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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132

누가 김주열과 그 어머니를 모욕하는가?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회장 백남해·남원대표 박영철)가 발끈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이사장 함세웅)가 발행하는 월간지 3월호에 실린 기사 때문이다. 르포작가 김순천씨가 쓴 '촛불항쟁을 닮은 시민혁명의 첫 효시 마산 3·15의거 현장을 찾아서'라는 글의 한 구절이 문제였다. 이 글은 4·19혁명의 도화선이 됐던 김주열 열사에 대해 "이모할머니 댁에서 시위를 구경하러 나왔다가 변을 당했던 것"이라고 되어 있다. 이 표현을 따져보면 김주열 열사가 불의에 항거하여 시위를 벌이다 희생당한 게 아니라는 말로 해석된다. 문제는 "구경하러 나왔다"는 표현이 역사적 사실로 증명된 게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과거 독재정권의 서슬이 시퍼렇던 시절에는 희생자의 무고함과 억울함을 일부러 강조하기 위해 이런 표현을 썼을 수도 있다..

고은 시집 '만인보'에 역사적 오류가 있다

요즘 마산은 흔히 3·15의거와 4·19혁명이라 부르는 1960년 3·4월혁명 49주년 기념행사가 한창입니다. 어제(11일)는 혁명의 도화선이 되었던 김주열 열사의 시신이 마산앞바다에서 최루탄이 눈에 박힌 모습으로 떠오른 날이었습니다. 이 날을 기념해 김주열열사추모사업회는 오전에 시신인양지에서 열사의 고향이자 모교인 남원 금지중학교 교사와 학생, 그리고 열사가 입학식도 치르지 못하고 희생된 마산상고(현 용마고) 학생들이 참석한 가운데 49주기 추모식을 열었습니다. 그리고 오후에는 김주열 열사에 대한 학술토론회를 열었는데요. 여기서 얼마전 정운현 전 오마이뉴스 편집국장과 제가 번갈아 포스팅했던 친일헌병보 출신으로 대한민국 경찰이 되어 김주열 열사를 살해하고 시신을 유기한 박종표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김주열 살해 유기 원흉은 친일헌병 박종표였다

4·19혁명 열사 김주열을 아시나요? 김주열은 전북 남원 출신으로 1960년 경남 마산의 마산상고에 진학했다가 이승만 정권의 3·15부정선거에 항거하다 숨진 3·15의 화신이며 4·19의 횃불이었습니다. 그런데, 어제(18일) 블로거 정운현 선배가 '친일헌병들은 애국지사를 어떻게 '고문'했나'라는 글을 올렸는데, 거기에 등장한 일제 헌병보의 이름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바로 신상묵과 박종표였던 것입니다. 신상묵이야 신기남 전 의원의 부친으로 잘 알려져 있는 자이지만, 박종표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하지만 박종표는 3·15의거와 김주열 열사를 기억하는 사람들로서는 잊을래야 잊을 수 없는 원흉입니다. 그는 바로 열 여섯 살의 김주열 학생에게 직격최루탄을 발사해 눈을 관통하게 함으로써 살해했..

59년 전 아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할머니

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어 평생 혼자 살아온 83세 여성노인에게 가장 아쉽고 절실한 것은 뭘까? 황점순(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할머니에게 그것은 '혈육'이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적군도 아닌 아군에 의해 남편 이용순과 아들 상섭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 24세, 아들은 고작 2세였다. 남편은 그해 7월 15일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민간인학살 현장에서 잃고 말았다. 국가가 남편의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해준 것은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2009년 2월말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서 '이용순(李鏞淳)'의 이름을 찾아줬던 것이다. 물론 국가가 ..

학살의 현장에 피어난 화려한 매화

매화를 구경하기 전에 먼저 아래 이름과 나이부터 한 번 살펴보시죠. ◇현장 사망자(65명) △이석순(남·35) △이석기(남·55) △이봉순(여·19) △이복희(여·14) △이원순(남·26) △이봉연(여·16) △이기갑(남·77) △이갑이(남·46) △이상정(남·14) △이상연(여·9) △이상말(여·6) △이상팔(남·3) △이위이(여·39) △이상열(남·3) △이시운(여·67) △이상철(남·20) △이상철의 동생(남·2·출생신고 안됨) △이은갑의 처 △이은갑의 아들(10) △이기석(남·63) △이기수(남·72) △이남이(여·71) △이일순의 처 △이정두(여·13) △이상응(남·4) △이기필(남·60) △김직래(여·61) △이생현(남·71) △하병이(여·51) △이상섭(남·2) △이성현(남·59) △황수남(..

민간인학살 유해, 발굴해도 갈 곳이 없다

마산·진주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학살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한 것을 계기로 '경남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해안치시설' 설치가 시급하다는 요구가 나오고 있다. 지난 2004년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 163구가 아직도 갈 곳을 찾지 못해 경남대 예술관 밑 공터의 컨테이너 속에 있는데다, 올해 발굴 예정인 진주지역 민간인 희생자 유해도 마땅히 보관할 곳이 없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 위원장 안병욱)은 마산·진주형무소 재소자 희생사건에 대한 '진실규명' 결정서에서 이례적으로 "국가와 지방자치단체는 마산 진전면 여양리에서 발굴된 유해 등 유해안치장소 설치등에 대한 지원방안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하다"는 권고사항을 명기했다. 진실위 관계자는 "과거사정리기본법에 국..

형무소 재소자 학살, 미군도 승인했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경남지역(부산 포함)에서 벌어진 민간인학살사건의 실질적인 지휘자는 '백두산 호랑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김종원 계엄사령관이었으며, 이 과정에서 당시 미 군사고문단이 형무소 재소자 학살을 사전에 승인했거나 최소한 묵인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당시 마산지구 계엄사령부는 재소자들을 요식적인 군법회의에 회부해 처형한 후, 문서를 조작해 계엄사령관의 승인을 받은 것처럼 조작한 사실도 드러났다. 심지어 부산·마산·진주형무소에서는 잡아들인 보도연맹원들을 구금할 공간이 부족하자, 강도·절도 등 일반사범들을 아예 석방시켜버린 사실도 밝혀졌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위)는 이같은 내용을 담은 결정문과 보고서를 유족들에게 전달했다. ◇일반사범 무더기 가석방 = 이 보고서에 따르면 마산형무..

민간인학살 유족 황점순 할머니의 눈물

마산과 진주·부산형무소 재소자와 보도연맹원 등 수천여 명이 한국전쟁 발발 직후 국군과 경찰에 의해 집단학살된 사실을 국가기관이 공식 인정했습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가 공식 보도자료를 발표한 것은 오늘(2일) 오전이지만, 사실 저는 유족을 통해 미리 결정통지문을 입수해 갖고 있었습니다. 오늘 발표가 나온 날, 제가 아는 희생자 유족 가운데 가장 피해가 컸을 뿐 아니라 그날 이후 60년 가까이 핏줄 한 명 없이 평생 홀몸으로 살아온 황점순 할머니댁을 구자환 기자와 함께 찾았습니다. 뚜렷한 취재계획은 없이 그냥 할머니를 뵙고 싶었습니다. 황점순(83) 할머니는 제가 1999년 10월, 처음으로 마산 곡안리 미군에 의한 민간인학살사건과 보도연맹 사건을 보도할 때 만난 후 지금까지 10년간 교류해..

민간인학살 유족 사찰 '극비문서' 있었다

김해경찰서, 작성해 유족 감시 확인 경찰이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보도연맹원 뿐 아니라 그들의 유족에 대해서도 일일이 성향 분석을 하면서 감시·관리해왔다는 사실이 '극비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김해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272명에게 결정 통지한 '진실규명 결정문'에 따르면, 경찰은 1950년 학살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이른바 를 작성해 유족들을 감시해왔다. 김해경찰서 정보과가 1972년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는 '6·25 당시 처형자 및 동 연고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여기에는 1950년 살해된 201명의 성명·본적·주소·생년월일·성별은 물론 연고자(유족) 간의 관계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특히 연고자란에도 성명·본적·주소·직업·생..

김해에 한국판 '쉰들러'가 있었다

보도연맹원 학살 직전 100여 명 목숨 구한 한림면장 최근 진실규명과 명예회복 결정이 이뤄진 김해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 당시 유독 한림면에서만 희생자가 거의 없었던 배경에는 한국판 '쉰들러'가 있었기 때문으로 밝혀졌다. 쉰들러는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무렵 독일군이 학살하려던 유태인 1200여 명을 구해낸 독일의 기업가로 1993년 스티븐 스필버그 감독의 영화 의 실존인물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와 주민들에 따르면 김해의 쉰들러는 1950년 한림면(당시 이북면)의 최대성 면장(1906년생)이었다. 해방 직후인 1945년 10월부터 면장을 맡고 있던 최대성씨는 한국전쟁을 거쳐 1956년까지 면장에 재임했다. 전쟁 발발 직후인 1950년 8월 3일 김해경찰서 한림지서는 비상소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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