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본 곳

천리포수목원은 아름다운 자연이 아니다

김훤주 2018. 4. 7. 16: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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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 오는 봄날 천리포수목원을 다녀왔다. 날씨 때문에 찾는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그렇지 않았다. 붐비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통 없지는 않았다. 날씨가 맑은 봄날 주말이면 아마 미어터지지 않을까 짐작이 되었다


어디를 가나 다 좋았다. 나무나 풀이 잘 어울려 있었다. 나무나 풀 이름은 잘 모르지만 스윽 둘러보는데 어색하거나 지나치거나 모자란다는 느낌을 주는 데는 눈에 띄지 않다. 조화롭지 못한 구석이 적어도 내 눈에는 보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아마 꽃이 피지 않았어도 멋질 것 같았다. 실제로 바위를 주제로 삼고 있는 한 영역은 꽃과는 전혀 무관했지만 아주 멋졌다. 바닥을 기는 나무들과 이끼 등으로 구성했는데 거기 생물과 무생물의 어우러짐과 그 특징들의 드러남이 색다르고 신선했다

설립자 민병갈이 본인 집무실로 썼던 공간에서 보이는 풍경.

찾는 사람들에게 숙박용으로 빌려주는 집들도 드문드문 있었다. 저마다 특징적인 나무를 한 그루 정도씩 끌어안고 있었다. 하루밤 빌려서는 첫 날에는 뜻 맞는 이들과 더불어 술 한 잔 하면서 얘기 나누고 이튿날에는 아침부터 숲과 바닷가를 거닐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름답고 마음에 드는 자연이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거기 있는 것은 자연이 아니었다. 천리포수목원을 처음 만든 사람이 민병갈이라 한다. 이번에 알게 되었는데 독일계 미국인으로 1962년 한국에 귀화했다


원래는 칼 페리스 밀러(Carl Ferris Miller)였다. 민병갈에서 마지막 은 원래 이름 첫 자에서 왔음이 분명하다. 나머지 두 자는 당시 자기가 고문으로 근무하던 한국은행 총재의 성명 민병두에서 가져왔다고 적혀 있다그런 때문인지 부유한 금융인이라 소개되어 있었다


민병갈은 자기가 가진 모든 것을 천리포수목원에 쏟아부었다. 부유한 재산은 잘 쓰면 축복이 되지만 그렇지 못하면 때로는 저주가 된다. 삼성의 이재용과 이건희 부자를 보면서 이런 생각을 더욱 하게 되었다. 어쨌거나 민병갈에게는 그 재화가 축복이었다


천리포수목원을 위하여 18만평인가에 이르는 토지를 사들이고 수목을 장만하는 데 아낌없이 썼으리라. 재화를 쓰면서 즐거웠고 수목을 가꾸면서 행복했으리라. 거기다가 민병갈은 결혼도 하지 않았으며 혈육도 두지 않았다. 그런 때문인지 이 수목원을 한국인에게 아무 조건 없이 넘겨주었다. 마지막에는 자기가 갖고 있던 현금까지 수목원에 기증했다고 한다


결과적으로 말하자면 재화가 민병갈에게만 축복을 내린 것은 아니었다. 사람이 한 평생 한 일에 매달려 무엇인가 이룩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더 어려운 일은 그렇게 이룩한 바가 있다 해도 그것을 자기 앞으로 돌리지 않는 것이다

수목원 카페에서 창밖으로 내다보는 풍경.


자기 가치관을 따라 조건에 맞추어 열심히 살았다면 그것만으로도 잘 살고 가는 일생이다. 나중에 그 성과를 자기 앞에 바치거나 남기지 않는다면 더욱더 잘 산 일생이다. 우쭐거림도 없고 군더더기도 없는 삶이다. 물심양면으로 욕심이 없다. 


나는 앞으로 천리포수목원이라 쓰고 아름다운 사람 민병갈이라고 읽겠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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