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픈 역사를 품고 있는 사천의 항공산업
이제부터는 드디어 기다리고 기다리던 비행기 이야기입니다. 당근 질문 들어갑니다~. “경남에는 공항이 모두 몇 군데 있을까요?” “두 개요!” 땡~~!! 어~그러면 몇 개지? 경남에는 공항이 하나뿐이랍니다. 왜냐구요? 김해공항은 이름만 김해이지 부산에 있거든요. 부산 강서구 소속이랍니다. 그래서 사천은 경남에서 유일하게 하늘과 바다와 땅이 모두 열려 있는 곳이지요. 이런 고급 지식은 어른들도 잘 모를 걸요.^^
사천이 ‘첨단 항공산업의 메카’를 꿈꾸는 데는 다 그만한 까닭이 있어요. 지금부터 차근차근 그 까닭을 설명해 볼게요. 혹시 사천에 일제강점기 건설한 비행장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나요? 본 적은 있나요~? 쩝쩝~^^:: 들어본 적도 직접 본 적도 없다구요? 충분히 이해합니당~~^^ 다들 사천공항이나 항공산업 이야기 정도만 들었을 테니까요.
우리나라를 식민지배하던 일제는 중선포천과 사천강 사이 사천읍 수석리 일대에 군용 비행장을 건설했어요. 군용 비행장과 함께 설치한 격납고(格納庫)도 있어요. 격납고는 비행기를 감추어두는 건물이지요. 원래는 20개 넘게 있었다는데 지금은 하나가 확인되었어요. 논두렁에 있는데 멀리서 보면 무슨 무덤 같기도 하지만 안으로 들어가서 보면 무지개처럼 아치 모양으로 되어 있는데 아주 그럴듯하지요.
바깥에서 본 일제강점기 격납고.
이에 관련된 이야기는 사천시가 2016년 12월 펴낸 <사천 항공 63년사-사천 항공 역사가 곧 대한민국 항공 역사다> 16쪽에 이렇게 나와 있어요.
“1939년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사천평야에 군용 비행장 건설에 들어갔다. 건설공사 도중엔 미 공군의 공격이 있었고, 2차 세계대전 막바지엔 일본에 원자폭탄을 떨어뜨린 것으로 유명한 B29 편대가 사천비행장 상공을 날아다녔다. 사천 사람들과 항공과의 첫 만남은 그리 달갑지 않았다. 비행장 건설에 강제 동원되는 고통을 감수해야 했고, 평화로운 삶터가 살벌한 전쟁터로 바뀔 수 있다는 두려움에 떨어야 했을지 모른다. 1945년 8월 15일 일본군은 사천비행장에 전투용 항공기를 비롯한 각종 군수물자를 버려둔 채 물러났다. 사천비행장은 거의 마무리 단계였다.”
그렇다면 해방이 되고 난 후의 일제가 건설했던 비행장은 어떻게 사용되었을까요? 일제 대신에 미군이 비행장을 관리했고 1950년 6·25전쟁 때는 유엔군 공군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군용으로 쓰였어요. 그러니 사천의 공항과 항공산업은 일제강점기와 6.25전쟁의 아픈 역사를 딛고 일어선 셈이지요. 사천을 대표하는 비행기와 항공산업 뒤에 이런 아픈 역사가 숨겨져 있다는 것을 친구들은 잘 몰랐죠.!!
격납고 내부 모습.
사천이 항공 산업의 메카로 떠오른 배경은 무엇일까?
이왕 살펴보는 김에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자구요. 사천은 우리나라가 자력으로 비행기를 최초 제작한 도시이면서 그 비행기가 처음 날아오른 도시이기도 해요. 사천공군기지에 있던 공군기술학교에서 공군 훈련기의 국산화 가능성을 보여주자는 목적으로 자체 기술을 동원하여 설계하고 제작한 비행기였습니다. 6·25전쟁이 끝난 지 3개월도 지나지 않은 1953년 10월 11일 사천비행장에서 2인승 경비행기 한 대가 날아올라 2시간 동안 하늘을 돌아다녔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나라가 만든 최초의 비행기였어요.
1호 비행기는 이듬해 4월 3일 ‘부활호’라는 이름이 붙어져 1960년까지 현역으로 활동을 했어요. 그러다 2004년 복원을 거쳐 2008년 국군의 날에 등록문화재 411호로 지정이 되었지요. 지금은 공군사관학교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그런데 또 다른 부활호도 있어요. 어떻게 된 것이냐고요? 해마다 10월이면 펼쳐지는 경남사천항공우주엑스포에서 시범 비행을 하는 부활호는 2011년 개량복원된 것이랍니다. 보관은 경남테크노항공우주센터에서 하고 있지요. 우리 친구들 이런 이야기를 알고 부활호를 보면 훨씬 더 실감이 날 것 같지 않나요? 그러니 실물을 한 번 보는 것도 좋겠지요.
사천항공우주박물관 야외에 전시되어 있는 비행기들.
사천이 항공 산업의 메카로 떠오르면서 갯벌이 많이 사라졌다는 것은 참 아쉬워요. 시작하면서 광활한 갯벌을 토대로 들어선 것이 바로 사천의 항공우주산업이다, 그 이유를 나중에 이야기하겠다 했지요? 이걸 기억하는 친구는 완전 천재!! 사천의 항공산업은 갯벌을 딛고 일어섰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만큼 그 과정에서 갯벌이 줄어든 건 사실이니까요.
삼천포대교 사람길을 따라 걸어보세요
사천 명물 중 눈에 담기는 멋짐으로 치자면 창선·삼천포대교가 단연 으뜸이 아닐까요? 처음 다리 이름을 지을 때 이러쿵저러쿵 말들이 많았어요. 사천에 사는 사람들은 삼천포·창선대교라 하자 하고 남해에 사는 사람들은 창선·삼천포대교라 하자 하고 지금도 주민들이 편한 대로 말하기도 하지요. 이러든 저러든 무슨 상관이냐 싶은데 관련이 있는 사람들한테는 꼭 그렇지는 않은 것 같더라구요. 1970년대 남한과 북한이 처음 만나게 되었을 때 남북회담이니 북남회담이니 하면서 서로 기싸움을 했던 걸 떠올려보아도 그래요.
2003년 4월 창선·삼천포대교가 개통되었을 때 전국에서 다리를 구경하기 위해 밀려드는 관광버스 행렬이 장관을 이루기도 했지요. 봄이면 붉은색 아치형 다리 조형물과 어우러져서 언덕을 노랗게 물들이는 유채꽃은 많은 사람들에게 즐겨움을 안겨주는 명물로 이제 자리를 잡았답니다. 창선·삼천포대교는 삼천포~초양도, 초양도~늑도, 늑도~모개도, 모개도~창선섬(남해)으로 이어집니다. 사람들에게 이런 멋짐도 선사했지만 기본으로 보자면 사천과 남해 사이의 거리를 가깝게 만들어 생활을 편리하게 한 데에 큰 공을 세운 다리지요.
친구들!! 혹시 부모님과 함께 여행을 할 때 우리나라 도로를 보면서 느낀 점이 없나요? ‘우와 정말 잘 빠졌다’, 이런 생각 해 본 적이 없나요? 우리나라 도로는 사통팔달 막힘이 없어요. 아마도 세계 최고가 아닐까 싶어요. 그런데 그 멋진 도로에는 두 가지 아쉬운 점이 있어요. 하나는 대중교통이 주인공이 아니라 자가용 자동차가 주인공이라는 것,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길이 없다는 사실이지요. 말하자면 사람이 아닌 차가 주인공인데 그 중에서도 자가용이 주인공이라는 말씀입니다.
그런데 창선·삼천포대교는 사람길이 따로 만들어져 있거든요. 혹시 걸어본 친구들이 있을까요? 다리를 따라 걷다보면 하늘과 바다가 맞닿아 있어 그 한가운데로 걸어가는 기분이 들어요. 달려드는 바람은 또 얼마나 시원하게요. 정말 멋져요. 친구들도 꼭 한 번 걸어보시길~ 눈으로 담는 것보다 손으로 만져보고 발로 밟아보는 것의 힘이 얼마나 대단한지 실감할 수 있을 거예요. 거기에다 다리마다 건설 방법이 달라 ‘교량 전시장’이라고도 한다니 꼭 한 번 걸어서 건너봐야겠지요. 이 멋진 길이 2006년에는 정부로부터 ‘한국의 아름다운 길’로 선정되었어요.
삼천포대교가 찾아낸 국제무역항 늑도
창선·삼천포대교는 여러 개의 섬을 이어주고 있어요, 이 가운데 빼놓을 수 없는 섬이 있답니다. ‘늑도’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단한 가치가 있는 늑도에서는 다리를 놓을 때 유적이 발굴되었어요. 어느 시대냐 하면요, 조선시대도 고려시대도 아닌 기원전 2~1세기로 우리나라 초기 철기시대랍니다. 어마어마한 옛날이지요. 그런데 규모까지 최대라 하니 그 또한 놀라울 따름입니다.
늑도유적에서 도대체 어떤 유물이 나왔을까 그것도 궁금하지요? 궁금하지 않다는 친구들 완전 재미없음 (흥칫뽕~^^:) 낚싯바늘이나 칼, 낫, 작살, 항아리 같은 일상 유물도 나왔구요, 토기와 중국동전을 비롯해 낙랑, 중국, 왜(일본) 등에서 배타고 바다를 건너 온 유물도 많이 나왔어요. 그러니 정말 대단한 거지요.
창선삼천포대교와 유채꽃.
자, 그럼 지금부터 늑도에서 나온 유물을 바탕으로 그 시절로 타임머신을 타고 돌아가 보는 겁니다. 늑도에서 나온 유물 중에는 낙랑, 중국, 왜 등 다른 지역 유물이 많이 나왔다고 했지요? 설마 그 사이에 벌써 까먹은 친구는 없겠지요~ㅋ. 이처럼 다른 데서 들어온 유물이 많이 나온 것으로 보면 아득한 옛날 늑도에서 국제무역이 성행했으며 당연히 우리나라 사람만 있었던 것은 아니라는 상상은 충분히 가능하지요.
그런데 그 사람들이 어울리려면 의사소통을 해야 했을 텐데 어떻게 했을까요? 온갖 손짓발짓을 했을 것이고 또 통역하는 사람도 있지 않았을까요? 아무튼 무지 재미있었을 것 같아요. 그러면서 다른 나라 사람들은 어설프지만 조금씩 우리말을 배우기도 하고, 우리나라 사람이 다른 나라 말을 배우기도 하고 국제무역항이다 보니 다양한 사람들이 모여 다양한 일들이 일어나면서 시끌벅적했을 것 같은 그림이 충분히 그려지지 않나요?
무덤에서 발굴된 유골들도 모습이 아주 다양했다고 하네요. 똑바로 누인 경우도 있고, 옆으로 눕힌 다음 팔과 다리를 꺾은 경우도 있고, 엎어 놓은 경우도 있고, 개를 함께 묻은 경우도 있구요.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객사를 한 사람들도 있었을 것이고 등등, 무덤마다 여러 가지 사연이 많았을 것 같아요. 그런데 그 당시에 국제결혼이라는 것도 성행했을까요? 지금의 다문화가정처럼요. 물론 내용은 다르겠지만, 이런 상상을 해보는 것도 재미있는 일이지요.
늑도에서 나온 유물 중에 흥미로운 것이 있는데요. 바로 불에 탄 쌀, 탄화미랍니다. 원래 섬은 물이 모자라거든요. 늑도도 마찬가지였어요. 물이 많이 부족한 곳이지요. 그런데 쌀을 생산하려면 논이 있어야 하고 논농사를 지으려면 물이 풍부해야 하잖아요. 늑도는 지금도 논은 없고 밭만 조금 있어요. 그런 늑도였으니 이 쌀이 늑도가 아니라 늑도 바깥에서 생산된 것이라는 짐작이 충분히 가능하지요.
항구 부두 쪽에서 바라본 늑도. 2000년 전 국제무역항이었답니다.
2000년 전 옛날에는 자기가 필요한 것은 뭐든지 스스로 해결을 해야 했어요 그런거 유식하게 자급자족^^ 식량이나 옷감도 스스로 생산을 해야 했고. 물고기나 가축도 스스로 잡거나 길러야했어요, 그 중에서도 가장 중요하고 시간과 노동이 많이 드는 것은 당연히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었어요. 그런데 2000년 전 늑도 사람들은 바깥에서 들여오는 쌀을 받아먹고 살았기 때문에 힘겨운 농사로부터 해방이 될 수 있었다는 거지요.
전문가들은 바로 여기에 주목을 했어요. 외부에서 쌀이 들어갔다는 것은 자기들이 먹고 남을 만큼 식량을 확보하여 남는 쌀을 공급해 줄 수 있는 능력을 갖춘 세력이 있었다는 뜻이 되지요. 그리고 늑도에 살던 사람들은 그런 세력의 지배 아래서 식량을 제공받는 대신 무역에 필요한 물품만 전문적으로 생산하였다는 얘기가 되고요. 말하자면 자급자족 사회를 지나 분업이 이루어지면서 한 분야에만 종사하는 장인 집단이 형성되었음을 알 수 있는 거지요. 어때요? 불에 탄 몇 알의 쌀을 통해서 이런 짐작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대단하지 않나요?
그런데 이런 흔적을 확인할 수 있는 공간이 아직 마련되지 않아 아쉬워요. 다리를 내면서 도로가 지나가는 구간만 발굴했기 때문에 유적지를 남겨둘 수 없었거든요. 그 뒤에도 지금껏 박물관이나 유물전시관에 대해서는 짓는다는 말만 하고 있어요. 2016년에 국립진주박물관에서 사천 늑도유적 발굴 30주년 기념 특별전을 했지만 여전히 아쉽기만 하지요.
죽방렴, 지혜로운 바다 사람들
이제는 창선·삼천포대교가 지나가는 갯가 사람들 이야기를 해볼까요? 육지 사람들이 땅에서 먹을거리를 구해 생계를 유지했다면 바다 근처에 사는 사람들은 당연히 바다에서 양식을 구해야 했겠지요. 땅에다 씨를 뿌려서 먹을거리를 구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지만 거친 바다에서 양식을 구하는 일은 훨씬 더 고달프고 그런 만큼 좀 더 많이 머리를 써야 하지 않았을까요?
창선·삼천포대교를 건너가다 보면 바다 가운데 뭔가가 세워져 있는 게 보여요. 그냥 아무 생각 없이 지나치는 사람들 눈에는 잘 보이지 않겠지만요. 저게 뭐지? 궁금해하는 사람들 눈에는 아주 잘 보인답니다. 마치 다리를 떼어낸 오징어 같은 것들이 여럿 솟아 있는데요. 이게 바로 죽방렴(竹防廉)이라는 거지요. 옛날에는 대살이라고 했구요. 음~!! 죽방렴,~ 대살~ 이런 이름만 듣고도 대나무 하고 관련이 있겠구나, 짐작을 하는 친구들이 있다면 아주 훌륭합니다~^^
죽방렴은 주로 멸치를 잡는 데 이용하고 있어요. 죽방렴으로 잡은 멸치는 보통 그물로 잡은 멸치보다 가격이 몇 배나 비싸요. 왜냐구요? 그물 멸치는 서로 부대껴서 상처가 많이 나는 반면에 죽방렴 멸치는 바닷물의 빠른 흐름을 활용하여 거두었기에 상처가 많지 않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아주 비싼 가격으로 거래되는 게 바로 죽방렴 멸치랍니다. 죽방렴 멸치는 고급 선물로 쳐주지요. 친구들한테 죽방렴 멸치를 선물로 주면 기분이 어떨까요?~ㅋㅋ
삼천포대교 아래 삼천포해협 곳곳에 설치되어 있는 죽방렴(대살).
죽방렴에 관한 재미있는 상식 하나 추가요. 친구들, 영화 <명량> 다들 봤겠죠 아~안 본 친구들도 있겠네. 하지만 이순신장군의 그 유명한 명량대첩 정도는 상식으로 알고 있을 것이고~ 명량대첩은 전라도 해남 좁은 해협 명량이라는 데서 빠른 해류를 활용하여 거둔 대승이었지요. 거기 해류가 우리나라에서 가장 빠르고 다음으로 빠른 곳이 바로 삼천포해협과 지족해협이라는 사실(이건 몰랐지롱^^)! 죽방렴은 빠른 물살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는 방법이라는 설명은 다들 이해를 했죠? 그렇다면 물살이 빠른 삼천포, 지족 근처에 죽방렴이 유명하다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요.
창선·삼천포대교를 걸어서 건너면 밀물과 썰물이 서로 바뀔 때 바다에서 물살이 맞부딪히면서 물보라를 일으키는 장관을 볼 수 있답니다. 이런 물살을 타고 이동하는 각종 물고기들이, 쩍 벌어진 죽방렴 아가리를 향하여 밀려드는 거지요. 지금은 쇠로 된 커다란 빔을 꽂아 기둥으로 쓰고 거기에다 대나무를 쪼개어 바르고 다시 그물을 쳐서 고기가 빠져나가지 못하게 막지만, 옛날에는 대나무로 만든 발을 성글게 치고 그물은 죽방렴 바깥에다 둘렀다고 하네요. 이런 지혜로운 삶의 방식이 바로 소중한 문화유산이 되는 거지요.
지나가다 바다에 오징어처럼 생긴 것들이 쭈뼛쭈뼛 펼쳐져 있으면 아하, 저게 바로 죽방렴이로구나! 생각하면 돼요. 아는 만큼 보이는 법이거든요. 남해에 가면 돌로 쌓은 석방렴(독살)도 있는데 죽방렴을 알면 아마 석방렴도 눈에 바로 들어올 거예요. 그렇다면 죽방렴으로 멸치만 잡았을까요? 천만에요! 멸치뿐만 아니라 온갖 생선들이 바글바글~!!
김훤주
※ 2017년 사천시청 재정 지원으로 사천문화재단에서 초등학생을 위한 사천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사천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낸 적이 있습니다. 제가 원고를 썼는데요 그 내용을 이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당시 저희 경남도민일보는 아이들로 하여금 역사문화유적을 사천 지역 초등학생들과 함께 단체로 둘러보는 프로그램을 10차례 진행하여 엄청난 호응을 얻었습니다. 또 그렇게 못하고 개별로 엄마아빠랑 둘러본 경우는 사진과 글을 올리게 하여 상품권을 선물하는 식으로 피드백을 하였습니다.
'지역에서 본 세상'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세 가지 열쇠말로 푸는 사천 지역사 ③항일 (0) | 2018.05.28 |
---|---|
세 가지 열쇠말로 푸는 사천 지역사 ②전투 (0) | 2018.05.27 |
세 가지 열쇠말로 푸는 사천 지역사 ①갯벌1 (0) | 2018.05.25 |
합천댐이 만든 별난 래프팅과 수중마라톤 (0) | 2018.05.24 |
아이들과 함께한 고성 생태 나들이 (0) | 2018.05.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