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원성과 합포성
지금까지는 가까운 마산의 역사를 살펴봤어요. 이제부터는 타임머신을 타고 좀 더 멀리 들어가 보도록 해요. 시작하면서 1400년 전 신라시대에는 창원이 의안이었고 마산은 합포였다고 했지요. 친구들 기억나나요?
또 800년 전 고려시대 들어서는 의안은 의창이 되었고 합포는 회원이 되었다고 했어요. 마산에는 이 두 지명이 붙은 성터가 남아 있는데 합포성과 회원현성이랍니다. 마산에도 그렇게 역사가 깊은 성이 남아 있다니~~ 신기하지요^^.
먼저 합포성으로 갑니다~!! 합포성은 평지에 지은 석성으로 마산회원구 합성동 73-4에 80m 정도 쥐꼬리만큼 남아 있어요. 이곳은 경상우도병마절도사의 병영이었습니다. 지금으로 치면 경상남도 육군사령관이 지휘하는 본부인 셈이지요.
1350년부터 남해 바다는 들끓는 왜구로 편한 날이 없을 정도였어요. 마산 합포만은 육지로 올라가는 주요 경로였기에 백성들의 괴로움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지요. 고려 우왕 4년(1378년) 경상도 원수 배극렴 장군이 민과 군을 동원해 함께 성을 쌓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내용을 보면 합포성이 고을 사람들에게 어떤 역할을 했는지 아주 잘 나타나 있어요.
합포성.
“처음 설치하였던 병영이 전쟁통에 불타는 바람에 군사들은 들판에 머물렀다. 지난 5년 동안 병영을 세 번 옮겼는데 이는 바깥에 성곽이 없었기 때문이다. 풍년이 들자 추수를 마친 9월 석성을 쌓기 시작하여 11월에 끝마쳤다.
동서남북 네 곳에 문을 내고 안에는 곡식을 쌓아두려고 창고를 두 개 설치하였다. 이전에는 이틀 걸리는 거리에 창고가 있었으므로 싣고 오려면 사람과 짐승이 모두 고달팠는데 이제 편하게 되었다. 바닷가 백성들도 왜적이 오면 들어오고 왜적이 물러나면 들판에 나가 마음 놓고 농사지을 수 있게 되었다.”
당시 정황으로 보자면 군사 목적으로 지은 성이면서 동시에 백성들 보호하는 기능까지 겸했다는 것을 알 수 있어요. 1413년 태종 때 경상우도병마절도사를 설치한 이후 임진왜란 때까지 계속 있다 임진왜란이 끝난 바로 뒤인 1603년 촉석루가 있는 진주성으로 옮겨가게 되지요. 음~~합포성과 진주성이 그런 연관이 있다니 재밌지요.
합포성을 살펴봤으니 이제 회원현성으로 떠납니당~^^ 회원현성은 산비탈에 지은 토성이에요. 평지에 석성으로 쌓은 합포성과는 아주 대조를 이루지요. 마산박물관과 문신미술관이 있는 데서 산길로 조금 올라가면 흔적을 볼 수가 있어요.
회원현성.
조선시대 지리책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이 위치를 “월영대 북쪽에 있다”고 적고 있어요. 이곳에 올라서서 내려다보는 마산만 경치가 아주 끝내주었지요. 음~근데 지금은 매립을 너무 많이 해서리 쩝쩝~^^::
여기서 잠깐 퀴즈 나갑니다~ 합포성은 돌로 쌓은 석성이고 회원현성은 흙으로 쌓은 토성이라 했지요. 그렇다면 나무로 쌓은 성을 뭐라 할까요? 목성요~~!! 모든 학생들이 그렇게 답을 한답니다. 정답은 이래요~~~ 두 자로는 ‘목책(木柵)’ 한 자로는 ‘책(柵)’!! 기억했다가 부모님 하고 여행할 기회가 있을 때 맛있는 거 걸고 퀴즈를 내보세요. 과자 획득 100% 장담이요^^
회원현성 아래에는 월영대가 있어요. ‘월영대’ 하면 뭐니뭐니해도 최치원이지요. 만약 월영대에 최치원의 스토리가 없었다면 그렇게 유명해지지 않았을지도 몰라요. 도대체 최치원이 누구길래 그런가 싶지요. 최치원은 신라 말기 우리나라 최고의 슈퍼스타였어요.
12살에 당나라에 들어가 17살에 장원급제를 하고 그곳에서 이름을 날렸습니다. 당시 중국은 지금 미국으로 치면 딱 맞아요. 그러니 원조 한류 스타라 해도 틀린 말은 아니지요. 친구들이 고학년이 되어 역사를 배우게 되면 최치원를 꼭 만나게 될 거에요. 지금 알아놓으면 그때 무척 반갑겠지요.^^
최치원은 가야산을 비롯해 전국 곳곳에 신령스러운 흔적을 많이 남겼어요. 재미 있는 이야기가 아주 많지요. 월영대 역시 최치원이 별장을 짓고 노닐었던 곳으로 유명해요. 슈퍼스타 최치원이 노닐었던 장소니까 얼마나 멋졌을지는 두 말하면 잔소리!!
하지만 그렇게 아름다웠던 곳이 지난 100년 동안 많이 변했어요. 마산 바다는 사람들의 욕심으로 야금야금 사라져갔고 이제는 육지가 돼버렸어요. 월영대의 화려했던 영화는 경남대 앞 도롯가에 조그만 비석과 비각으로 초라하게 남아 있어요.
회원성은 합포성처럼 흙으로 쌓은 흔적이 쥐꼬리만큼 남아 있어요. 회원성에서 기와조각들이 여러 개 출토되었는데 이것으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는 것들이 있어요. 우리가 알기로는 성은 적의 공격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다 그리 생각하잖아요.
그런데 꼭 그렇지만은 않아요. 원님이 고을을 다스리는 행정 중심지를 보호하기 위해 쌓기도 했어요. 회원성에서 발견된 기와장을 통해서 고려시대까지는 현성 구실을 제대로 한 것으로 짐작할 수가 있거든요. 현성은 읍성과 다르지 않습니다. 동헌이나 객사 같은 행정기관을 둘러싸고 대개 평지에 지어진 것들이지요. 산에 들어선 산성은 대체로 군사목적이었고요.
이왕 성으로 들어왔으니 회원현성과 관련된 역사적인 사건도 알아보는 게 좋겠지요. 회원현성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관련이 있어요. 여몽연합군은 몽골이 고려를 동원하여 만든 연합 군대였어요. 이 연합군이 일본 정벌을 했던 사건이지요.
늘 일본에 당하기만 했는데 몽골의 강요 때문이기는 하지만 우리가 정벌을 시도했다는 게 신기하지요. 회원현성은 여몽연합군의 총본부 구실을 했던 곳이에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
자~~ 지금부터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도록 해요~!! 역사책 <고려사절요>를 바탕으로 여몽연합군의 일본정벌을 간추리면 이렇답니다.
1274년 1월 몽골군 4500명이 금주(金州)에 옵니다. 5월에도 몽골군 1만5000명이 들어오고 6월에 전함 900척이 금주에 정박합니다. 금주는 지금 김해인데 창원(합포·의안)은 당시 금주 소속이었어요. 그러니 이 몽골군 주둔지는 합포로 보는 것이 합당합니다.
그러다 10월에 고려군과 몽골군이 일본을 정벌하기 위해 합포를 떠납니다. (두둥~흥미진진~~!!) 규모는 어느 정도였을까요? 몽골군은 2만5000명이고 고려군은 8000명이었으니 3분의1로 보면 될 것 같아요. 이밖에 짐꾼·길잡이·뱃사공 6700명은 고려가 대어야 했습니다. 숫자로 보나 분위기로 보나 고려가 주도한 정벌은 아니었지요.
11일 뒤 일본에 도착하여 왜군과 전투를 합니다. 고려군이 앞장서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어요. 왜병은 크게 패하여 쓰러진 시체가 엄청 많았다고 기록되어 있어요. 그러나 하루도 못가 반전이 찾아옵니다. 잘 싸운 그날 밤 바람이 불고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전함이 부서지고 사람이 물에 빠졌어요.
11월 합포로 다시 돌아왔을 때는 함께하지 못한 군사가 1만3500명을 넘었지요. 당시에는 전쟁에서 전략전술도 중요하지만 기후가 많은 영향을 미쳤거든요.
일본 정벌이 거기서 끝이 났을까요? 아닙니다. 2차 정벌을 시도하게 돼요. 1차보다 훨씬 규모도 크고 계획도 치밀하게 세웁니다. 1280년 8월 몽골 황제 쿠빌라이는 고려 임금 원종을 연경에 불러 작전계획을 일러줍니다.
4만 군사는 합포에서 출발하는 군사(4만)와 중국 강남에서 출발하는 군사(10만)이 일본 이키섬에 모인 다음 일본 본토를 바로 들이치는 내용이었어요. 이쯤 되니 2차 정벌의 결과가 무지 궁금하지요. 아슬아슬한 마음으로 결과를 지켜보도록 해요.
여몽연합군은 1281년 5월 합포를 떠납니다. 그런데 도중에 풍랑을 만나 군사가 실종되는 사태를 겪게 돼요. 6월 이키섬에 도착해서 이틀에 걸쳐 일본군과 전투를 벌였는데 결국 깨졌어요. 거기에다 전염병도 크게 유행을 했어요.
중국 강남에서 오기로 한 범문호군대는 제 때 오지 않았을 뿐더러 오자마자 큰 바람을 만나 모두 물에 빠져 죽어버렸어요. 돌아오지 못한 숫자는 몽골군이 10만, 고려군이 7000명으로 전체 14만에서 3만3000명만 살아남았지요. 아~~이야기만 들어도 가슴이 쓰리군요!!
그렇다면 여몽연합군 일본정벌의 속사정은 어땠는지 들여다보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나요? 고려는 뭐든지 몽골이 시키는 대로 해야 했어요. 몽골은 인력은 물론 군량과 함선과 무기까지 보급하라고 닦달했지요.
당대 세계 최대 군항의 실상
백성들한테 엄청난 고통이었어요. 말이 쉬워서 몇 만 명이지 그 많은 군사가 먹고 입는 것을 누가 다 책임을 져야 했을까요? 휴~~!!! 백성들의 신세가 가혹하고 가련하기 짝이 없었어요. 농사짓는 호미는 물론이고 기둥이라도 빼어내 전함을 짓는 데 바쳐야 했으니까요.
여몽연합군이 직접 머물렀던 창원 일대는 다른 지역보다 더 크게 피해를 입을 수밖에 없었어요. 오죽하면 살던 집을 허물고 도망하는 경우까지 곳곳에서 일어났을까요. 왜놈이나 몽골군이다 다를 바가 없었지요. 오히려 왜구의 침략이 더 나았을 지도 몰라요. 아니 오십보 백보요~^^::
고려 조정은 이를 두고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에 크게 이바지했다는 이유로 합포(마산)와 의안(창원) 두 고을을 금주(김해)에서 떼어내 회원·의창으로 승격하고 독립을 시켰어요.
친구들, 지금 이 이야기를 들으면서 무슨 생각이 드나요? 참 눈물 나게 고맙다 싶나요~? 그야말로 개풀 뜯어먹는 소리지요~백성들의 그 많은 희생과 피눈물이 어찌 이런 따위로 보상이 될 수 있다는 말인가요~!!(아~열난다~~~)
여몽연합군의 패전을 두고 일본은 또 이렇게 이용을 해 먹습니다. 여몽연합군이 태풍에 크게 당한 것은 신의 바람 덕분이었다면서 일본을 지키는 가미카제(神風)신화를 만들어 일본 임금 천황을 신격화하는 데 활용하지요. 뿐만 아닙니다.
우리나라·중국·미국과 동남아시아 여러 나라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는 이념으로도 이용했어요. 태평양전쟁 말기 ‘가미카제특공대’로도 이어져요. 폭탄이 장착된 비행기를 몰고 적진을 향하여 돌진하도록 시켰던 자살특공대를 말하는데요, 식민지 조선의 젊은이들도 많이 동원이 되었지요.
여몽연합군을 두고 근대 이전에 일본정벌을 시도한 최초이며 유일한 사례라 합니다. 유럽과 아시아를 제패한 세계제국 몽골이 고려까지 동원하여 일본을 정복하려 한 세계사적인 사건이었지요.
그런데 역사는 늘 권력 편에서 기록되기 때문에 피눈물을 흘려야 했던 수많은 백성의 고통 따위는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어요. 여몽연합군 일본 정벌의 화려한 역사 평가 앞에서 지금 왜 이렇게 기분이 꿀꿀할까요~!!
그런 세계사적인 대사건의 중심에 합포=마산=창원이 놓여 있었던 까닭이 있어요. 합포는 바다 안쪽 깊숙이 들어앉아 포구가 매우 길고 앞에 놓인 거제도가 해류와 바람을 막아주기 때문에 항구로서 딱 좋은 조건을 갖추었지요.
대마도를 거쳐 이키섬까지 이르는 직선거리도 짧으며 여기를 흐르는 쿠로시오해류를 타면 일본까지 어렵지 않게 갈 수 있어요. 그 바람에 한반도 남쪽의 조그만 고을 합포에 군대와 짐꾼·길잡이·사공만 해도 4만 가까이 집결을 했어요.
원래는 고려정이었던 몽고정.
군대를 부양해야 했던 다른 민간인은 또 얼마였을까요? 원래 살던 사람까지 합하면 인구가 적어도 10만은 넘었을 것 같아요. 어쨌든 1270~80년대 합포는 그런 사연으로 세계적인 군항도시였던 거지요.
여몽연합군과 관련된 흔적도 남아 있어요. 3·15의거 기념탑 근처에 몽고정이 그것이랍니다. 원래는 몽고정이 아니라 고려정이었어요. 여몽연합군 일본정벌 당시 샘을 파서 물이 솟아나게 만든 자리가 고려정이거든요.
<신증동국여지승람> ‘창원도호부’ 항목을 보면 이런 대목이 나와요. “몽골 황제 쿠빌라이가 일본 정벌을 위하여 정동행성을 합포에 임시로 설치하고 흔도를 보내 몽골 병사 4500명을 거느리고 머물게 했다.” 그러니까 4500명이 마셨던 우물 고려정이 오늘날 부르고 있는 바로 그 몽고정이지요
그런데 고려정이 어떻게 몽고정으로 변했을까요? 범인은 바로 일본~!! 일제강점기에 일본 사람들이 이름을 바꿔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일본 사람들이 우리나라를 싫어해서 몽골로 바꿨어요~” 땡~~!! “고려 사람들이 일본을 정벌한 역사를 숨기기 위해서요~~” 음 그보다는 다른 이유가 있어요.
몽고를 한자로 풀어보면 어리석고(蒙) 고리타분하다(古)는 뜻이거든요. 그러니까 고려를 동원해 일본정벌에 나섰던 몽골을 비웃는 거지요. 여몽연합군 일본정벌 자체를 얕잡아 보는 거라고 생각하면 될 것 같아요.
경남도민일보 사진. 몽고정 바로 옆에 있는 몽고식품. 공장은 다른 데로 옮겨갔습니다.
여기서 잠깐퀴즈 나갑니다~!! 몽고간장 회사는 어디에서 시작되었을까요? 1. 서울 2. 부산 3. 마산 4. 대구. 3번 마산요~딩동댕!! 물 좋은 마산의 명물 몽고간장이 여기에서 비롯되었다는 이야기^^(지금은 공장이 창원 팔룡동으로 옮겨가 있어요.)
이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
마산은 여몽연합군의 일본 정벌과 함께 이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의 출발점이기도 했어요. 왜 그런지는 이미 설명을 했지요. 지형조건과 해류가 일본으로 가기에 가장 좋은 곳이기 때문이라구요.
대마도 정벌도 간단하게 알아보고 넘어가는 게 좋겠지요. 기록을 보면 왜구는 1223년 처음 나타난 이후로 1350년부터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심해집니다. 1년이 365일인데 어떤 해는 왜구가 노략질한 횟수가 365번을 넘을 정도였다고 하면 얼마나 심했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겠지요.
그렇다면 왜구들의 침략이 왜 이렇게 극심했을까요? 대마도는 삼국시대만 해도 신라 땅이었는데 왜인들이 조금씩 들어와 살면서 일본 땅이 되었지요. 그런데 대마도는 땅이 메말라 농사짓기에 마땅하지 않았어요. 그러다보니 약탈을 일삼기 위한 왜구의 근거지가 된 거지요.
왜구의 침략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새로 들어선 뒤에도 그다지 잦아들지 않았어요. 1419년 5월 가까운 남해뿐 아니라 대마도에서 멀리 떨어져 있는 충청도 비인과 황해도 해주까지 침략을 했어요. 마음만 먹으면 서울 한양까지 침략할 수 있게 된 것이지요.
이종무 장군이 대마도를 향하여 출발한 6월 19일이 대마도의 날이랍니다.
그러자 조선 조정은 더이상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1419년 6월 19일 이종무장군은 전선 227척과 군사 1만7285명(식량은 65일치 준비)을 거느리고 마산포를 출발해서 거제 남쪽 주원방포(통영 한산면 추봉도)를 떠납니다. 이튿날 낮에 대마도에 도착하여 아무 방비가 없던 왜구를 들이쳤습니다.
그러고 나서도 한참을 더 머물다가 7월 3일 돌아왔습니다. 그 뒤 3년 동안 대마도는 항복하느니 마느니, 조선은 다시 정벌하느니 마느니 군사·외교 실랑이를 벌였답니다. 어쨌든 대마도 정벌 이후로 왜구의 침입이 잦아들었습니다.
또 1426년 들어서는 창원시 진해구 웅천에 있는 내이포(제포)를 개방했습니다. 동래 부산포, 울산 염포와 함께 말이지요. 개방한 항구가 3개라서 삼포개항이라 하는데요, 왜인들이 드나들면서 무역을 할 수 있도록 해주는 유화정책이었어요. 이종무장군의 대마도 정벌이 없었다면 이와 같은 평화로운 결과는 생겨나지 못했을 겁니다.
김훤주
※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 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 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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