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일제강점기 경전선이 섬진강 못 넘은 까닭

김훤주 2018. 1. 3. 14: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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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제대로 본 삼랑진역 급수탑 


20171216일 밀양 삼랑진에 가서 삼랑진역 급수탑을 보았다. 아침에 차가운 물로 말갛게 씻은 듯한 모습이었다. 함석으로 만든 지붕은 가장자리밖에 보이지 않았지만 새로 올렸음이 분명했다. 바로 아래 목재 또한 아직 때가 전혀 묻지 않은 새것이었다


몸통을 휘감은 담쟁이덩굴도 알맞게 정돈되어 있었다. 지난 가을만 해도 그 가지와 잎에 뒤덮여 있었다. 잎은 겨울이라 지고 없었다. 가지도 누가 다듬었는지 적당하게 잘려 있었다. 덕분에 급수탑 전체 모습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몸통이 아래는 콘크리트고 위는 양철이었다. 양철은 골판지처럼 꼬불꼬불 세로로 홈이 파여 있었다. 몸통 아래에서 2m 정도 되는 높이에 창이 있었다


아래위 창틀은 보통 콘크리트와 재질이 달라 보였다. 시멘트로 이갤 때 모래뿐 아니라 자잘하게 깬 돌도 같이 넣은 것 같았다. 전체적으로 단정한 모습이었다. 그래서인지 좀 밋밋하기는 해도 허리가 늘씬하고 경주 첨성대를 닮은 듯이 보이는 착시 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물을 담아 놓았다가 기차에 공급하는 급수탑은 기차가 석탄을 때서 동력으로 삼던 시절 필요한 시설이었다. 석탄이 타면서 내는 화력으로 엔진을 움직이려면 물이 있어야 했다. 석탄으로 물을 끓여서 수증기로 만들고 수증기가 팽창하면서 엔진을 돌리는 원리였다. 동력이 석탄에서 석유로, 다시 전기로 바뀌면서 더 이상 쓰이지 않게 되었다


2. 경전선의 기점 삼랑진역 


삼랑진역은 부산~서울 경부선에 놓여 있다. 경부선은 19041227일 완공되어 190511일 영업을 시작하였다. 앞서 부산 초량~구포 준공이 190210월이고 구포~밀양 준공이 190312월이다. 이를 보면 삼랑진역은 190210~190312월에 들어섰지 싶다


삼랑진역은 경전선(慶全線)의 시작점이기도 하다물론 원래부터 경전선이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부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경전선을 생각하고 철도를 놓은 것은 아니라는 얘기다. 


삼랑진역을 중심으로 보면 그 시작은 1905526일 개통된 마산포선이다당시 마산포는 지금 마산어시장이 있는 어귀 남성동 바닷가에 있었다. 19042월 러일전쟁을 일으킨 일본은 당시 마산포를 강점하고 군항으로 쓰고 있었다. 그해 가을 철도 마산포선 개설을 서두른 까닭이 여기에 있었다


게다가 제정(帝政) 러시아는 같은 해 1015일 해군 주력 발틱함대를 리예파야(발트해 연안에 있는 한 도시) 카로스타 군항에서 우리나라 동해로 출격시켰다. 일본은 마산포선 철도를 하루라도 일찍 부설할 절박한 사유가 있었던 것이다


일제는 1905525일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나무다리였다고 한다)를 놓자마자 이튿날 바로 개통했다. 병력과 군수물자가 오가는 군사 전용이었다


3. 마산포선과 진해선 


공교롭게도 일본 해군은 바로 하루 뒤 러시아 발틱함대를 꺾는 대승을 거두었다. 세상을 깜짝 놀라게 했던 대마도해전 승리가 이날 일어났다


진해만 가덕수로에 숨어 있던 일본 해군은 527일 새벽 445분 대마도 동북쪽으로 나아갔다. 이어 남서진하여 대마도 동쪽으로 들어오는 발틱함대를 격파했다


마산포선은 이렇게 군용 철도로 태어났지만 그 성격이 오래 유지되지는 않았다. 190595일 일본의 러시아에 대한 승리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인하는 포츠머스조약이 성립되었다


마산포선은 얼마 지나지 않은 111일 민간 인간과 화물을 태우고 싣는 상업노선으로 바뀌었다. 이처럼 경전선의 시작은 일제가 일으킨 러일전쟁에 있었던 셈이다


일제는 그 뒤 마산을 떠나 바로 옆 진해로 옮겨가 해군기지를 건설하였다. 지금 진해에 일제가 군항 건설을 시작한 시점은 1909년이고 마산포에 있던 진해만요새사령부를 진해로 옮긴 것은 191411월이었다


그러므로 지금 사람들 짐작과 달리 진해선은 1905년 어름이 아니라 그 뒤에 만들어지게 되었다. 진해선은 19211010일 착공되어 19261111일 완공되었다

2014년 9월에 찍은 사진.


4. 1923년 설치된 삼랑진역급수탑 


옆에 표지판을 보니 삼랑진역 급수탑은 1923년에 지어졌다. 경전선 개설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 일제가 전라도와 경상도를 잇는 철도를 놓기로 한 시점은 1918713일로 확인된다. 실제 공사가 시작된 때는 19226월이다


개통은 마산에서 함안 군북까지는 1923121일이고 진주까지는 1925615일이다. 그러니까 1923년은 삼랑진역에서 갈라져 서쪽 전라도를 향하여 나가는 경전선의 길이가 길어진 시기가 된다


이렇게 길어지기 전에는 경부선 대구나 부산에서 급수하면 그 한 번만으로도 마산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었나 보다. 그러다 노선이 함안 군북까지로 늘어나면서 삼랑진역에서 한 번 더 추가 급수를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쪽으로 사정이 바뀌지 않았을까


(한편 전라도쪽 경전선 건설은 이랬다. 송정리~광주~보성~순천~여수 구간은 1921413일 착공되어 우여곡절 끝에 19301220일 개통되었다. 대전에서 목포까지 이어지는 호남선은 1914년에 완공되어 있었고.) 


5. 경전선이 섬진강을 넘지 못한 까닭 


경상도쪽 삼랑진~진주와 전라도쪽 송정리~여수는 이렇게 개통이 되었다. 하지만 여수에서 진주까지는 개통이 되지 않았다. 이렇게 경상도와 전라도가 연결되지 않은 상태는 일제가 조선에서 물러날 때까지 그대로였다


왜 이렇게 되었을까? 일제강점 당시 철도는 식민지 내륙 수탈의 가장 강력한 도구였다. 수탈할 만한 물산이 있으면 철도를 놓았고 수탈할 대상이 없으면 철도를 놓지 않았다. 많지도 적지도 않고 어정쩡하면 투입 대비 산출 계산을 해서 유리한 쪽으로 했다


일제에게는 전쟁과 수탈이 가장 중요한 목적이었다. 이를테면 조선 사람과 조선 화물의 편의는 일제 철도 개설의 목적이 될 수 없었다전라도쪽은 모르겠고 경상도쪽을 보면 이렇다. 마산은 군항을 끼고 있었다. 함안 군북은 당시 광산이 있었다. 진주는 예나 이제나 가지가지 물산이 풍부한 고장이다


삼랑진역급수탑은 일제의 수탈이 본격 확장되고 심화되는 상징이라 할 수 있다경전선이 진주를 지나 서쪽 전라도로 가지 않고 순천을 지나 동쪽 경상도로 오지 않았다는 것은 일제가 보기에 그 일대(너비 80km)에는 욕심낼 만큼 탐스러운 수탈 대상이 없었다는 얘기가 될 수 있다


7. 해방 23년만에 완성된 경전선 


1930년대 들면 일제한테 물심양면으로 여유가 없었다는 사정도 겹친다. 일제는 1931년 만주사변으로 만주를 장악했지만 곧바로 중국의 끈질긴 장기 항전과 맞닥뜨렸다. 이어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키면서 1945년 패망하기까지 크고 깊은 수렁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갔다


경전선은 해방이 되고 나서도 20년을 넘게 더 기다린 다음에나 완성되었다. 196827일에야 섬진철교 위를 기차가 처음 달릴 수 있었다. 섬진철교는 지금도 섬진강을 가로지르며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고 있다


하동군청에 따르면 당시 경향신문은 오랜 꿈 실현-산업선으로 지리산 개발도 눈앞에 다가서제목 아래 이렇게 보도했다


대전을 거치지 않고 영남과 호남을 남해안을 따라 철도로 직결한다는 점에서 일제시대부터 꾸어온 꿈이 이제야 실현됐다.”, “산업선으로서의 효과가 커 이 찻길을 통해 진해비료공장의 비료를 호남의 곡창으로 보내고, 반대로 호남의 양곡이 영남으로 실려 나갈수 있다.” 


삼랑진역 급수탑을 들여다보니 경전선의 역사가 읽혔다. 

경전선 역사를 따라가니 삼랑진역급수탑이 거기 세워지기까지 사연이 들렸다. 

일제강점기 식민지 지배와 수탈을 당한 백성들의 아우성이 있었다. 

철도 부설 또한 마찬가지였다고. 조선 백성들이 헐값에 거의 강제로 동원되었다는 얘기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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