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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182

프랑스의 ‘연대’와 우리나라 ‘적선’

서울역 등지에서 하는 ‘적선’ 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지부에서 지부장을 맡아 있는 바람에 요즘 들어 서울에 가는 때가 종종 있습니다. 케이티엑스를 타고 갈 때가 태반인데, 서울역에서 만나는 첫 서울 사람은 대체로 노숙자라 해도 크게 틀리지는 않을 것입니다. 이들은 서울역 앞에서 참았던 담배를 피울라치면 어김없이 저한테 다가와 담배를 하나 달라거나 돈을 한 푼 달라고 합니다. 저는 그러면 어쩔 수 없다는 듯 싱긋 웃으며 달라는 대로 담배나 동전을 주머니에서 꺼내어 ‘적선’을 하곤 합니다. 옛날에는, 그이들에게 돈이나 담배를 거의 주지 않았습니다. 그이에게 잠자리나 먹을거리 따위를 줘야 하는 주체가 국가(state)라고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제가 그이들에게 무엇인가를 주면 그것이 국가가 그이들에게 ..

요즘 학교, 요즘 선생, 요즘 아이

1. 요즘 아이-그냥, 개기고 본다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한 중학교 여자 교실입니다. 점심시간을 앞둔 4교시에 일어난 일입니다. 선생님 강의하고 있는데 한 아이가 등을 돌리고 있습니다. 이 아이는 평소에도 선생 말 잘 안 듣기로 호가 난 학생입니다. 선생님은 수업 좀 똑바로 받으라고 돌리고 있는 아이 등짝을 탁 때렸습니다. 그랬더니 이 아이 “왜 때려요!” 한 다음, “앞으로 선생이라 불러주나 봐라!” 했답니다. 그러면서 자리를 박차고 교실 밖으로 나갔습니다. 이 수업 맡은 선생처럼 만만해 보이는 선생한테는, 반말도 예사로 하는 아이랍니다. 교실에서 나가 들어오지 않아 버리면 오히려 좋을 텐데, 이 아이는 선생 골탕 먹이느라 그랬는지 줄이어 교실을 들락날락거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아이랑 평소 잘 지내던..

'존재'를 배반하지 않는 일상은 없을까?

하루하루 일상을 지내다보면 제 존재를 배반하는 상황에 놓일 때가 어쩌다 있습니다. 그러면 황당한 느낌을 들게 마련입니다. 물론 중요하고 결정적인 그런 국면은 아닙니다. 일상이지요. 1. 요즘 들어 지부에서 물품 발송을 자주 하다보니 택배 직원이 사무실을 자주 드나들게 됐습니다. 며칠 전 이 사람이 무엇 물어볼 일이 있었는지 “사장님!” 하고 저를 불렀습니다. 처음은 아니었습니다. 술집이나 밥집에서도 듣는 소리입니다. 그런 데서는 내가 노동자인줄 모르니까 그냥 대충 부르는 것이야, 여겼습니다. 그러면서도 어쩌다 한 번씩은, ‘저는 노동잔데요.’ 대꾸를 하기도 합니다. 이 날은 느낌이 좀 야릇했습니다. 저는 노조 지부에서 지부장을 맡고 있습니다. 노동조합은 사용자와 맞서는 조직인데, 택배 직원이 제가 노조 ..

우리가 어쩌다 이토록 잔인해졌을까?

어쩌다 이토록 잔인해졌을까? 이 물음은 이 세상 다른 누군가가 아니라 저 자신을 향하고 있습니다. 물론 사람이 죽어나갔다는 얘기가 곳곳에서 흘러넘쳐나도 별로 신경을 쓰지 않는 데 견주면 아무것도 아니기는 합니다. 전염병 터지면 곳곳서 짐승 떼죽음 소는 조금 다릅니다만, 돼지나 닭이나 오리 따위는 한꺼번에 죽임을 당합니다. 광우병에 걸린(또는 걸렸다고 볼 수 있는) 소는 고기 값이 비싸서 그런지 사람들이 억지로 아닌 것처럼 해서 어떻게든 내다 팔 궁리를 하지, 모조리 죽여 버리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조류독감에 걸린 닭이나 오리가 있다고 하면, 둘레 일정 범위에 들어 있는 닭과 오리는 죄다 죽음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돼지 또한, 구제역(口蹄疫)이나 돼지콜레라가 생겼다는 말만 나와도 비슷하게 죽임을 당합니다...

촛불집회와 여성의 하이힐

갈수록 커지는 촛불집회를 보면서, 저는 엉뚱하게도 ‘올해 하이힐 매출이 떨어지겠구나.’ 짐작을 했습니다. 촛불집회에 하이힐을 신고 오는 사람을 떠올리기는 쉽지 않습니다. 하이힐이 움직이는 데 불편한데다가 오래 신으면 발과 다리와 허리가 아프기도 하답니다. 물론 촛불집회에 하이힐을 신은 사람이 없지는 않을 것입니다. 훨씬 험한 노동자대회 같은 데서도 하이힐 신은 이는 종종 눈에 띕니다. 하이힐을 한 손에 들고 맨발로 행진하는 사람을 본 적도 있습니다. 스타킹은 벗어서 손가방에 넣었겠지요. 그러나 이런 사정만으로 하이힐 매출이 떨어지리라 예상한 것은 아닙니다. 아마 하이힐이 서유럽에서 만들어진 과정과, 인기가 있었던 시대의 배경 따위를 나름대로 알지 못했다면 그런 생각은 하지 않았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귀..

대가성 의심 받는 스승의 날 선물

스승의 날 선물은 대가성을 의심받을 수밖에 없다 스승의 날 오고가는 선물을 두고 해마다 말들이 많습니다. 이날 아예 쉬는 학교도 있고, 또 스승의 날을 학년말로 옮기자는 얘기도 나옵니다. 이렇게 말이 많은 까닭은,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으뜸은 이른바 ‘대가성’ 때문일 것입니다. 지금 자기가 기르는 아이를 맡고 있는 선생님에게 크든 작든 선물을 건네면서 많든 적든 대가를 바라지 않는다면 이를 듣는 다른 사람들이 쉬 믿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어떤 이는 눈길이라도 한 번 더 던져주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선물한다 하고 다른 이는 남들 다 하니까 자기만 안 했다가는 미운털이 박힐까봐 그런다고 합니다. 그런데 이 모두 ‘대가를 기대한다.’의 다른 표현일 따름입니다. 지금처럼 학기 한가운데 스승의 날이 있는 이상..

23년 전 읽다 만 박경리의 <토지>

5일 세상을 떠난 박경리에 대해 저는 별다른 느낌이 없습니다. 그이의 작품을 거의 전혀 읽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런저런 풍문에 들려오는 얘기들은 남들 아는만큼 들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이에 대해 무엇을 안다고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닙니다. 훌륭하다고 알려진 이가 세상을 뜨니 저도 그리 즐겁지는 않습니다. 사람은 누구나 언젠가 한 번은 숨을 거둘 수밖에 없다니까(사실 따지고 보면 사람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 그렇지요.) 크게 흐느껴지지는 않지만, 그래도 아쉬운 마음이 드는 것 또한 어쩔 수 없습니다. 박경리 작품을 처음 만난 때는 23년 전인 85년입니다. 감방에 있을 때인데, 바깥에 있던 동료가 박경리의 작품 1권을 넣어줬습니다. 당시 연재가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집으로 출판돼 있었습니다. 기억이..

재벌, 70년대 이미 국민 장악 끝냈다

2007년 우리 전국언론노동조합 경남도민일보지부는 나름대로 뜻 깊은 일을 하나 해 냈습니다. 5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한 달에 두 번꼴로 모두 열여섯 차례 모여 노동교실 교육을 했습니다. 조합원 의식 기틀을 다지자는 취지로 했는데, 첫 강의는 경상대학교 경제학과 교수인 장상환이 하셨습니다. 강의 내용과 질문-응답까지 모아서, 올 4월에 는 제목으로 책을 하나 내기도 했습니다. 어지간해서는 하기 어려운 일을, 언론노조 본조의 도움을 받아 우리 지부가 치러낸 셈인데 이 책을 뿌듯하게 여기며 뒤적거리는데 어릴 적 기억을 깨우는 구절이 눈에 띄었습니다. 장상환의 두 번째 강의 ‘자본주의 바로 알기 2 : 해방 후 한국 자본주의 전개 과정’인데요, 50쪽 아래에 나오는 “1970년대 중반에 오면 재벌이 국민경제를..

우리말 동네 이름 내쫓은 새마을운동

어릴 적 살던 동네 창녕 신기동 제가 어릴 적 살던 창녕군 창녕읍 이야기입니다. 여덟 살에 다시 창녕 들어가 살던 동네는 신기동입니다. 태어난 데는 신기동 아래 창녕 성당 아래에 있는 송현동입니다. 태어난 뒤에는 곧바로 고향인 유어면 대대리에 가서 살다가, 함양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와 할아버지와 증조할아버지 태어나신 동네인 대대에는 6.25 때 망가져 새로 지은 할아버지 집이 있습니다. 대대 앞에는 뻘밭(요즘으로 치면 습지라 일렀겠지요)을 개간한 너른 들판이 있고, 건너편에는 관동이라는 동네가 있습니다. 송현동은 군청과 경찰서 바로 왼쪽 옆에 있었고요 군청과 경찰서의 오른편 위쪽(그러니까 동남쪽) 동네가 바로 신기동이었습니다. 그리고 군청 아래쪽 장터에서 군청까지 이르는 길은 중앙통이라..

잘못 수입한 '지속 가능'이란 단어

환경단체가 환경은 잘 지키는지 모르지만, 우리말은 그다지 제대로 지키지 못하는 것 같습니다. '소벌'이라는 훌륭한 이름을 팽개쳐 버리고 '우포(牛浦)'(바로 그 이름난 창녕의 우포 말입니다.)라는 탁상 행정 용어를 골라잡은 데서도 알 수 있습니다. 이와는 달리 우리말의 특성을 잘 몰라서 그리하는 경우도 있는 것 같은데 그런 대표 가운데 하나가 바로 '지속 가능(한)'이라는 낱말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지속 가능(한)'은 곧잘 '개발' 또는 '발전'을 뒤에 달고 다니는데요, 이러면 우리말에서는 "개발 또는 발전이 지속 가능하다."고 읽히기 십상입니다. 실은 '자연이 지속 가능한 개발'이라는 말인데(엄밀하게 따지면 '가능(한)'도 문제가 있습니다.), 주어인 '자연이'가 생략되는 바람에 일어나는 착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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