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언론

조선일보는 평기자가 고문을 쥐고 흔든다

김훤주 2011. 5. 2. 1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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틀린 사실이 많았던 김대중 칼럼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의 4월 19일치 칼럼 '장지연상을 반납해야 하나?'에는 잘못이 많습니다. 4월 5일 국무회의에서 의결된 장지연 건국훈장 서훈 취소가 부당하다는데요, 사실 관계가 정확하지 않다는 잘못이 가장 큽니다.

그이는 장지연 서훈 취소가 "한·일 병탄 후 지방에 내려가 현실에 부응하는 몇 편의 글을 썼다"는 데 있다면서 "서훈 취소를 의결한 김황식 국무총리와 국무위원들이 ……장지연이 지방언론에 썼다는 다른 글이 얼마나 '매국적'인지 읽어본 적이 있는가 묻고 싶다"고 했습니다.

저는 그이의 글을 읽으면서 몇 번이나 고개를 갸우뚱했습니다. 논리 구사는 마음대로 하지만 사실 관계까지 흐뜨리지는 않는 인사로 알았는데, 이번 글은 전혀 그렇지 않고 잘못된 사실이 바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이렇게까지 할 사람은 아닌데, 장지연 친일 글을 읽어보기나 했을까, 하는 생각이었지요.

장지연 서훈 취소를 결정하는 바탕이 된 것은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알고 있는 것처럼 '지방에 내려가 쓴 현실에 부응하는 글 몇 편'이나 '지방언론에 썼다는 글'이 아니었습니다. 

그이가 말한 '지방언론'은 경남일보를 이르는데요, 여기에 장지연이 친일 글을 썼다는 증거는 없으며 오히려 서울에 발행되는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915년부터 1918년까지 쓴 글이 더 문제가 됐고 이는 '현실에 부응하는' 수준을 훌쩍 뛰어넘는 것이었습니다.

김대중 잘못의 뿌리는 김정우에게 있었다

월간 조선 5월호 표지.

그러다 월간 조선 5월호를 보고 미심쩍음이 풀렸습니다. 김정우라는 기자가 쓴 '이슈 추적 시일야방성대곡 장지연 친일 논란'이 있었습니다. '盧 정부는 독립운동가 李 정부는 親日행위자' 제목을 달고 있는데요 장지연의 글 쓴 이력을 교묘하지도 않게 왜곡해 놓고 있었습니다.

저는 생각했습니다.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스스로 자료와 정보를 찾아 글을 쓰는 대신 김정우라는 월간 조선 기자 기사를 토대로 글을 썼구나.' 그러니까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잘못을 저지른 원인이 김정우라는 월간 조선 기자가 쓴 글에 있는 셈입니다.

이 월간 조선 기자는 자기가 월간 조선 5월호에 쓴 글에서 "'장지연 친일 논란'의 쟁점은 ▲경남일보 천장절(일본 천황 생일) 축시 게재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친일 논설 기고 ▲총독부 조선물산공진회 선전 및 참가 권유 등이다"고 한 다음 첫 번째와 세 번째에 대해서는 장황하게 늘어놓으면서도 정작 두 번째는 제대로 다루지 않고 슬그머니 넘어갔습니다.

첫 번째 축시는 여태까지 어느 단체도 장지연이 썼다고 단정해 주장한 적이 없으니 다룰 필요도 없는 것이고요, 세 번째는 우리 근대사 전체를 두고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말할 수 있는 소지가 있기는 합니다.(그래서 이 기자는 이를 길게 다뤘겠지만, 물론 저는 이또한 장지연의 친일을 그대로 보여주는 글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두 번째로 꼽은 매일신보 친일 논설의 경우는 누구나 보기만 하면 바로 친일을 알 수 있는데도 이 월간 조선 기자는 그 가운데 '신무천황제일(神武天皇祭日)을 맞이해 천황가의 계통을 소개하며 찬양'한 일만 간접 언급한 다음 다른 이의 발언을 붙이는 식으로 비껴갔습니다.

문제의 글은 이렇습니다. 1915년 4월 3일치 매일신보입니다. "신무는 영웅의 신명한 자질로 동정서벌하여 해내를 평정하고 나라를 세워 자손에게 전해주었으니 지금에 이르도록 2576년간을 123대 동안 황통이 길이 이어지고 있다. 이른바 만세일계란 것이 이것이다. 어찌 세계 만국에 없는 바가 아니겠는가." 어떻습니까? 일본 천황 찬양이 아닌가요?

이에 대해 이 월간 조선 기자는 "일본 소학교 교과서에 등장하는 신화를 소개한 것일 뿐", "일본의 신화를 언급했다는 것만으로 친일의 혐의를 둘 수 있겠지만, 여운형의 '반도 이천오백만 동포에게 호소함'과 같은 전쟁 참여 선동 글에 비하면 아주 미미한 수준"이라는 이종석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 회장의 말을 끌어붙이고는 그냥 넘어갔습니다.

김정우가 보여주지 않은 것들

김정우라는 월간 조선 기자가 제대로 보여주지 않은, 또는 가려서 숨긴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쓴 장지연의 글들은 이밖에도 많습니다. 

월간 조선 5월호 차례.

1915년 1월 1일치입니다. "총독부에서 신정을 시설한 이래 착착 구폐를 개혁하고 신화를 선포함에 있어 조선 구습의 풍속도 점차 개량되어 …… 지금부터는 전 조선의 풍속을 통일하여 민족의 관념도 일단(一團)에 이를 줄로 미루어 생각한다."

1915년 4월 21일치에서 장지연은 일본을 두고 "동양의 선각"이라 일컬으며 "아시아를 제패한 전술로 보면 동양의 독일이라 부르는 것도 지나치지 않다"고 했습니다.

1915년 7월 13일치입니다. "동양 대국(大局)은 오직 일본과 지나(=중국) 두 나라일 뿐이다. 보거순치 관계로 어찌 떨어질 수 있겠는가. 반드시 서로 제휴하여 친선을 한 연후에 외부를 막을 수 있는 술책"이 생긴다는 글입니다.

1915년 12월 26일치입니다. "만약 집정자로 하여금 허락하게 한다 하더라도 조선인의 집회는 결코 이루어질 수 없을 것"이며 "동종동족이 서로 원한을 맺어 서로 원수가 되어 망국의 지경이 되어서도 후회하지 않으니, 어찌 너무나 어리석고 바보 같은 짓이 아니랴. 이로 인해 전 조선인의 습관이 되어 마침내는 단체성이 없는 인종이 되고 말았"다고 했습니다.

1916년 6월 8일치입니다. "금일 동양의 평화를 유지코저 할진대 유일의 자위책은 즉 미국의 '몬로'주의를 차용하여 아세아몬로주의를 실행"할 필요가 있으며 "지리상 관계던지 종족상 관계던지 동주동종의 민족된 자가 마땅히 민족주의를 채용하여 일대 범아세아주의를 발달함에 노력할지니 즉 아세아몬로주의가 이것이라." 

1916년 9월 16일치에서는 "일본은 세계 열강 사이에서 웅비하는 동양의 패왕이므로 일본을 중심으로 동양인이 서로 제휴해 장벽을 없애고 동제공장하여 동양의 평화를 보전"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1918년 1월 1일치 신년호에는 '대정6년 시사'라는 제목으로 장지연이 썼다는 한시가 24편 실렸습니다. 일본 천황 대정=大正=다이쇼의 한 해 전 치적을 찬양하는 글들입니다.

'군함 축파(築波=쓰쿠바) 침몰'(1917년 1월 14일 요코스카에서 침몰) 제목에서 "한 소리 폭음에 불꽃 치솟더니/ 거함이 정박 중에 침몰하더라/ 위문하는 문관이 성지(聖旨=천황의 뜻)를 전하니/ 조원들 높은 은총에 사례하였네"라 했습니다.

'내지(內地=일본 본토) 대수(大水)' 제목에서는 "전에 없던 호우 폭풍 많아/ 홍수 지나가자 곳곳에 재해 입었네/ 하사금 내리심은 구휼하는 은전이라/ 조선 인민도 한 가지로 파도 같은 그 은혜에 젖었네"라 했습니다.

1917년 6월 8일 조선 순종이 동생인 영친왕 이은의 일본 육군사관학교 졸업과 일본 황실과 결혼하기로 내정된 데 대해 고맙다는 뜻을 나타낸다는 명분으로 일본 천황을 만나러 가도록 한 일을 노래한 '이왕(李王) 동상(東上)'은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일선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입니다.

1918년 3월 21일치입니다. "오늘날 동양의 지위는 지나, 일선 두 나라가 있을 뿐이다. 이 두 나라가 서로 함께 나아가 순치보거지세를 만든 연후에야 국방을 보전하고 민족을 보전"할 수 있다.

게다가 장지연은 1914년 만들어진 불교진흥회라는 친일 단체에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간사를 맡은 사실도 있습니다. 발기 취지는 "위로는 일본 천황의 통치를 보필하며 아래로는 백성의 복을 도모한다"였으며 친일 승려 이회광이 주도해 만들어졌습니다. 

사실이 이런데도 김정우라는 월간 조선 기자는 장지연을 두고 "매일신보에서의 활동도 명확하지 않다. 위암이 총독부 기관지에 영입돼 적극적으로 친일 활동을 했다는 주장은 완전히 검증되지 못했다"고 했습니다. 그이에게는 여기 나온 글들이 '적극 친일'의 증거로 충분하지 않은가 봅니다.

차라리 단정만은 안했으면 좋으련만

나아가 이 월간 조선 기자는 "식민 초기 위암은 개인의 각성, 폐습 타파, 식산흥업(殖産興業·생산을 늘리고 산업을 일으킴) 등을 통해 독립을 이룰 것이라 생각했지만, 1919년 3·1운동 이후 '식산 흥업을 통한 자강' 방법론과 결별하고 비타협주의로 전향했다"고 단정까지 했습니다.

근거로 "1921년 5월 5일 재(在)블라디보스토크 총영사인 기구치 요시로가 본국 외무대신 우치다 야스야에게 보낸 '불령단 관계 잡건(不逞團關係雜件) 조선인의 부 시베리아편'"에 "전에 경성 매일신보 기자였던 자인데 김경천의 초청에 응해서 도래한 자이다. 지금 주우찌하에 있으면서 의병을 지휘하고 있다고 한다. 주우찌하에는 의병의 발호가 성하여 작년 12월경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이곳에 온 한 조선인을 일탐(日探·일본 정탐)이라 하여 살해했다는 설이 있다"는 내용을 들었습니다.

보면 아시겠지만 이는 '~하고 있다고 한다', '~했다는 설이 있다' 등 모두 전해 들은 말입니다. 그래서 불안했던지 "하지만 노령(老齡)의 위암이 의병 활동을 했다는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선 다른 사료도 필요하다는 견해가 제기돼 진위 논란은 계속되고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그렇다면 이 기자는 확정되지도 않은 사실을 갖고 단정을 하는 잘못을 저지른 셈입니다.

김정우라는 월간 조선 기자가 이렇게 엉터리로 취재해서 기사를 써 놓았으니,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이 그것을 보고 쓴 칼럼에 잘못이 없을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김대중이라는 조선일보 고문은 같은 집안 식구의 글을 믿은 잘못밖에 없는 셈이네요. 하하.

김훤주
※ <미디어스>에 실은 글을 조금 고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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