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59년 전 아들의 죽음을 믿지 못하는 할머니

기록하는 사람 2009. 3. 9. 18: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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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대 초반에 청상과부가 되어 평생 혼자 살아온 83세 여성노인에게 가장 아쉽고 절실한 것은 뭘까? 황점순(마산시 진전면 곡안리) 할머니에게 그것은 '혈육'이었다.

그녀는 한국전쟁이 일어난 1950년 적군도 아닌 아군에 의해 남편 이용순과 아들 상섭을 잃었다. 당시 남편의 나이 24세, 아들은 고작 2세였다. 남편은 그해 7월 15일 보도연맹원이라는 이유로 경찰에 불려간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고, 상섭이는 8월 11일 미군의 곡안리 재실 민간인학살 현장에서 잃고 말았다.

국가가 남편의 사망 사실을 공식 확인해준 것은 그로부터 59년이 지난 2009년 2월말이었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위원장 안병욱)가 당시의 민간인 희생자 명단에서 '이용순(李鏞淳)'의 이름을 찾아줬던 것이다.

국가가 남편의 죽음을 확인해주는 데에는 59년이 걸렸다.


물론 국가가 알려주진 않았어도 그녀는 이전부터 남편의 사망을 알고 있었다. 당시 함께 불려간 보도연맹원들이 모두 마산시 구산면 앞바다에서 국군에 의해 수장 학살됐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몇 년 후 종갓집 며느리였던 그녀는 열 다섯 개의 제사에 남편의 제사까지 추가했다. 그래도 처음 5~6년동안은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에도 벌떡 일어나 방문을 열어보곤 했다. 실날같은 희망이나마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남편은 국군에게 잃고, 아들은 미군에게 잃은 황점순 할머니

대한민국이 원망스럽기도 하련만, 뒤늦게라도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확인해준 게 오히려 고맙단다.

"그 오래된 일을 찾아내느라 얼마나 고생했을까? 찾아준 조사관에게 술이라도 한 잔 사주고 싶어."

하지만 그녀가 아직도 믿을 수 없는, 그래서 목에 가시처럼 걸려 있는 일이 하나 남아 있다. 아들 상섭이의 죽음이다. 그녀는 지금도 상섭이가 지구촌 어디에선가 살아있을 거라는 기대를 버리지 못하고 있다.

59년 전 83명이 미군의 총격에 죽은 곡안리 성주 이씨 재실 학살현장에서 그녀는 두 살 난 아들을 안고 뒷산을 향해 정신없이 뛰었다.

재실 뒤편 콩밭을 가로질러 내닫는 순간 옆에서 함께 뛰던 시어머니가 '퍽'하는 소리와 함께 총탄을 맞고 쓰러졌다. 곧이어 그녀도 다리와 엉덩이에 총을 맞고 쓰러졌다. 가슴과 팔, 목에도 총알과 파편을 맞아 피가 흐르고 있었다. 그 와중에도 아이를 살폈다. 아이가 울지 않았다. 포대기를 풀어보니 겨드랑이쪽에 그녀의 몸에서 흐른 듯한 피가 묻어있을 뿐 총을 맞은 것 같지는 않았다.


"남자아이는 죽으면 고추가 위로 올라간다는 말이 퍼뜩 생각났어. 그래서 급히 고추를 들춰보니 정말 그렇게 돼 있능기라. 눈물도 안나왔어. 그만 벌렁 누워버렸는데 그때부터 목이 말라 환장을 하겠더라고."

곡안리 학살이 벌어졌던 성주 이씨 재실. 미군은 앞에 보이는 대밭에 기관총을 설치해놓고 쐈다.


눈앞에 보이는 콩잎을 따서 마구 씹었으나 풋내만 날 뿐 갈증은 해소되지 않았다. 얼마나 지났을까. 누운 채로 잠시 정신을 잃었던 것 같았다. 해거름녁에 총격이 잠잠해지더니 생존자들을 부르는 소리가 났다. 미군들이 총을 들고 마치 포로를 대하듯 성한 사람과 부상자를 가려냈다. 걷지 못하는 사람은 트럭에 타라고 했다. 그러나 그녀는 미군트럭을 타지 않았다. 아이 시신(?)을 콩잎으로 덮어놓고 친정마을(진전면 임곡마을)까지 걸었다.

친정 가족의 도움으로 마산을 거쳐 부산 국군병원에서 가까스로 목숨을 건진 그녀는 약 2개월 후 마을로 돌아와 상섭의 시신을 찾아나섰다. 그때까지 사망자들의 시신은 현장에 부패된 상태로 널부러져 있었다. 심지어 만삭의 임산부 상태에서 죽은 이귀득(당시 31세)의 시신 옆에는 아기가 자연분만된 채 새까맣게 말라죽어 있었다.

학살현장에서 감쪽같이 사라진 아들의 시신

그런데, 유독 상섭의 시신만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 때 죽은 10세 이하 아이들 16명의 시신은 모두 수습했지만, 상섭이는 끝내 찾을 수 없었다. 자신이 콩잎으로 덮어놓기까지 했던 아이가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인가? 귀신이 곡할 노릇이었다.

"아마, 지나가던 미군이 아이를 데려갔을지도 몰라. 나중에 아이가 깨어나 울고 있는 걸 보고 그랬는지도 모르지. 만약 그랬다면 미국에서라도 아직 살아있을거야. 그때 안 죽었던 게 확실해."

재실 뒷산. 당시 재실 뒤 콩밭으로 뛰던 중 총을 맞고 쓰러졌다.


그녀는 59년이 지난 지금도 이 말을 하면서 수건으로 눈물을 훔쳤다. 기자는 10년 전인 1999년 10월 마산보도연맹 사건과 함께 곡안리 재실 학살사건을 처음 취재할 때도 그녀에게 '아들 상섭이를 좀 찾아봐 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그래서 나름대로 방송국을 통해 수소문해보기도 했지만 허사였다.

하지만 그녀는 요즘도 텔레비전에서 6·25때 헤어진 부모를 찾는 남자가 나오거나, 미국으로 입양된 사람 이야기가 나오면 신경이 곤두선다. '할머니 이젠 포기하세요'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한가닥 희망이라도 남아 있는 게 차라리 나을 것 같아서였다. 대신 화제를 바꾸려고 이렇게 물었다. "20대 청상과부가 자식이라도 있었다면 모르지만, 왜 그 때 다른 데 시집이나 가버리지 그러셨어요?"

그랬더니 손사래를 친다. "어휴, 그 땐 그런 게 집안의 큰 흉이었어. 친정 조부님은 학자였고, 아버지도 선비였는데, 그런 집안 딸이 다시 재가를 했어봐. 말도 안되지. 나도 집안에 흉이 될 짓은 생각도 못했어. 요즘 같은 세상이면 모르지만…."

짓굳게 다시 물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어떠세요? 그 때 욕을 먹을 각오를 하고서라도 가서 자식이라도 하나 낳을 걸, 하는 후회는 안 드나요?"

황점순 할머니의 웃는 모습.

그제서야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그래 이렇게 늙고 나서 자식 생각을 하면, 그 때 그렇게라도 해버릴 걸 하는 생각도 들어."

그러면서 이내 덧붙이는 말. "내 사주가 안 좋아서 그런 걸, 지금 와서 누굴 원망하겠어?"

체념이었다. 분위기를 바꾸려고 물었다. "할머니, 요즘 제일 하고 싶은 게 뭐예요? 어디 가보고 싶은 데는 없나요? 먹고 싶은 것은요?"

"이제 나이를 먹고 나니 뭐 하고 싶은 것도 없고, 가보고 싶은 거나 먹고 싶은 것도 없네? 그런데 맨날 신약(新藥)만 먹으니 속이 어떻게 되는지도 모르겠고, 한약이나 한 번 먹어봤으면 좋겠는데, 그건 안된다고 하데?"

그녀는 기초생활보호 대상자로 월 24만 원의 생계·주거지원금과 8만4000원의 노령연금으로 살아가고 있으며 의료보호를 받고 있다. 치료제가 아닌 한약은 의료보호 대상이 안된다는 뜻이었다.

그녀는 오래 전부터 협심증 증세로 숨이 가쁘고 답답해 매월 태봉병원에서 약을 타먹고 있으며, 아픈 다리 때문에 정기적으로 물리치료도 받아오고 있다.

지난 2일 별다른 취재계획 없이 그냥 할머니를 찾았던 기자는 동행했던 <민중의 소리> 구자환 기자와 함께 안타까운 마음으로 발길을 돌려야 했다.

이병직 한의원장 "할머니의 심장병은 화병에 가깝다"

그런데 마침 마산 산호동에서 '이병직한의원'을 운영하고 있는 이병직 원장이 할머니의 진료를 해드리고 싶단다. 7일 오전 다시 구자환 기자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한의원을 찾았다.

황점순 할머니를 진맥한 이병직 한의원장은 "할머니의 심장이 안좋은 게 협심증이 아니라 화병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녀를 진맥한 이병직 원장은 "협심증이라기 보다는 화병(火病)에 가깝다"고 말했다. 그녀 역시 "가는 데마다 화(火)가 있다고 하더라. 젊을 땐 동지섣달 엄동설한이라도 바깥에 나와 담배를 몇 대 피우고 나서야 화를 누르고 잠을 잘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그녀의 체질에 맞는 한약을 지어 보내기로 했다.

점심을 먹고 다시 곡안리로 갔을 때 할머니는 뒤뜰에서 정성스레 길러온 겨울초(冬草)와 실파를 뜯어 큰 비닐봉지 두 개에 가득 담아주었다. 아직은 더 키워야 할만큼 가녀린 새잎이었다. 집에 와서 아내가 해준 겨울초 겉절이에 밥을 비벼먹었다. 봄냄새가 입안에 가득했다.

하지만 점심을 먹을 때 다른 반찬엔 손도 대지 않고 맹물에 밥을 말아 먹던 할머니가 자꾸 목에 걸렸다. 이병직 원장의 한약이 그녀의 입맛도 살려줄 수 있을까?

할머니는 점심 때 다른 반찬엔 거의 손을 대지 않고 맹물에 밥을 말아 드셨다. 매일 혼자 먹다보니 그렇게 습관이 들었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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