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세 가지 열쇠말로 푸는 사천 지역사 ①갯벌1

김훤주 2018. 5. 25.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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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고 자란 우리 사천 이 정도는 알아야지~


머리말

 

내 고장 사천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나요?


내 고장 사천에 대해서 얼마나 많이 알고 있나요?” 이런 질문을 받았을 때 손을 번쩍 들고 , 잘 알고 있습니다!”라고 큰 소리로 대답을 할 수 있는 친구들이 얼마나 있을까요? 아마도 대부분은 고개를 갸웃거리거나 쭈뼛쭈뼛 머뭇거리거나 그럴 것 같은데요.


요즘 세상 참~ 좋아졌다!!” 어른들이 이렇게 이야기하는 걸 친구들도 종종 들었을 거예요. 자그마한 손바닥 안에서 핸드폰으로 세상 구경을 다 할 수 있으니까 말이에요. 엄마 아빠들이 어렸을 때와 비교를 해 보면 보고 듣는 게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요즘 친구들은 다들 천재고 박사들 같아요. 엄마 아빠들은 교과서에 실려 있는 내용 말고는 잘 모르고 살았거든요.


그렇다면 요즘 친구들이 세상에 대해서는 많은 지식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유독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 까닭이 뭘까요? 정보가 부족해서~? 아니면 관심이 없어서~? 정보가 부족해서 내 고장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생각하는 친구들은 당근 없겠지요. 우리는 지금 정보의 홍수 속에서 살고 있잖아요. 그렇다면 정답은? 네 맞아요. 관심이 없어서랍니다. 굳이 내 고장에 대해서 꼭 알아야 할 이유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인 거죠.


사실 어른들한테도 우리 어린 친구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할 자격이 별로 없어요. 왜냐구요? 그 잘못이 어른들한테 있거든요. ‘사람은 나면 서울로 보내고 말은 나면 제주도로 보내라.’ 혹시 이 속담 알고 있나요? 우리나라는 서울에 살아야 성공을 했다고 쳐 주는, 일단 그런 분위기가 있어요. 서울에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이고 집값은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고 이게 다 서울중심주의 때문이잖아요.


나중에 어른이 되어도 나는 사천에 남아서 행복하게 살 거야.’ 이런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혹시 있나요? 물론 있기도 하겠지만 대부분 친구들은 아마도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것 같아요. 할 수만 있다면 서울로 가서 자리를 잡고 보란 듯이 성공을 할 거야, 다들 그런 생각을 하지요. 그러다 보니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여기는 서울로 뛰어오르기 위한 발판 혹은 정거장 정도로만 여기게 되는 거지요.

 

우리는 왜 나고 자란 내 고장에 대해서 잘 알아야 할까요?


요즈음은 세계화시대라고들 하잖아요. 우리나라에 살고 있는 외국인이 200만이 훨씬 넘었고 우리나라를 찾는 관광객 또한 한 해에 1000만을 훌쩍 넘긴 지가 오래 됐어요. 그런데 그 외국인 관광객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기를 쓰고 찾아가는 곳이 어딘 줄 알아요? 그럴 듯한 놀이동산? 멋진 레스토랑? 높은 빌딩? 그런 거 절대 아니라는 정도는 여러분들도 잘 알고 있죠. 맞아요! 가장 한국다운 모습을, 한국만의 맛을, 한국적인 멋을 찾아다니면서 브라보!” “언빌리버블!” 하고 외친답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이야기를 해 볼게요. 세계화와 국제화는 앞으로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 여러분이 어른이 되었을 때는 정말 국경의 구분이 없어져 있을지도 몰라요. 그렇다면 그런 미래를 대비하여 지금 우리 친구들이 해야 할 일이 뭘까요? 외국에 대해서 많이 아는 거요? 물론 그것도 틀린 건 아니죠. 하지만 그보다는 바로 우리 스스로를 잘 아는 거예요.


세계 각국 사람들과 뒤섞여 살아도 그 속에서 중심을 잡고 주인 노릇을 하며 살 수 있는 방법은 우리가 우리 뿌리를 튼튼하게 내리는 일이여요. 그래서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우리 것 우리 지역에 대한 이해와 공부가 필요하답니다. 그건 나고 자란 고장에서 살 때도 필요한 것이지만 고장을 떠나 서울이나 아니면 외국에 나가 살 때는 더욱더 필요한 것이지요.


사천 공부를 시작하기 전에 이야기가 좀 길었나요^^; 그런데 우리가 왜 우리 지역을 잘 알아야 하는지 앞으로 어떤 공부가 중요한지 정도는 우리 친구들이 알고 있어야 내 고장 공부를 좀 더 열심히 할 것 같아서 말이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장 싫어하는 잔소리가 좀 길어졌답니다~^^::

 

1장 갯벌


갯벌의 대표 선수는 순천만? 서해안 갯벌이라구요?


, 그러면 이제 우리 고장 사천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시작해볼까요! 시작하면서 또 질문 들어갑니다. 이쯤 되면 내 별명을 질문의 대마왕으로 불러도 되지 않을까요~사천 하면 가장 먼저 무엇이 떠오르나요?” ‘비행기!’ 빙고~!! 그 정도면 초딩 수준으로 아주 모범답안입니다. 혹시 갯벌이라고 답한 친구들이 있을까요? 그 정도면 거의 대학생 수준(박수 짝짝짝). 갯벌을 빼고는 사천을 이야기할 수 없을 정도니까 사천의 대표선수로 꼽을 만하답니다.


부모님과 함께 혹시 순천만에 놀러간 기억이 있는 친구들 있나요? 순천만은 전라남도 순천에 있지요. 가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하고 없는 것 같기도 하고 가물가물하다고요? 가물가물하면 일단 안 간 걸로 치고~(통과) 갯벌 하면 사람들은 흔히 순천만 갯벌, 서해안 갯벌을 먼저 떠올리지요.


잘 다듬어지기로 치자면 순천만이 1등이고 광활하기로 치자면 서해안 갯벌이 1등이긴 하지요. 근데 사천에 어마어마한 갯벌이 있다는 사실을 정작 우리 경남 사람들도 잘 모른다는 것은 무지 안타까운 일이에요. 이런 걸 두고 남의 떡이 더 커 보인다혹은 등잔 밑이 어둡다그런가요? 속담 공부도 중간중간 하면서 갑니당.~^^

경남 갯벌의 절반이 사천에 있답니다.

 

경남 사람도 잘 모르는 사천의 드넓은 갯벌


사천 갯벌의 규모가 얼마나 광활하냐면요. 경남 전체의 갯벌이 100이라면 절반인 50 이상이 사천에 있다고 해도 틀리지 않을 정도예요. 이 광활한 갯벌을 토대로 들어선 게 바로 사천의 항공우주 산업이지요. 이쯤에서 바다인 갯벌과 하늘을 배경으로 하는 항공우주 산업이 무슨 상관이지? 이런 궁금증을 품는 친구들이 있다면 완전 멋짐 멋짐~!! 앞으로 사천 이야기를 계속 듣다보면 정답이 나온답니다.


그것 말고도 갯벌이 사천 사람들의 삶을 얼마나 풍요롭게 해주었는지 헤아릴 수가 없을 정도지요. 갯벌은 수많은 생명체가 살아 숨 쉬는 터전이기도 하고, 갯가 사람들이 먹고 사는 터전이기도 하답니다. 갯벌에서 사는 낙지, 개불, , 조개, , 속 등은 귀중한 양식이 되어주었고 시장에 내다팔아 자식들 공부를 시켜주기도 했으니까 참 고마운 갯벌 아닌 가요!


그런데 이제는 사정이 좀 달라졌어요. 갯벌을 매립하기도 하고 공장을 위한 단지들이 들어서면서 갯벌이 점점 죽어갔으니까요. 갯벌에서 누리는 풍요로움과 공장이 들어서면서 넉넉해진 생활을 비교하는 건 사람마다 생각이 다를 수 있겠지요. 자연을 보존하느냐 아니면 개발을 해서 인간의 삶을 편리하게 하느냐 하는 문제를 두고 여전히 의견이 분분하지요. 여러분 생각은 어느 쪽인가요? 갯벌이라는 터전을 두고 이렇게 보든 저렇게 보든 갯벌이 인간 생활에 보탬을 주고 영향을 주는 것은 분명한 것 같아요.

 

사천의 바다는 보물 창고다


갯벌뿐만이 아니라 사천만은 바다도 아주 귀한 존재랍니다. 이 장면에서 질문 들어오면 아주 훌륭합니다.^^ “바다면 다 똑같은 바다지 귀한 바다 천한 바다가 따로 있나요? 사람도 차별하면 안 되는데 바다를 차별하다니~근데 사람도 훌륭하고 멋진 사람이 있잖아요. 그처럼 바다도 멋진 바다가 따로 있어요. 사천만 얕은 바다에는 잘피 같은 물풀이 풍성하게 자라고 있어요. 이렇게 물풀이 우거지면 어떤 좋은 점이 있냐구요? 물고기들은 꼭 이런 곳에다 알을 낳거든요. 또 그런 알에서 깨어난 어린 물고기들이 노닐기 좋은 데도 물풀이 우거져 있는 곳이랍니다. 남해바다를 풍성하게 하는 물고기들의 으뜸 산란장이 바로 사천만인 거지요. 알고 보면 사천만, 진짜 멋진 바다 맞지요!


그렇다면 이번에는 눈에 담을 수 있는 아주 근사한 바다를 소개할게요. 용현면의 종포에서 대포에 이르는 갯가 길을 걸어본 적이 있나요? 아마 사천에 살면서도 걸어보지 않은 친구들이 많을 것 같은데요, 해질 무렵 썰물 때면 끝없이 펼쳐지는 갯벌이 온통 붉디붉어서 아주 환상적이랍니다. 그 모습 앞에서 우와~ 감탄하지 않는 친구들은 시인이 되겠다는 꿈은 절대 꾸지 않는 게 좋답니다.^^ ‘가까운 곳에 이런 훌륭한 곳이 있다니!’ 싶을 거예요. 아기자기하게 꾸며 놓은 금문소공원에서는 갯벌에 들어가 게나 고동을 잡을 수도 있답니다. 뻘칠을 하며 갯벌에서 노는 즐거움도 쏠쏠하답니다.

사천만 금문소공원 잿벌에서 즐겁게 노는 아이들 모습.

철새들의 정거장, 광포만 갯잔디


사천만 갯벌 이야기는 이어집니다. 이렇게 이야깃거리가 많다는 건 그만큼 사천의 갯벌이 빛난다는 뜻이겠지요. 이번에는 사천만 서쪽 부분을 이루는 광포만 갯잔디 로 갑니다. 광포만 갯잔디는 규모에서 보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답니다. 덕분에 재두루미 같은 겨울철새들한테 정거장이 되었어요. 겨울철새들은 동쪽 부산의 낙동강 하구와 서쪽 전남 순천의 순천만을 오가는데 그 가운데 광포만 갯잔디가 없었다면 어땠을까요? 기나긴 여정에 부상자 아니~ 부상조나 사망조가 속출하지나 않았을까요.^^ ㅎㅎ


그렇다면 갯잔디가 어떻게 새들의 정거장이 될 수 있는지도 살펴봐야겠죠. 갯잔디에는 기수갈고둥이나 대추귀고둥처럼 크고 작은 조개들이 옹기종기 모여 살고 있어요. 이런 조개들은 먹이사슬의 가장 낮은 부분에 있으면서 철새를 비롯한 다른 여러 생물들한테 소중한 먹이가 되어줍니다. 말하자면 이 조그마한 것들이 생태계가 온전하게 유지될 수 있도록 떠받쳐주고 있는 셈이에요. ‘세상에 쓸모없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이런 이야기 들어본 적 있지요? 잘 생기고 공부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만 중요하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는 것을 이런 생태계를 통해서 꼭 배워야 해요. 그러니까 여러분은 제각각 좋은 점을 가진 다 귀하고 소중한 존재들이랍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광포만의 갯잔디 군락.

갯잔디와 더불어 살고 있는 게 이야기도 재미있답니다. 게는 여러 가지 오염물질로 범벅이 된 펄을 입으로 집어넣어 흙은 다시 깨끗하게 내보내고 오염물질은 삼킵니다. 우리 인간한테는 오염물질이지만 게한테는 그것이 양식이 되거든요. 종류도 다양해서 칠게, 콩게, 길게, 방게, 농게, 붉은발말똥게, 흰발농게, 갯게 등등 휴~ 숨차다~!! 이렇게 많은 종류의 게를 흔히 볼 수 있는 데가 바로 사천만·광포만이랍니다. 영덕대게, 꽂게, 킹크랩처럼 몸값이 비싼 건 아니지만 이들이 자연을 정화하는 일은 아주 위대하답니다. 그러고 보면 이런 사소한 생명체의 활약을 통해 배우는 것이 엄청난 것 같지 않나요!


사천만을 이렇게 풍성하게 만드는 비밀은 사천만으로 흘러드는 풍부한 물줄기에 숨어 있어요. 여러 갈래로 물줄기들이 흘러들면서 흙과 모레를 부지런히 실어 날라 갯벌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이지요. 좌룡천, 백천, 송지천, 용정천, 죽천천, 사천강, 중선포천, 가화천, 묵곡천, 목단천, 곤양천, 서포천, 구랑천 등등 혹시 이 중에서 친구들이 살고 있는 동네로 흐르는 하천이 있나요? 무심히 흐르는 물길이 이렇게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것을 그동안에는 잘 몰랐죠!

 

사천만에 살고 있는 멸종위기동물 길게.

조선 선비들의 지리산 유람 출발점, 사천 갯벌


이렇게 갯벌이 광활하다보니 갯벌에 얽힌 역사도 이야기가 아주 많아요. 옛날에는 지리산을 등산하는 출발점이 사천이었어요. 이렇게 이야기하면 우리 친구들이 좀 헷갈릴 수도 있겠는데요. 사천만 갯벌 하고 지리산 등산 출발점이 무슨 상관이었을까 싶지요?


지금 사천만 바다는 갯벌이 넓어 어지간한 배는 들어올 수 없을 정도로 깊이가 얕은 곳이 많은데 말이지요. ~ 설명 들어갑니다. (다들 주목 주목^^) 밀물 때 배가 들어옵니다. 물에 떠 있던 배는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될까요? 썰물이 되면 물이 빠지니까 갯벌 위에 정착하게 되겠지요.


그러니까 굳이 거창하게 부두를 만들지 않아도 갯벌이 자연적인 선착장이 되어줍니다. 그러다 다시 밀물이 들면 배를 띄우는 거지요. 밑바닥이 뾰족하고 모터로 프로펠러를 돌려서 그 힘으로 움직이는 요즘 배를 두고 보면 수상하기 짝이 없는 방식이지만 옛날 배는 바닥이 편평했고 프로펠러로 돌리는 것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가능했답니다.


지금으로부터 450년 남짓 이전인 155848, 여러 선비들이 사천에 있는 쾌재정에 모여들었어요. 쾌재정은 지금 두원중공업 가까운 축동면 구호리 언덕배기에 있어요. 구암 이정(1512~71) 선생과 남명 조식(1501~72) 선생을 비롯한 당시 경남 지역의 이름난 선비와 벼슬아치들이었어요.


바로 지리산 유람을 떠나기 위해서였습니다. 지금 같으면 꿈에서도 생각할 수 없는 일이지만 그때는 쾌재정 앞 갯가에서 배를 탄 다음 곤양 앞바다를 지나고 섬진강을 거슬러오르면서 하동·악양을 거쳐 화개에서 내리고는 지리산 자락 쌍계사로 들어갔답니다. 어때요, 대단하지 않나요?


남명 조식 선생은 퇴계 이황, 율곡 이이와 함께 조선 시대 3대 유학자로 꼽는답니다. 홍의장군으로 유명한 의병장 곽재우의 스승이 바로 그 분이에요. 구암 이정 선생도 남명보다 나이가 열 살 넘게 아래였지만 그래도 서로 마음을 터놓고 벗으로 삼을 만큼 대단한 인물이었어요.


그리고 남명 조식 선생은 합천이 고향이었고 구암 이정 선생은 사천이 고향이었어요. 구암 이정 선생님은 일찌감치 벼슬길에 나서 선산부사, 청주목사, 순천부사, 경주부윤 등을 지내면서 선정을 베풀었다고 알려져 있어요. 요즘으로 치자면 능력 있고 청렴한 고위공무원이었다는 말씀입니다.


또 훌륭했던 점은 말년에 조정에서 불러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에 구암정사를 짓고 제자들을 모아 가르쳤다는 거예요. 더 큰 것 더 많은 것을 갖고 싶은 게 사람의 욕심이잖아요. 이런 것만 봐도 이 분의 인품을 짐작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구암이라는 이정 선생님이 썼던 호()에 얽힌 이야기도 재미있답니다. 호는 요즘으로 치면 별명인데, 옛날에는 자기 사는 마을 이름을 허물없이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정 선생님도 마찬가지였는데 지금도 남아 있는 사천읍 구암(龜巖)리가 바로 그 이정 선생이 태어난 고향이에요. 고향이 바로 이정 선생님의 호가 된 것이지요.


어쨌거나 조선 선비들이 지리산 유람에 나섰던 그 뱃길이 지금도 살아 있다면 아마도 최고의 관광코스가 되지 않았을까 싶어요. 이제 쾌재정은 흔적만 남게 되었고 그 앞으로 중선포천이 흐르지만 배가 다니지는 않아요. 섬진강도 수량이 줄어들어 배를 타고 오르내리기는 어렵구요


하지만 옛날에는 이런 물길을 따라 교통로가 열렸어요. 그래서 사천만 갯벌에서 시작하는 지리산 유람이 가능했던 거지요. 어때요? 생각만 해도 멋지쥬!! 이렇게 지리산에 들어가서 조식 선생이 보고 듣고 느낀 바를 적은 기록이 바로 <유두류록(遊頭流錄)>이랍니다.

남명 조식 일행이 지리산 유람을 시작한 쾌재정은 사라지고 없습니다. 하지만 퇴계 이황이 군양군수로 와 있던 스승 어득강을 만났던 자리에 세워진 작도정사는 이처럼 남아 있습니다.


사천 갯벌에 문화유적이 많은 까닭은?


이번에는 조창(漕倉) 이야기로 넘어갑니다. 조창이 무엇인고 하면 고려·조선 시대 조세로 거둔 곡식, 면포, 특산물을 서울로 옮겨갈 때까지 보관하려고 바닷가에 지은 창고를 말하는 것이에요. 요즘에는 세금을 무엇으로 거두지요? 당근 현금이지요. 하지만 예전에는 돈 대신 물건으로 거두었으니 보관하려면 커다란 창고가 그것도 여러 채가 필요했겠지요.


요즘에는 물건을 육로로 수송하는 것이 훨씬 더 경제적이지만 옛날에는 길도 이동수단도 지금처럼 발달하지 못했어요. 그러니까 바다에 있는 뱃길을 통해 물건을 옮기는 것이 수월했기 때문에 바닷가에 조창을 두었답니다.

요즘은 물이 깊고 밀물과 썰물 격차가 작은 데가 좋은 항구이지만, 옛날에는 물이 얕고 밀물과 썰물 격차가 큰 데가 좋은 항구였답니다.

사천만의 동쪽 부분인 용현면 선진리와 사남면 유천리 조동마을 바닷가에 통양창과 유천창이 있었고 서쪽 부분인 축동면 구호리과 가산리 바닷가에도 제각각 장암창·가산창이 있었던 까닭이지요. 사천만에는 이렇게 조창이 여럿 있었는데 물론 같은 시기에 여러 조창이 한꺼번에 있지는 않았구요, 말하자면 통양창은 고려 시대 조창이었고 가산창은 조선 영조 때(1760) 설치가 되었지요.


조금만 설명을 덧붙일게요. 친구들은 역사문화유적이라고 하면 어떤 것들이 떠오르나요? ‘옛날 사람들이 남긴 근사하고 멋진 물건 혹은 흔적.’ 이 답은 60점이나 70점 정도!! 정답인 것 같은데 겨우 60~70점이라니~? 문화유산은 꼭 근사하고 멋져야 하는 것만은 아니에요. 과거 삶의 흔적이 잘 남겨진 것, 말하자면 그 물건이나 흔적을 통해 그 시대를 더듬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면 무엇이든지 다 훌륭한 문화유적이라 할 수 있거든요.


사람이 드문 조용한 시골보다는 사람이 많이 모여드는 곳에서 아무래도 사건이 더 많이 생겨나잖아요. 그러니까 조창이 있는 곳에 사람들이 많이 모여들었으리라는 짐작은 누구나 충분히 할 수가 있지요. 조창이 들어선 마을 풍경을 한 번 상상을 해볼까요? 물건을 실어나르는 사람들, 그것을 관리하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이 머무는 여관·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 물건을 실어나르는 배가 수도 없이 드나드는 항구에는 시끌벅적한 시장도 들어섰겠지요. 사람이 많은 곳에는 사람이 남긴 흔적도 많기 마련입니다. 조창이 많았던 사천에 갯벌과 관련한 역사문화유적이 많은 까닭도 바로 그 때문이랍니다.

 

석장승이 서 있는 근처는 바다였다?



그 가운데 가산리 석장승 이야기를 먼저 해볼게요. 가산창이 있었던 가산리 마을 언덕배기와 당산나무 아래에는 각각 남녀신장이 두 쌍씩 서 있어요. 다른 곳에는 남녀 한 쌍이 한 곳에 서 있기 마련인데 여기는 색다르게 모두 네 쌍이나 됩니다. 사천을 비롯한 인근 일곱 고을에서 거둔 조세 물품을 여기에 모았으니 그 규모가 어마어마했겠지요. 사람들이 너무 많이 모여들어 한 쌍으로는 부족해서 네 쌍으로 만든 건 아닐까 싶은데요. 아무튼 석장승의 숫자만으로도 이곳이 한 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북적였는지 짐작을 할 수가 있어요.


인간은 강한 존재이면서 또 나약한 존재잖아요. 그래서 자기보다 강한 대상을 만들어놓고 끊임없이 빌었지요. 요즈음도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잖아요. 장승도 그것과 똑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돼요. ‘마을에 나쁜 일이 없도록 해주세요.’ ‘아프지 말게 해주세요.’ ‘돈 많이 벌게 해주세요.’ ‘배곯지 않게 해주세요.’ …… 그러고 보면 많은 물건을 보관하고 실어 날랐던 조창 근처에 장승이 많았던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거칠고 험한 뱃길에 무사하게 해주세요.’ ‘물건을 도둑맞지 않도록 해 주세요.’ 등등.


석장승에 관한 재미있는 이야기, 이어집니다. (집중~^^) 보통 내륙에 있는 장승은 나무로 만들어진 목장승이 많아요. 돌로 만들어진 것도 물론 없지는 않지요. 그런데 바다 근처에는 벅수라고도 하는 석장승이 대부분이에요. 왜 그럴까요? 이렇게 질문을 하면 바닷바람에 나무가 잘 삭기 때문에요.’ 이런 정도의 답은 초딩들도 다 하거든요.^^ 그러면 다른 이유가 있나? 당근 그보다 더 재미있는 이유가 있지요.


갯가에 있는 목장승은 수명이 길어야 2년 정도라고 해요. 바닷바람에 나무가 잘 삭기 때문이라는 이야기는 방금 전에도 했지요. 그렇다면 해를 걸러 장승을 만들어 세워야 했는데 문제는 장승을 만들 사람을 구하기가 어려웠다는 거지요. 기술자 부족? 노노~~!! 사람들에게 기원하는 대상이 되는 존재는 무엇보다 부정타지 않고 신성해야 했어요. 그래야 사람들이 숭배도 하고 기도도 할 수 있게 되거든요. 자신보다 못한 존재를 누가 받들며 믿고 따르겠어요.


그렇기 때문에 장승을 만드는 사람도 신성해야 했는데 그런 사람을 구하기가 쉽지 않았던 거지요. 가령 친구들 중에 거짓말 안 하고 죄 없는 사람 손들어 보세요하면 서슴없이 손들 수 있는 친구가 얼마나 있으려나~ 인간은 다 조금씩 거짓말도 하고 적당하게 죄를 짓고 살잖아요~죄 없는 사람을 구하기 어려워 나무로 만드는 목장승 대신 아예 석장승을 세우게 되었다는 슬프고도 웃긴 전설이 전해져 온답니다.^^ 그러니 길을 가다 바다와 멀지 않은 데에서 석장승을 보거든 옛날에는 이 근처가 바다였으려니 생각하면 크게 틀리지는 않으리라는 얘기입니다.

 

매향과 함께 묻은 간절한 소망은 무엇이었을까?

사천 매향비

조창 이야기도 하고 석장승 이야기도 했지만 사천 갯벌 관련 문화유적의 으뜸은 뭐니뭐니 해도 사천매향비입니다. ~ 여기서 매향비에 대한 자세한 설명 들어갑니다. 매향비가 무엇인지 모르면 아무리 떠들어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겠지요.^^ 매향비가 뭐냐 하면 갯벌에 향()을 묻고() 그 사실을 글로 새겨서 세운 비석()입니다. 갯벌에다 향을 묻고 비석을 세우다니 이 정도 설명만으로는 매향비를 이해하는 데는 어림반푼어치도 없겠지요. 그래서 더 친절하게 설명 들어갑니다~~.


사람이 죽거나 제사를 지낼 때 연기를 피우는 향은 우리 친구들 다 알지요? ‘알기는 하는데 그 향을 갯벌에 묻으면 어떻게 된다는 거지?’ 이런 궁금증은 아주 좋아요. 향을 갯벌에 묻으면 썩어문드러지는 게 아닌가요? 이런 질문은 더더욱 아주 좋아요.


그런데 말이에요, 향을 갯벌에 묻어 두면 신기하게도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굳세어지고 향기로워진답니다. 그래서 나중에는 다이아몬드보다 더 단단하게 되고 다른 어떤 꽃보다 더 향긋한 냄새를 풍긴다고 합니다. 와우~!! 매향에 그런 비밀이 숨어 있다니~~ 그래서 사람들은 간절한 소원을 담아 향을 묻고 비석을 세우거나 바위벽에 표식을 했다는 거지요.


그러면 사천매향비는 도대체 언제, 누가, 무슨 소원을 담아 세웠는지 궁금해지지 않나요? 이제부터 그 궁금증을 함께 풀어나가 보기로 해요. 사천매향비에는 많은 사람이 계를 모아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 향을 묻는 글(千人結契埋香願王文)”이라 되어 있고 끝에서는 모두 4100”(計四千一百)이라고 새겨져 있어요.


그러면 우선 4100명에 대한 비밀부터 풀어봐야겠지요. 1425년 나온 <경상도지리지>를 보면 곤남군 호구가 210호에 3062명으로 나와요. 사천매향비가 발견된 지역은 옛적으로 치면 곤남군에 포함되지요. 그렇다면 여기서 호기심 발동!! 4100의 숫자는 금품을 내고 발품을 내고 조직을 내고 지식을 낸 총합을 이르는데 그 숫자가 한 고을 전체보다 더 많다는 거지요. 그러니까 일단은 4100명이라는 숫자에서 개인의 고통이 아니라 많은 백성들이 통째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여요.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모인 것은 귀족과 토호 같은 지배자들한테 데모를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매향비는 1387년에 만들어졌어요. 이 시기를 살펴보면 귀족과 토호의 횡포가 엄청났던 고려 말입니다. 일반 백성들은 갖고 있던 토지를 빼앗기는 것으로도 모자라 노비로 신분이 떨어지기 일쑤였지요. 그것만으로 살기가 힘들었을 텐데 일본 왜구의 노략질도 극심했어요. 조선 시대 지리책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사천이 옛날 고려 말기에는 왜적이 침입하는 통로였다는 기록도 남아 있어요. ‘내우외환이라는 말이 딱 맞지요. 그러니 백성들의 삶이 피폐할 수밖에 없었던 거지요.

사천매향비각.

친구들!! 매향비에 미륵불 왕생을 기원하며라는 구절이 있었던 것 기억하나요? 그런데 미륵불이 뭔지 잘 모르겠지요? 미륵불이라는 것은 석가모니불이 세상을 떠나고 나서 567000만 년에 뒤에 나타나 모든 중생을 구제하도록 되어 있는 희망불이면서 미래불이라 하거든요. 56억이라는 세월도 비현실적이고 미래불이라는 것도 낯설다구요? ~ 그러면 이렇게 생각하면 돼요. 귀족·토호와 왜구에게 겹겹으로 시달렸기에 백성들이 먼~~ 훗날 이렇게 힘들고 고달프지 않는 좋은 세상에서 다시 태어날 수 있기를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았다~ 어때요? 조금은 이해가 되나요!! 고달픈 백성들이 그런 희망들 매향비에 새기며 하루하루를 견디지 않았을까요. 겉으로 보면 더없이 단순해 보이는 매향비를 통해 이런 역사를 짐작할 수 있다는 것이 참으로 놀랍지 않나요.


우리 사천에는 매향 관련 유적이 또 있어요. 매향과 관련된 유적은 우리나라를 통틀어 8개밖에 안 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사천은 이처럼 두 개나 된답니다. 다른 하나는 삼천포매향암각입니다. 위에서는 였는데 이번에는 이네? 이제는 이 정도 질문은 해야 하는뎅^^ 비는 말 그대로 비석을 뜻하고 암각(岩刻)은 바위에 새겼다는 뜻이다 이런 말씀입니다


사천매향비처럼 빗돌을 따로 구하지 않고 삼천포 향포산 중턱 처녀바위를 골라 글자를 새겼어요. 조선 초기인 1418년 새겼다고 되어 있는데 1417년과 1418년 두 차례에 걸쳐 수륙무차대회(水陸無遮大會, 세상을 떠도는 영혼들을 달래는 불교식 제사)를 치르는 사람 30명 정도가 모여 향을 묻었다는 내용이랍니다. 사람들 규모면에서 일단 차이가 많이 나지요(좀 지루한가요~그렇다면 조금 휴식 뿜뿜~~!!)


김훤주


※ 2017년 사천시청 재정 지원으로 사천문화재단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사천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사천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고를 썼는데요 그 내용을 이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당시 저희 경남도민일보는 아이들로 하여금 역사문화유적을 사천 지역 초등학생들과 함께 단체로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10차례 진행하여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그렇게 못하고 개별로 엄마아빠랑 둘러본 경우는 사진과 글을 올리게 하여 상품권을 선물하는 식으로 피드백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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