다.

 

오로지 바르게 하라, 유정당


마산 조창 터 표지석.

이제 조창 이야기 마무리 단계로 접어듭니당~(흥미진진하지요~~^^) 마산창 중심 건물 이름이 유정당(唯正堂)이랍니다


우리 친구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는 말을 아시나요? 유정당 이야기를 하다가 또 무슨 뜬금없이 견물생심이냐구요? ~뜬금없지 않아요~!! ‘좋은 물건을 보면 욕심이 난다말하자면 물건을 보면 욕심이 나는 건 사람들이 가진 본능이다 뭐 그런 뜻이 담겨 있는 옛말이지요


솔직히 본능이 다 나쁜 건 아니잖아요. 문제는 그 본능을 어떻게 다스리느냐 하는 것이 그 사람의 인격이고 인품이라 할 수 있지요. 이런~~!! 조창 이야기를 하다가 인격 인품까지 흘러왔군요~


세금으로 거두어들인 산더미같이 쌓인 물건들을 보면서 군침을 흘리는 사람들이 많지 않았겠어요? 이것을 엉뚱하게 새어나가지 않고 오로지() 올바르게() 사용하라는 뜻을 담아 지은 이름이 바로 유정당이지요


이 이름을 바탕으로 뒤집어 생각을 해보면 세금 창고에서 얼마나 부정부패가 많았을까 그렇게 짐작을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 같아요.

 

왕년에 더 잘나간 마산어시장


조창이 들어서면서 마산에는 사람과 물산이 모이게 되고 자연스럽게 시장까지 만들어지게 돼요. 전국적으로 이름을 떨치고 있는 마산어시장이 이 때부터 모양을 갖추기 시작합니다


마산어시장이 전국적으로 유명한지 몰랐다구요? 이런이런~!! 얼마 전에 서울에 살고 있는 사람과 함께 어시장을 들렀는데 입을 다물지 못하더라구요. 서울에 있는 노량진수산시장에 결코 처지지 않는다구요. 그런 이야기를 들으면서 괜히 으쓱해졌어요


어시장 주변으로 수남시장, 창동통합상가, 부림시장을 같이 끼고 있어서 훨씬 풍성한 시장을 형성하고 있지요

조창 터 표지석이 있는 스탠다드차타드제일은행 마산지점에서 어시장 쪽으로 내려오면 보입니다.


마산어시장 규모가 얼마나 컸는지는 1800년대 초에 편찬된 <만기요람>이라는 책에서도 확인할 수 있어요. 임금이 나라를 다스리기 위해 다루어야 하는 온갖 중요한 일들에 대해 핵심 요점만 골라 정리해 놓은 책인데요, 그 속에 경상도에서 가장 큰 장시(場市)로 마산장을 꼽고 있답니다


지금은 포항의 죽도시장이라든지 대구의 서문·남문시장, 부산의 자갈치·국제시장이 더 크고 더 유명하지만 그때는 마산어시장한테 한참 미치지 못했다는 얘기입니다. 왕년에 한 가닥 했다 뭐 그런 이야기 하는 게 아니냐구요~~(크 맞습니당~^^::)


이왕 역사적인 증거를 꺼내놓았으니 한 가지 더 보태볼게요. 대동여지도를 만든 김정호가 쓴 지리책 <대동지지>(1864) ‘창원도호부항목에는 조창과 더불어 반룡산(盤龍山) 아래 바닷가의 반상창(盤上倉)과 합포 바닷가의 해창(海倉)도 있다고 기록을 하고 있어요


마산어시장이 활성화되는 데는 조창뿐만이 아니라 같은 권역에 있었던 이런 창고들이 한 몫 하지 않았을까 짐작을 할 수 있는 거지요. 당시만 해도 창원도호부에 딸린 한적하고 조그마한 포구(浦口)였던 마산포(합포)가 지금처럼 마산을 커다란 도시로 성장하게 하는 데에는 이처럼 크고 작은 창고들이 보이지 않는 역할을 한 것이지요.

 

마산 개항과 도시화


조창으로 기반을 마련한 마산의 성장은 1899년 개항이 되면서 더욱 빨라지게 돼요. 우리 스스로 한 개항이었다면 정말 좋았을 텐데 그렇지는 않아요. 일본의 강요로 말미암은 굴욕적인 조치였으니까요


그렇다 하더라도 마산이 거듭나는 전환점이 되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에요. 동전의 양면이라는 표현이 맞을까 싶기는 한데. 어쨌든 결과적으로는 얻는 것도 있었지만 또 그만큼의 대가도 치러야 했어요, 일본과 러시아 같은 세계열강의 제국주의 다툼이 마산에서 벌어졌으니까요.


처음 마산에 왔을 때 사람들이 신마산 구마산 하는데 그게 무슨 뜻인지 잘 몰랐어요. 그렇게 말하니까 아무 생각 없이 따라서 그렇게 말했거든요. 친구들도 대부분 그럴 것 같은데요. 이번 기회에 신마산 구마산에 얽힌 역사를 확실히 배우도록 해봐요.(집중집중~~!!) 


앞에서 1899년 일본에게 강제로 개항이 됐다고 했잖아요. 이때 생겨난 게 바로 구마산 신마산이라 하네요. 그러니까 우리 조선 사람들이 옛적부터 살고 있었던 기존 시가지를 구마산이라 하고, 개항되면서 외국 사람과 외국 기관이 들어오게 되면서 그들이 자리를 잡은 곳을 신마산이라고 구분해서 부르게 되었지요.

신마산과 구마산.


신마산에는 러시아를 비롯한 여러 나라 영사관이 들어서고 공동 조계(租界)도 만들어졌어요. ~!! 어려운 말 등장~ 조계가 뭐예요~? 네네~설명 들어갑니다. 개항이 되면서 신마산에서 세계열강들끼리 다툼이 벌어졌다고 했지요. 그 제국주의 국가들이 조선 정부로부터 빌린다는 명분을 앞세워 빼앗다시피 가져간 땅을 조계라고 해요


그들의 횡포가 여기서 끝이 났겠어요? 친구들도 이제 그 정도 눈치는 있지요.!! 간단하게 말해 가난하고 힘없는 동네에 힘센 조폭들이 들어와서 지들끼리 온갖 횡포를 부렸다 그렇게 생각하면 돼요. 이 마당에 우리나라 법이 무슨 소용이 있었을라구요. 경찰과 행정관리는 물론 세금도 직접 다 거두어 가버렸으니까요. 남의 동네에 와서 북 치고 장구 치고 다 해먹은 거죠~~!!


이 장면을 조금 자세히 설명을 하면 이렇답니다. 먼저 러시아가 나서서 1900년 마산항 일부를 손아귀에 넣게 됩니다. 중국에 있는 여순항과 러시아의 극동(두만강 북쪽)에 있는 항구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거점으로 삼기 위해서지요


러시아에게 선수를 빼앗긴 일본은 잔머리를 굴립니다. 꿩 대신 닭이라고 마산항 바깥에 살짝 벗어나 있던 진해현(지금 삼진 지역 일대)을 노립니다. 러시아 군대에 맞서는 군항으로 삼기 위해서지요. 이런 가운데 1904~05년 일본과 러시아는 드디어 맞짱을 뜹니다. 이 전쟁에서 누가 승리를 할까요? 일본요~딩동댕~~!!!

신마산인 월영동에 남은 적산가옥. 냉면으로 유명한 가게 함흥집 근처에 있습니다.

러시아를 몰아내고 마산항을 장악한 후 일본이 한 일이 무엇이었을까요? 친구들!! 앞에서 지명에 대한 역사를 살펴본 것 기억나지요?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은 웅천을 진해로 바꾸고 그들의 제국주의 야망을 가열차게 불태우기 시작했어요


1899년 강제 개항이 될 때는 마산항을 관리하는 행정기관이 창원감리서였지만 1905년 러일전쟁 이후 창원의 지명이 힘을 잃어가기 시작해요. 을사늑약이 체결된 뒤에는 이 창원감리서가 없어지는 대신 마산 이사청(理事廳)이 설치가 되었지요.

 

신마산에 남은 일제 적산가옥


개항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신마산 일대는 완전 일본식 신도시로 변하게 되었어요. 기와집·초가집 대신 다다미가 깔린 목조가옥이 자리를 잡았지요. 언덕배기에는 일본 천황을 떠받드는 신사를 세웠어요


그런데 신사를 언덕에 세운 이유가 있다네요. 사람들이 우러러 떠받들도록 하기 위해서라 뭐라나 참 내~~!!! 신사가 들어섰던 언덕배기에 올라가면 일본식 돌담이 그때의 흔적으로 남아 있어요


그러고 보면 근처에 자리 잡고 있는 마산제일여고 교문이 신사를 닮았다는 것은 우연한 일은 아니지요. 혹시 지나갈 일이 있으면 제일여고 교문을 꼭 한 번 살펴보도록~!!


일본 사람들은 행정·경찰 건물을 러시아 양식으로 지었어요. 당시는 그게 유행이었거든요. 마산헌병분견대가 그 때 지어진 러시아식 건물의 대표선수랍니다

헌병분견대 건물. 분견대에서 분견은 나누어서 보낸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파출소 정도로 생각하면 틀리지 않습니다.

헌병분견대라~이름도 좀 거시기한데 용도는 더 그렇지요. 독립운동가들을 고문하던 곳이었거든요. 1945년 해방된 이후에는 군사독재 시절 보안사령부라는 군대 건물로도 쓰였답니다. 해방을 전후로 그 때나 이 때나 좋은 장소로 사용된 곳이 아니었던 것은 확실하군요.


그렇다면 일본식 신도시로 변했던 신마산에 일본의 흔적이 지금은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이리저리 돌아다니다보면 적산가옥을 쉽사리 볼 수가 있지요. 적산가옥은 왜적()이 생산()한 집(家屋)이라는 뜻이랍니다


그런데 제대로 관리를 하지 않아 점점 사라져가고 있어요. 옛날 일제식민지배를 기억하면서 역사의 거울로 삼기 위해서라도 이런 집들은 가능한 그대로 남겨두는 것이 좋을 것 같은데 말이에요


전라북도 군산이나 경상북도 포항의 구룡포에 가면 이런 적산가옥이나 일제가 남긴 흔적을 보존·복원해서 관광자원으로 삼고 있어요. 그런 점에서 일본식 신도시였던 신마산의 모습을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너무 많이 아쉬워요.


김훤주


※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 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 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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