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연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고?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위암 장지연상'을 받은 적이 있는가 봅니다. 그이가 2011년 4월 19일치 조선일보에 '장지연상을 반납해야 하나?'라는 칼럼을 썼습니다. 여기서 그이는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장지연에게 주어졌던 건국공로훈장을 박탈한 데 대해 말하고 있습니다.
그이는 그 글에서 "(장지연이 1905년 썼다는) '시일야방성대곡'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메어져 온다"면서 "장지연 선생이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고들 하는데 나는 시일야방성대곡이라는 글 한 편만으로도 그 분은 당대에 남을 항일지사였고 민족언론인이었음을 …… 증언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장지연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는 말인데, 그이가 적은 것들은 죄다 사실이 아닙니다. "'시일야방성대곡'은 지금 읽어도 가슴이 메어져" 오지만, 장지연의 친일 글들은 그 목메임을 충분히 덮고도 남음이 있습니다.
살펴보겠습니다.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은 "한·일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것이 '친일'의 근거가 됐다", "그가 지방언론에 썼다는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본 적이 있는가"라면서 마치 1910년과 1911년에 장지연이 경남일보에 쓴 글이 문제인 것처럼 말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경남일보 기사는 장지연 친일의 근거가 아니다
장지연 이름으로 경남일보에 나온 글이 친일이라고 얘기된 적은 없습니다. 민족문제연구소 등에서 발행한 <친일 인명 사전>에도 그렇게 돼 있습니다. 옮겨 보겠습니다.
"(장지연이) 주필로 재직할 때 경남일보는 1910년 11월 5일자를 일본 천황 메이지의 생일인 천장절 기념호로 발행했는데, …… 1911년 11월 2일자에도 천장절을 기념해 …… (2면에) 2단을 합친 전체 크기에 '축 천장절'이라 표기하고 기념 한시를 무기명으로 게재했다. …… 경남일보는 1911년 11월 3일 개최되는 천장절 경축행사를 위해 10월 27일부터 본문에 고정란을 만들어 '천장절 축하 의절'이라는 기사를 매일 게재했다."
제3권 359쪽입니다. 이것이 전부입니다. 이를 두고 장지연이 당시 경남일보 주필이었기 때문에 '주필 책임론'이 제기된 적이 있고 이 때문에 일부에서는 장지연이 문제의 한시를 썼다는 주장이 나오기도 했지만 어떤 집단도 이를 공식 견해로 채택한 적은 없습니다. 그리고 정부의 서훈 취소 근거도 이것이 아니었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기사가 친일의 근거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일부러 밝혀 말하지 않은 사실은 따로 있습니다. 이것들이 정부가 장지연에 대한 서훈 취소를 결정한 근거들입니다.
<친일 인명 사전>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매일신문에 대한 장지연의 기고는 1913년 7월 19일자에 시작됩니다. '경남일보 기자 장지연'이 쓴 한시 '축 매일신보 윤전기 증설'이 있는 것입니다. "매일신보도 윤전기처럼 돌고돌아/ 날마다 천만번 돌아서 인쇄를 하여라".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모르거나 일부러 밝히지 않은 사실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첫 번째는 1915년 4월 21일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글입니다. 여기서 장지연은 일본을 두고 "동양의 선각"이라며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면 동양의 독일이라 부르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습니다.
두 번째는 이렇습니다. 서울에서 발행됐던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6년 9월 16일치입니다. "일본은 세계 열강 사이에서 웅비하는 동양의 패왕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서로 제휴해 장벽을 없애고 동제공장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 번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5년 1월 1일치 신년호입니다. "총독부에서 신정을 시설한 이래 착착 구폐를 개혁하고 신화를 선포함에 있어 조선 구습의 풍속도 점차 개량되어 변천하는 경우에 이르렀다. …… 지금부터는 전 조선의 풍속을 통일하여 민족의 관념도 일단(一團)에 이를 줄로 미루어 생각한다." 민족의 관념도 일단에 이른다는, 일본 조선 민족 관념이 없어지고 하나가 된다는 것입지요.
이토 히로부미를 인용하면서까지 조선인을 업신여겨
네 번째는 1915년 12월 26일치 매일신보입니다. 장지연은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라며 "오호라 동종동족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했습니다.
이를 두고 <친일 인명 사전>은 "'한인은 단체성이 없다'는 이토 히로부미의 말을 빌어 인용하면서 같은 민족을 열등 인종으로 치부하기까지 했다"고 평했습니다. 그런데도 조선일보의 김대중이라는 고문은 이런 일을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일부러 밝히지 않았으니, '어찌 개탄할 일이 아니며, 어찌 애석한 일이 아니랴. 아아! 슬프도다.' 지금 제 심정이 이렇습니다.
다섯 번째도 있습니다. 1916년 6월 8일 발행된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장지연은 "금일 동양의 평화를 유지코저 할진대 유일의 자위책은 즉 미국의 '몬로'주의를 차용하여 아세아몬로주의를 실행"할 필요가 있다. "지리상 관계던지 종족상 관계던지 동주동종의 민족된 자가 마땅히 민족주의를 채용하여 일대 범아세아주의를 발달함에 노력할지니 즉 아세아몬로주의가 이것이라."
먼로주의는 1823년 12월 미국 5대 대통령 먼로가 발표한 외교 노선입니다. 유럽 대륙과 아메리카 대륙은 별개 존재며, 당시까지 아메리카 대륙에 들어선 유럽 식민지는 인정하지만 그 뒤로 아메리카 대륙에 유럽이 식민지를 만들려는 행동은 인정하지 않는다, 나아가 미국에 대한 적대행위로 간주한다는 내용입니다. 아메리카 대신 아시아, 미국 대신 일본을 집어넣으면 바로 장지연이 주장하는 바가 됩니다.
여섯 번째는 이렇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8년 3월 21일치에 실린 내용인데요, "오늘날 동양의 지위는 지나(=중국), 일선 두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두 나라가 서로 함께 나아가 순치보거지세를 만든 연후에야 국방을 보전하고 민족을 보전"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세 나라가 아니라 두 나라라고 한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모르거나 일부러 밝히지 않은 일곱 번째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1915년 7월 13일치에 있습니다. "동양 대국은 오직 일본과 지나 두 나라일 뿐이다. 보거순치 관계로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서로 제휴하여 친선을 한 연후에 외부를 막을 수 있는 술책"이 생긴다는 글입니다.
여덟 번째는 1915년 일본 천황 혈통의 시조라는 '신무천황 제일'인 4월 3일치 매일신보에 있습니다. 여기서 장지연은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하여 해내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란 것이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라 했습니다.
일본서 일어난 일조차 '조선인에 대한 천황의 은혜'
마지막,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의 고문이 모르거나 일부러 밝히지 않은 아홉 번째는 매우 장엄합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1918년 1월 1일치에 실렸습니다. 신년호인 이 날 지면에는 '대정6년 시사"라는 제목으로 한시가 24편 실려 있습니다.
대정=大正=다이쇼는 일본 천황의 이름입니다. 한 해 전인 1917년이 대정 6년이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이 글들은 1917년에 일어났던 여러 일들을 한시(詩)로 정리한 역사(史)가 되겠습니다. 내용은 일본 천황에 대한 찬양 일색입니다.
일본 군함이 폭발했을 때 일본 천황이 위문하는 조서를 내린 데 대해 "높은 은총에 사례했다"는 대목도 있고 일본에 큰물이 졌을 때 일본 천황이 하사금을 주니 "조선 인민이 한 몸 같이 파도 같은 은혜에 젖었다"는 대목도 있습니다.
그리고 절정은 여기에 있습니다. 1917년 6월 8일 조선 순종이 동생인 영친왕 이은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일본 황실과 결혼하기로 내정된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나타낸다는 명분으로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가도록 한 일을 노래하고 있습니다.
제목은 '이왕 동상-이왕이 동쪽으로 올라가다'입니다.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
일선융화라 하면 일본과 조선이 서로 구분 없이 하나로 되는 것이지요. 이렇게 장지연이 쓴 친일 글 전체를 놓고 보면 이런 일선융화가 장지연에게서 억지로 꾸며져서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나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어쩌면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은 이런 사실을 다 알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다만 이것들이 그이의 눈에는 '(장지연이) 지방에 내려가 지방신문에다 쓴 현실에 부합하는 몇 편의 글'로 여겨졌던 것이겠지요. 이런 착시에 따르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는 서울이 아닌 지방에서 발행이 됐습니다요.
처음부터 친일 단체 간부를 맡기도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의 고문이 모르고 있거나 아니면 일부러 밝히지 않은 사실은 또 있습니다. 장지연은 매일신보를 통해서만 글을 씀으로써만 친일을 하지는 않았습니다. 출발부터 친일 색채가 뚜렷해 이미 당대에 많은 비난을 받았던 불교단체 간부까지 지냈습니다.
불교진흥회가 그것입니다. 1914년 11월 만들어진 이 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했을 뿐 아니라 한 달 뒤에는 '간사'라는 자리까지 맡았습니다.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하는 목적으로 친일 승려 이회광이 주도해 만든 단체였습니다.
김대중 자신의 논리를 따르더라도 서훈 취소는 마땅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은 이렇게 장지연이 쓴 글과 장지연의 행동을 사실로 인정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대한민국의 역사까지 비트는 재주도 갖춘 사람인 모양입니다. 그이는 자기 칼럼에서 이렇게도 적었습니다.
"서훈이 취소되기 위해서는 서훈이 있은 후 새로운 사건이 발생하거나 서훈 당시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어야 한다. 그러나 장지연 선생의 공과는 이미 1962년 서훈 때, 또 2005년 대통령 직속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심사 때 밝혀지고 드러난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1962년 서훈 당시는 장지연의 '공'만 확인이 됐지 '과'는 확인되지 않았습니다. 장지연이 썼다는 사설 '시일야방성대곡'이 지나치도록 찬란하게 빛나는 바람에 장지연의 '과'에 대한 검토는 그로부터 20년 넘게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1987년 지금 부산대학교 한문학과 교수로 있는 강명관이 발표한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이 장지연의 친일 행적을 다룬 최초 논문일 정도입니다.
조선일보 김대중이라는 고문이 이 칼럼에서 스스로 달아놓은 단서 "서훈이 취소되기 위해서는 ……서훈 당시 몰랐던 사실이 밝혀졌어야 한다"에 딱 맞아떨어지는 만큼, 이번 서훈 취소는 그야말로 당연한 결정이 아닐 수 없습니다.
2005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와 관련해서도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만, 이쯤에서 이번 글은 마무리를 할까 합니다. 그것은 며칠 있다 조선일보의 김태익이라는 논설위원이 4월 12일 쓴 칼럼 '보훈처 서훈심사위가 궁금하다'를 다룰 때 말씀드리는 편이 나을 것 같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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