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한국현대사

민간인학살 유족 사찰 '극비문서' 있었다

기록하는 사람 2009. 2. 24. 08: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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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경찰서, <용공혁신분자조사서> 작성해 유족 감시 확인

경찰이 한국전쟁 당시 학살된 보도연맹원 뿐 아니라 그들의 유족에 대해서도 일일이 성향 분석을 하면서 감시·관리해왔다는 사실이 '극비 문서'를 통해 밝혀졌다.

최근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진실화해위)가 김해지역 보도연맹 희생자 유족 272명에게 결정 통지한 '진실규명 결정문'에 따르면, 경찰은 1950년 학살 이후부터 1970년대까지 이른바 <용공혁신분자조사서>를 작성해 유족들을 감시해왔다.

김해경찰서 정보과가 1972년에 작성한 것으로 돼 있는 <용공혁신분자조사서>는 '6·25 당시 처형자 및 동 연고자'라는 부제가 붙어 있으며, 여기에는 1950년 살해된 201명의 성명·본적·주소·생년월일·성별은 물론 연고자(유족) 간의 관계 등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특히 연고자란에도 성명·본적·주소·직업·생년월일은 물론 시찰급류와 비고(살해일자)까지 기재돼 있다.

진실화해위원회가 '진실규명결정문'을 통해 유족에게 공개한 경찰 극비문서.


진실화해위는 이 비밀문서의 정확성을 확인하기 위해 유족과 참고인을 상대로 탐문조사와 제적등본 등 자료조사를 한 결과 대부분 일치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진실화해위는 "김해경찰서가 한국전쟁 당시 김해지역 '처형자'의 유족들을 관리하기 위해 작성한 자료로 판단된다"고 보고했다.


뿐만 아니라 진실화해위는 김해경찰서와 각 지서가 1950~1951년 작성해 하나의 문서철로 편철한 <부역자명부(보도연맹부)>를 입수해 1556명의 명단도 확인했다. 이 문서철에는 <불순분자명부>, <불순분자 구속해제 대상자명부>, <보련맹원구속자명부>, <미검거보련맹원명부>, <행방불명된 보련맹원 및 그 가족조사명부> 등이 포함돼 있었다. 이들 문서에는 모두 '극비①' '극비②' 등 표시가 돼 있었다.

특히 <행방불명된 보련맹원 및 그 가족조사명부>는 1951년 9월 5일 김해경찰서장 명의의 공문을 통해 "전쟁 직후 행방불명('처형자' 포함)된 보련맹원 및 그 가족에 대해 일제 조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에 따라 작성된 것으로, 가족 정보란에는 가족의 이름과 연령·관계·가족 중 입대자 명부·공무원 유무·전과 유무·가족이 포지한 사상·조사시의 동향 및 시찰 상황까지 포함돼 있는 사실상의 '민간인사찰 보고서'였다.

진실화해위가 결정문을 통해 유족에게 공개한 극비문서 내용.


이들 문서는 진실화해위 조사과정에서 우연히 발견된 것으로 알려졌다. 이로써 경찰은 학살 이후 이승만 정권과 4·19 직후 장면 정권을 거쳐 최소한 박정희 정권 때까지 유족들에 대한 민간인사찰을 계속해왔던 것으로 입증됐다.


하지만 유족들은 "1980년대 '연좌제' 폐지 이후에도 국가기관이나 사관학교 입학 때 신원조회를 통해 '보도연맹 가족'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입사 또는 입학이 취소됐던 사례들이 있었다"며 80년대까지 이런 기록이 남아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한편 김해지역 보도연맹원 학살사건에서 피해신청인 76명 외에도 추가로 196명이 피해자로 확정될 수 있었던 것은 이같은 경찰의 '극비 문서'가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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