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전투


사천해전에 거북선을 처음으로 띄우다


드디어 이순신장군을 이야기할 차례가 되었어요. 이순신장군은 남해안 곳곳에서 대활약을 펼쳤지요. 남해안을 돌아다니다보면 이순신장군의 흔적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니까요. 그렇다면 바다의 고장 사천에서는 과연 어떤 활약을 했을까 궁금하죠? 우리 친구들, 이순신장군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이 바로 거북선이지요? 그 유명한 거북선이 실제로 사용된 최초 전투가 바로 사천해전이라는 사실!! 잠깐~~ 여기서 상식 한 가지!! 임진왜란 때 활약한 거북선은 모두 몇 척이었을까요? 정답은 3척이었어요. 에게~ 꼴랑 3척이요? 이렇게 묻는 친구들이 많은데요, 생각보다 많지가 않았어요.


거북선이 출동한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이 어떻게 활약을 펼쳤는지 알아봐야겠죠!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그해 529일부터 이틀 동안 사천해전이 치러집니다. 왜적은 전선 12척을 대어놓은 채 선진리성에 올라가 있었어요. 이순신장군은 물러나는 척 속여서 왜적을 바닷가로 내려오도록 유인하는 데 성공합니다. 그런 다음 밀물이 들자 거북선을 앞세워서 돌진 앞으로!!!!~ 그렇게 왜군을 무찌르고 적선을 모두 불태웠어요.

선진리왜성에 있는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기념비.


이순신장군은 사천해전에서 밀물을 이용해서 승리를 하는데 여기에 이순신장군의 불패 신화가 숨어 있답니다. 불패는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거잖아요. 싸움에서 한 번도 지지 않았다는 것은 아주 대단한 일입니다. 이순신장군은 진짜 단 한 번도 패배한 적이 없어요.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이순신장군은 자연의 이치를 잘 이용했고 또한 질 만한 싸움에는 나서지 않았지요. 잘 싸우는 것도 훌륭한 일이지만 무모한 싸움을 하지 않는 것 또한 그 못지않게 뛰어난 전략이라는 사실을 이순신장군이 보여주고 있는 거지요.


근데 사천해전에서 이순신장군에게는 아주 나쁜 일이 일어났어요. 왼편 어깨에 총알을 맞아 크게 상처를 입었는데 그 탓에 두고두고 후유증으로 고생을 하게 돼요. 요즘처럼 좋은 약이 많은 시절이라면 깨끗하게 치료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가 못했어요. 이처럼 거제 옥포와 창원 합포, 고성 적진포에 이어 사천에서도 연전연승을 함으로써 왜군의 기세를 확실하게 꺾어 놓기는 했지만 개인적으로는 그런 아픔을 겪었던 해전이기도 하지요.

 

사천 사람이 세운 이순신장군 동상

이순신장군 동상.

사천해전을 기념하여 용현면 연호리 출신 재일동포 윤익성 씨가 이순신 장군 동상을 1976411일에 세웠어요. 동상 앞에 있는 표지석에는 주권국가가 된 고향 땅에 대성 금의환향하여 충무공께서 거북선을 출동시켜 왜적선을 격멸시킨 유서 깊은 선진해전지 입구 이 자리에 충무공의 유비무환 정신을 사표로세운다고 새겨져 있지요.


원래는 선진리성 들어가는 길목이 되는 용현면 선진리 신기마을 옛 도로의 삼거리(석거리) 한가운데 있어서 누구나 지나가면서 손쉽게 우러러 볼 수 있었어요. 그런데 2003년 넓게 새 도로를 내면서 서남쪽으로 700m 남짓 떨어진 4차로 한 켠 구석으로 옮겨졌어요. 선진리성으로 가다가 보면 오른편인데 눈에 잘 띄지 않아요. 그래서 좀 아쉬워요.


우리나라는 곳곳에 이순신동상이 많아요. 모습이 제각각인데 서울 광화문 세종로에 세워져 있는 이순신장군 동상은 거만하고 서슬이 퍼런 모습이어서 바라보기가 불편할 때가 있어요. 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근처 도롯가에 늘어서 있는, 재질이 싸구려인 이순신상은 광화문 동상을 그대로 베껴놓은 모습이지요. 그런 데에 비하면 사천에 세워진 이순신장군 동상은 인자한 할아버지 모습을 하고 있어서 마음이 절로 푸근해진답니다. 친구들도 꼭 한 번 이 동상을 찾아가 보세요. 이순신장군과 함께 기념사진도 찰깍~~^^

 

왜적의 전략기지였던 선진리왜성


지금부터는 선진리왜성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집중 집중 ~!!!) 우리나라에는 곳곳에 성이 많이 있어요. 어떤 것은 산성, 혹은 읍성이라 하고 어떤 것은 왜성이라 하고 이름이 각각 달라요. 읍성이나 산성은 외적을 방어하기 위해서 우리가 쌓은 성이라면 왜성은 왜적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자신들의 진지를 구축하기 위해 쌓은 성입니다. 선진리왜성은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이 사천이 왜군의 거점이기도 하였음을 일러주는 지표라고 할 수 있어요.

선진리왜성.


선진리왜성을 왜구가 처음부터 하나하나 쌓아올린 것은 아니구요. 그 자리에 고려시대부터 임진왜란까지 흙으로 쌓은 토성이 있었는데 그 바탕에 왜성을 쌓아올린 거지요. 사천에는 사천읍성도 있지만 일본 본토와 연락하기 위해서는 내륙에 있는 사천읍성보다 바닷가에 있는 선진리성이 훨씬 조건이 좋은 전략적인 이유가 있었어요. 그래서인지 왜적들은 사천읍성을 옛 구()자를 써서 사천구성이라 하고 자기네들이 새로 쌓은 선진리왜성을 새 신()자를 써서 사천신성이라 했어요. 정말 지 마음대로지요.^^


여기서 또 알아두면 별로 쓸데없는 상식 하나 추가요~!! 우리나라 성과 왜성을 구분하는 방법입니다. 일본성과 우리 성은 한 눈에 바로 쉽게 구분이 돼요. 일본성은 일단 70도 정도로 기울어져 있어요. 일본이 지진이 자주 일어나니까 쉽게 무너지지 않도록 튼튼하게 쌓기 위한 방법이라고 하지요. 반면에 우리 성은 성벽이 거의 직각이에요. 또 우리 성이 한 겹이라면 일본 성은 겹겹으로 성 안에 성이 있고 또 성이 있는 식이랍니다.


친구들, 어른이 되면 외국으로 여행도 가고 그럴 거잖아요? 우리나라에 비하면 중국이나 일본은 문화재가 일단 규모면에서 우리 것을 압도해요. 우와 대단하다~ 그렇게 생각을 하기 쉬운데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일본 성이 규모는 대단하지만 그 성을 쌓기 위하여 얼마나 많은 백성들이 얼마나 고생을 하고 피눈물을 흘렸는지 생각해 보면 그 규모를 마냥 부러워할 수만은 없는 일이지요. 그런 안목을 우리나라 문화재를 공부하면서 배운다는 것은 아주 훌륭한 일이랍니다.

 

선진리성의 벚꽃놀이 배경에는 일본이 있다


일제강점기 일제가 우리나라 문화재를 엄청 많이 망가뜨렸어요. 그런데 선진리왜성은 19365월 조선총독부에서 고적 제81호로 지정하여 보호를 했어요. 우리 문화재를 망가뜨리기 위하여 혈안이 되어 있던 일본이 왜 그랬을까요? 그 이유는 왜군이 조선·명나라의 연합군과 싸워 크게 물리친 승전지이기 때문이지요. 조선 정기룡장군과 명나라 동일원장군이 함께 나선 4만에 이르는 조명연합군이, 시마즈요시히로장군이 이끄는 7000밖에 안 되는 왜군에게 참패한 사천성전투랍니다.


지금 선진리왜성에서는 봄철마다 벚꽃잔치가 벌어집니다. 사람들은 활짝 핀 꽃을 보고 즐거워하지만 그 사연을 들여다보면 슬프기 짝이 없어요. 사천성전투의 승자 시마즈요시히로의 후손들이 1918년 이 곳을 공원으로 가꾸기 시작하지요. 사천신채 전첩지비(四川新寨戰捷之碑)라고 새긴 빗돌까지 세우고 조상을 기렸어요. 빗돌은 해방되고 나서 주민들이 깨어 없앴고 지금은 그 자리에 6·25전쟁 도중 숨진 공군 장병을 위로하는 충령비가 세워져 있어요. 가까이에는 1978년 세운 이충무공사천해전승첩비도 있지요.

선진리왜성 천수각터. 왜성에서 천수각은 으뜸 장수가 머물면서 전투를 지휘하는 곳입니다.


빗돌을 없앤다고 아픈 역사까지 사라지는 건 아니잖아요? 해방이 된 이후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일제의 흔적을 지우기에 정신이 없었어요. 좋은 것만 가치가 있는 것이 아니라 안 좋은 것도 남겨두어 흔적을 찾고 기억을 새기는 데 도움이 된다면 훌륭한 문화재가 된다는 사실을 그때는 몰랐던 것 같아요. 차라리 그 빗돌을 그대로 두어 전쟁의 아픔을 두고두고 새겼다면 후손들에게 더 많은 것을 알려주지 않았을까 싶은 아쉬움이 아주 많이많이 남는답니다.

 

치욕스러운 패전 사천성전투


치욕스러운 패전으로 기록된 사천성전투에 대해서 좀 이야기를 해야겠지요. 조명연합군은 1598928일 사천읍성을 한밤중에 기습하여 탈환하고 101일에는 곧바로 선진리왜성을 향해 진군을 합니다. 상식적으로 생각을 해보면 절대 질 싸움이 아니었어요. 그렇지만 결과는 참패였지요. 그래서 싸움은 끝나 봐야 안다고들 하는 모양입니다.


왜군은 적은 숫자로 연합군 식량창고를 불태우고 지뢰까지 묻으면서 선방을 해요. 그러다 연합군이 지쳐 나자빠지자 복병으로 대열을 끊어 교란시킵니다. 그 와중에 연합군은 폭약상자가 터지는 사고까지 겹치게 되니 쯧쯧~!! 결국 조명연합군은 엄청난 사상자를 남기고 패퇴하고 말았는데요, 이 때 숨진 병사를 <선조실록>7000~8000명으로 적었고 일본은 38000을 웃돈다고 주장합니다.


그건 그렇다 치고 좀 아쉬운 건 2006~07년 선진리왜성을 복원하면서 앞선 시기 쌓았던 토성이 꽤 망가지고 말았어요. 깔끔한 것도 좋지만 옛날의 흔적이 남아 있는 게 훨씬 더 가치가 있는데 말이지요.

 

사천읍성 수양루. 1598년 사천전투에서 조명연합군은 사천읍성은 되찾을 수 있었으나 선진리왜성까지 차지하지는 못했습니다.

아직도 진행 중인 조명군총의 비극


사천성전투 패전의 쓰라린 흔적은 선진리왜성 근처 조명군총(朝明軍塚)’으로 선명하게 남아 있어요. 조명군총은 사천성전투에서 목숨을 잃은 조선과 명나라 병사들의 무덤이랍니다. 여기서 잠깐 상식 하나 추가~!! , , 릉은 모두 다 무덤을 뜻하는 한자랍니다. 그런데 쓰임새가 저마다 달라요. 이걸 구분할 줄 아는 친구!! 총과 분은 무덤의 주인을 알 수 없지만 릉은 주인을 알 수 있다. 딩동댕~~^^


다시 조명군총 이야기 계속합니다. 사천성전투에서 승리한 왜군은 조선과 명나라 군사들 시신에서 귀와 코를 잘라 일본에 전리품으로 보냈고 머리는 베어내 성 앞에 쌓고 묻었답니다. 실제로는 몸통도 같이 묻었겠지요. 귀와 코는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살았던 교토의 토요쿠니신사 앞에 묻혀 이총(耳塚:귀무덤)이 되었습니다. 커다란 왕릉처럼 보이기도 하는 조명군총 옆에는 자그마한 이총도 있어요. 1992년 사천문화원 등이 일본 교토에 가서 원래 이총에서 흙을 떼어와 여기에 안치하고 표지판을 세웠지요.


친구들, 우리는 조명군총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해야 할까요? 일본이 밉다~ 맞는 말입니다. 그러나 거기서 그치면 아쉽지요. 우리가 이겨야 한다~ 지는 것보다는 이기는 것이 나으니까요. 전쟁은 잔인하다~ 두 말하면 잔소리지요. 전쟁은 이기고 지고가 따로 없어요. 그 자체가 비극이니까요. 우리는 조명군총을 보면서 한 가지 더 생각을 할 수 있어야 해요.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 이 말은 가장 훌륭한 진리랍니다.


명나라가 아무 조건이나 대가 없이 조선을 도와 군사를 내보냈을까요? 물론 명나라 병사들의 영혼은 무죄입니다. 위에서 시키는대로 낯선 이국땅까지 와서 아까운 목숨을 잃었으니까요. 권력을 쥐고 있는 사람들의 이해타산에 따라 그들의 백성을 조선에 보낸 거지요. 이런 조건으로 명나라는 조선에 대하여 어마어마한 대가를 요구합니다. 전쟁이 끝난 후에도 그 대가를 지불하기 위해 겪었던 고초가 결코 작은 것이 아니었어요.


우리는 지금도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가로 살아가고 있지요. 만약 우리가 미국을 비롯한 다른 나라에 의존해서 통일을 하거나 전쟁을 한다면 그 나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가 없어요. 어쩌면 사실상 속국이 될 수밖에 없을지도 모르지요. 그렇기 때문에 스스로 힘을 키워야 해요. 400년 전의 역사는 끝난 것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라는 사실을 조명군총을 통해 배워야 하지 않을까요?

 

조명군총. 사천전투에서 숨진 조선과 명나라 군사들을 한꺼번에 묻은 무덤.

노량해전 이순신장군이 지다


그러면 이제 사천성전투 이후의 결과를 정리해 봅시다. 사천성전투는 임진왜란 막바지에 일어난 전투였어요. 임진왜란을 일으킨 도요토미히데요시가 갑자기 죽는(1598818) 바람에 왜군은 싸울 뜻을 잃고 있었어요. 그런 와중에 선진리성에서 조명연합군이 참패했던 거지요.


싸움에서 이기다 보니 기세가 올랐나 보네요. 선진리성에 있던 왜군은 전남 순천에 포위되어 있던 왜군을 구출하려고 1118일 밤 남해와 하동 사이 좁은 해협 노량으로 나아갑니다. 남해와 고성, 부산에 있던 왜군도 함께 집결을 합니다. 병사 6만 남짓에 전선 600척 가량으로 우리보다 훨씬 우세했지요.


그러면 우리 편은 어떻게 대응을 했을까요? 순천왜성을 포위하고 있던 조명연합수군이 노량으로 진군하여 기다렸습니다. 마침내 시작된 이 해전에서 이순신장군은 지금 전쟁이 한창 급하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장렬하게 전사합니다. 유명한 노량해전입니다. 왜군은 완패하고 임진왜란 7년 전쟁이 마감됩니다. 노량해전 바로 전에 일어났던 전투가 사천성전투였던 거지요. 이렇게 연결이 된답니다.


김훤주


※ 2017년 사천시청 재정 지원으로 사천문화재단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사천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사천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고를 썼는데요 그 내용을 이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당시 저희 경남도민일보는 아이들로 하여금 역사문화유적을 사천 지역 초등학생들과 함께 단체로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10차례 진행하여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그렇게 못하고 개별로 엄마아빠랑 둘러본 경우는 사진과 글을 올리게 하여 상품권을 선물하는 식으로 피드백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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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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