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마산1


진해의 원래 주인은 삼진 지역


이제부터는 마산 진해 창원 순으로 구체적인 역사를 살펴보도록 하겠어요. 마산부터 시작합니당~!! 지명의 역사를 살펴보면서 1908년 진해라는 이름이 짠~하고 등장을 했다는 거 기억하고 있지요


그렇다면 진해라는 지명이 갑자기 생겨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곳에서 옮겨온 것인지 이런 것도 궁금하지 않나요? 지명은 갑자기 생겨나기보다는 있었던 지명이 이리저리 합쳐지거나 사라지거나 사라진 지명이 다시 나타나거나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지요


그렇다면 진해의 원래 주인이 누구였을까? 마산 이야기를 시작하면서 진해 이야기를 하는 게 좀 수상하다? 그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완전 훌륭해요.^^

진해현 관아 사령청 뒤편 팽나무. 조금 더 읽어보시면 관련 내용이 나옵니다.

창원시 마산합포구 진동·진북·진전면을 사람들은 삼진(三鎭)’ 지역이라 불러요. ‘이라는 낱말이 세 번 들어가서 이렇게 말하지요. 이 삼진 지역이 바로 진해의 원래 주인이었어요. 진동과 진북은 진해의 동쪽과 북쪽을 뜻하지요. 삼진 중에 나머지 하나인 진전(鎭田)1914년 일제강점기 행정구역 통·폐합 때 창원부 진서(鎭西)면과 진주군 양전(良田)면이 합해지면서 생긴 이름이구요.


삼진 지역 일대가 진해였다는 사실은 창원에 살고 있는 사람들도 많이 몰라요. 그렇지만 삼진 지역을 진해라고 했던 역사는 꽤 오래 됐거든요. 조선 태종 시절인 1413년 진해라는 이름을 얻었어요. 진해현은 1896년 진해군으로 바뀌었다가 1908년 창원부로 합해지면서 역사에서 사라졌어요


진해라는 지명이 삼진에서 사라졌던 1908년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기억하나요? 앞에서 말한 적이 있는데~~ 맞아요!! 1904~05년 러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진해라는 이름을 웅천으로 가져간 그 사건이요!! 행정구역이 합치고 분리되는 일은 역사에서 흔한 일이지만 진해라는 지명이 바뀌는 과정은 좀 거시기했지요. 힘이 세다고 약한 사람 이름까지 뺏어가는 꼴이었으니 말이에요.

 

진해현 관아·진해향교가 진동에 있는 까닭


삼진에는 진해의 흔적이 지금도 남아 있어요. 1832년 세워진 진해현 관아는 201512월까지 진동면사무소 근처에 있었어요. 면사무소가 새로 건물을 지어 옮겨간 뒤에는 일대가 주차장으로 쓰이고 있지요


관아는 관원들이 업무를 보던 건물들을 말하는데 제각각 역할이 달랐어요. 동헌은 옛적 고을 원님이 업무를 보던 자리를 말해요. 진해현 동헌 이름이 화류헌(化流軒)이었는데 지금은 그냥 동헌(東軒) 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어요

동헌.

동헌을 중심으로 잘못을 저지른 사람들 잡아 가두는 형방소(刑房所=유치장), 요즘으로 치면 주차장인 마방, 허드렛일을 하던 심부름꾼(사령)들이 머물던 사령청(使令廳)이 남아 있어요. 원님이 일을 보던 동헌보다 사령청 건물은 허름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세월이 지난 지금은 사령청 뒤에 있는 팽나무의 늠름한 자태가 동헌 앞 오동나무를 압도하고 있답니다.(재밌지요~^^)


진동 관아 흔적 중에 가장 그럴 듯한 것은 삼진중학교에 남아 있는 객사(우산관牛山館) 주춧돌이지요. 객사는 임금의 궐패를 모시고 또 임금을 대신해 오는 벼슬아치들이 묵는 여관이었어요

사령청. 뒤편으로 팽나무가 살짝 보입니다.

궐패가 뭐냐구요? ~ 요즈음으로 치자면 대통령 사진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관공서에 가면 대통령 사진이 걸려 있잖아요. 옛날에는 카메라가 없었으니 대신에 대궐을 상징하는 궐패를 모셔놓고 절을 했지요


객사의 규모는 동헌보다 훨씬 커요. 사람들이 묵어야 했으니 당연히 그랬겠지요. 그런데 198352일 객사 건물이 홀랑 불타버려요. 불에 타버린 것은 정말 아쉬워요


하지만 다시 복원하는 건 반댈세~!! 왜냐구요~? 복원을 하려면 훗날 문화재로 이어질 만큼 잘 만들든지, 아니고 허접하게 복원할 것 같으면 차라리 그만두시라 그 말이지요. 줄지어 남아 있는 묵직한 주춧돌에서 느껴지는 감흥이 아주 특별해요. 친구들 꼭 한 번 찾아보시길~^^

진해향교 홍살문과 외삼문.

관아가 있는 고을에는 향교가 있었어요. ~ 향교가 뭐하는 곳인지 모르는 친구들도 많더라구요. 향교는 요즈음으로 치자면 공립 중·고등학교에요. 그렇다면 사립 중·고등학교는? 서원이요~~(딩동댕^^) 요즈음도 마을에 파출소도 있고 학교도 있고 우체국도 있고 그렇잖아요. 진해현 관아에서 직선거리로 1km 남짓 떨어져 있는 거리에 향교가 있었어요


조선시대 1414년 들어섰는데 임진왜란으로 불타버렸어요. 우리나라 문화재는 나무로 만든 게 많다보니 그놈의 불이 다 절단을 내버렸어요~^^:: 인조 때 새로 만들었으나 1910년 일제가 강점을 하면서 다시 철거를 당했지요

일제 강점으로 진해향교가 철거될 때 모시던 위패를 묻었다는 빗돌과 하마비(오른편)입니다.

1990년 복원되어 1995년 마산향교로 이름을 바꾸고 선비대학을 열어 지금도 활발하게 운영을 하고 있어요. 박제된 문화재가 아니라 살아있는 문화재로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지요.

 

옛 진해의 처음을 여는 진동 고인돌 유적


이제 진동리 유적지까지 가보기로 해요. 진해현 관아 자리를 조금 벗어나면 창원 진동리 유적이 나와요. 청동기시대 고인돌들이 대부분이니까 2000년 전에 만들어진 공동묘지지요

편평한 돌을 깔아 만든 무덤 위에 덮개돌을 올려놓은 독특한 모양입니다.

우리나라는 고인돌이 세계에서 가장 많이 있어요. 전 세계에 있는 고인돌의 60~70%를 차지한다니까 대단하지요. 그러다보니 고인돌을 어렵지 않게 볼 수가 있어요. 하지만 50~60년 전만 해도 그게 고인돌인지 뭔지 몰랐다고 해요. 그냥 돌이려니 생각을 했으니까요. 전라남도 화순 고인돌 유적지는 유네스코가 정한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가 되어 있어요.


진동에 있는 고인돌 유적지는 1980년에 발견이 되었는데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제는 되어 있지 않지만 그에 못지않을 정도로 독특한 형태와 크기의 고인돌이 아주 다양하게 있어요


그 중에서 공룡발자국 화석을 담고 있는 고인돌이 있는데 고인돌 위에 공룡발자국이라니~ 생각만 해도 재미있지 않나요^^ 어른 발보다 더 큰 자죽이 뚜렷하게 찍혀 있어요. 옛날 사람들이 공룡발자국인지 뭔지도 모르고 들고 와서 무덤으로 사용했을 텐데 알고 보니 그게 공룡발자국인 거에요. 하하~^^ 

공룡발자국화석 고인돌.물이 고여 있는 데가 공룡발자국 화석.

진동면 고현리 100-2100-3번지 일대 바닷가 공유수면 아래 바위에는 공룡 20마리의 발자국 400개가 지금도 선명하게 남아 있으니 고인돌에 공룡발자국이 있는 게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아요.


이것 말고도 둥그스름하게 흙을 쌓아올린 다음 작고 편평한 돌을 깔아놓은 위에 고인돌이 우뚝 자리잡고 있는 무덤은 우리나라 다른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독특한 모양을 하고 있어요


그냥 아무렇게나 생긴 돌이 대부분인 다른 고인돌들과는 달리 제각각 다른 모양의 고인돌이 모여 있어 돌아보는 재미가 아주 쏠쏠한 곳이랍니다. 그런데 아쉬운 건 가까운 주변에 이런 훌륭한 곳이 있다는 걸 친구들이 많이 모른다는 거지요

이런 모양 고인돌도 다른 유적지에서는 찾아보기 어렵답니다.

발굴 당시 고려시대 도로 유적도 확인되었는데 흙을 일부러 다진 다음 잔돌을 깔았고 양옆에는 물길의 자취가 남아 있어요. 아울러 청동기시대 밭이었던 유적도 발견되었고요. 여기 일대가 2000년 전에도 살기 좋은 장소였으며 700년 전에는 교통요지이기도 했다는 증거라고 하네요


옛 진해와 마산은 물론 통합 창원시 전체에서 가장 그럴 듯한 역사문화유적이라 할 수 있답니다. 공원으로 조성해놓아 가족들이 나들이하기도 좋고 역사 탐방지로도 아주 좋아요.

 

기미년 삼진의거와 팔의사 창의탑


이번에는 창의탑으로 이동을 합니당~^^ 고현마을 들머리에는 팔의사 창의탑이 서 있어요. 차를 타고 지나가다보면 눈에 띄지만 사람들은 별 관심을 가지지 않아요. 뭐 그런저런 탑이려니 하지요. 1919년 삼일운동 때 정말 많은 곳에서 사람들이 만세를 부르며 저항을 했지요


삼진에서도 328일과 43일 두 차례 의거가 일어났어요. 함안군북의거, 합천삼가장터만세시위와 더불어 규모가 아주 큰 시위였어요. 그 당시 2000명이 넘는 사람을 상대로 일제는 총을 쏘면서 강제 진압을 했지요. 이때 많은 이들이 죽거나 다쳤는데 그 분들을 기리기 위하여 주민들이 1963년에 세운 탑이랍니다

진해읍성 남은 자취입니다. 옛 진동면사무소 돌담장이 그것이지요.


그런데 안타깝게도 2013년 옛 탑이 철거되어 없어지는 일이 벌어졌어요. 이런~!!! 주민들이 십시일반 모은 정성이 그렇게 사라지고 말았지요. 아무리 새 것이 좋다고는 하지만 무조건 새 것이 좋은 건 아니잖아요~!!


작은 마을에서 2000을 넘는 사람들이 의거에 동참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이 무엇일까? 질문을 하는 친구가 있다면 정말 휼륭해요.(완전~!!) 4.3 삼진의거에는 기억해야 할 배경이 있어요. 진전면 오서리에 있는 경행재(景行齋)가 바로 주인공이지요


이 경행제와 삼진의거는 밀접한 관련이 있어요. 1867년 만들어진 경행재는 1910년 일제가 강점을 하자 경행학교로 바뀌어요. 신교육의 터전으로 겨레의 자주성과 독립의 당위성을 심어주는 민족교육의 보금자리역할도 함께 한 것이지요중국 상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에서 활동하다 순국한 죽헌 이교재 선생과 기미년 삼진의거의 주역 가운데 한 분인 백당 권영조 의사가 여기서 공부를 했다는 것이지요


이런 학교를 일제가 좋아할 까닭이 없겠지요. 1927년 경행학교는 일제에 의해 강제로 문을 닫게 돼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우리가 끈질기게 살아남을 수 있는 저력이 곳곳에 이렇게 숨어 있었던 거지요.


김훤주


※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 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 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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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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