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서훈 취소된 장지연, 그는 죄가 없다

김훤주 2010. 12. 15. 08: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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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때 대한민국 언론인의 사표(師表)였던 장지연(1864~1921)은 그 친일 행적이 2003년 3월 1일자 <경남도민일보> 자매지 <위클리 경남>을 통해 처음 공개됐습니다.

학계에서는 장지연 친일 관련 조사와 연구가 전부터 있었지만 대중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었습니다. 그로부터 7년 6개월남짓만인 지난 달 국가보훈처가 장지연에게 주어졌던 서훈을 취소하는 결정을 내렸습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915~17년 썼던 그이의 글 가운데는 친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1917년 6월 8일치 '봉송이왕전하동상(奉送李王殿下東上)'에서 "내선 인민이 친목으로 사귀어 장애를 풀어 없애고 일체 간격이 없으니" "일선(日鮮)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한 대목이 있습니다.

'내선'은 '내지(內地=일본)'와 '조선'을 뜻하고 '일선(日鮮)' 또한 마찬가지니 친일임이 분명하겠지요.

위 색칠된 글에 대해 '숭양산인'이라는 분께서 문제 제기를 하셨기에 해당 부분을 이렇게 고칩니다.

조선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1915~18년 썼던 그이의 글 가운데는 친일로 볼 수밖에 없는 것들이 제법 있습니다.

1918년 1월 1일치 '대정 6년 시사(大正六年詩史)'에서 한 해 전 6월 순종이 일본 천황 다이쇼(大正)를 만나러 간 데 대해 "이왕 전하 동해를 건너시니/ 관민이 길을 쓸고 전송했네/ 오늘 같은 성대한 일은 예전에 드물었으니/ 일선 융화의 서광이 빛나리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일선융화(日鮮融化)'는 일본과 조선의 하나됨을 뜻하니 바로 친일임이 분명하다 하겠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장지연의 '친일'을 쉽게 인정하지 못했습니다. 학자들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있었고 시민운동을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그런 사람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이들은 장지연이 살았던 일제강점기 시대 상황이 엄중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근거로 들었지만 사실은 그보다는 1905년 11월 20일 발표된 장지연의 '을사늑약' 반대 논설 '시일야 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 너무 강렬했던 탓이 더 크다고 저는 봅니다.

그 강렬한 빛에 어리어서, 많은 이들이 시력을 잃고 장지연에게 있는 이같은 그림자를 보지 못한 것입니다.

한편으로, 장지연의 일생은 그이가 크게 기대었던 사상인 인종주의로 들여다볼 때 아주 일관성 있게 조망된다는 것도 생각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이를 '역사 스타' 반열로 이끌어 올린 '시일야 방성대곡'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그 바탕은 '도와주리라 믿었던 강대국 일본에 대한 배신감'입니다.

글 첫머리에 '을사늑약'을 강요한 이토 히로부미를 두고 "후작은 평소 동양삼국의 정족(鼎足) 안녕을 주선하겠노라 자처하던 사람인지라 오늘 내한함이 필경은 우리나라의 독립을 공고히 부식케 할 방책을 권고키 위한 것이리라"는 기대를 적은 것이 보기입니다.

또 <매일신보>에 실린 장지연의 친일 문장들도 이런 관점에서 보면 모두 이해가 된답니다. 일본을 중심으로 황인종이 뭉쳐야 백인종한테 먹히지 않을 수 있다고 여기고 그런 글을 써 남긴 사람이 바로 장지연이기 때문입니다.

1915년 1월 1일치 '조선풍속의 변천'에서 조선총독부의 물산공진회를 칭찬한 대목과 1916년 9월 16일치 '만록-지리관계(5)'에서 일본을 "동양의 패왕"이라 한 것 등도 마찬가지이겠지요.

이처럼 장지연은 자기 생각대로 자기 세상을 살아냈을 뿐입니다. 그리고 그이는 자기한테 훈장을 달라고 말한 적도 없고 말할 수도 없었습니다.

그러므로 장지연 서훈 취소의 잘못은 장지연에게 있지 않습니다. 당연히, 그이를 미워할 까닭도 우리에게는 없습니다.

잘못은 1962년 장지연에게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한 정부에 있습니다. 정부는 서훈에 앞서 '변절 여부'를 확인할 의무가 있는데 이를 소홀히했던 것입니다.

서훈 당시 조사와 연구가 없어 확인할 수 없었다면 1987년 강명관 부산대 교수의 장지연 친일을 밝히는 논문 '장지연 시세계의 변모와 사상' 이래 그같은 사실이 확인된 이후에라도 바로잡았어야 했습니다.

그런데도 정부는 서훈을 그대로 유지했고 심지어 친일 행적이 널리 알려진 2004년 11월에조차 장지연을 '이 달의 독립운동가'로 꼽아 논란과 비판을 스스로 불러일으키기까지 했습니다.

잘못한 이는 정부말고도 또 있습니다. '위암 장지연 선생 기념사업회' 같은 데입니다.

이 단체는 2003년 문제가 됐을 때 "다른 데는 다 가만 있는데 왜 언론이 나서서 그러느냐"고 했습니다. 역사학계도 조용히 있는데, 장지연에게 친정과도 같은 언론계가 들고나설 까닭이 어디 있느냐는 투정이었습니다.

이 같은 언사는 장지연 친일 행적을 당시 그이들이 나름대로 알고 있었다는 방증이 됩니다.

어쨌거나 이처럼 세상을 떠난 장지연에 기대어 크든작든 권력을 누리는 집단이 들어서, 장지연에게 있었던 빛뿐만 아니라 그림자까지 아울러 같이 보는 일을 하지 못하도록 만든 것입니다.

서훈을 받지 않았다면, 받았어도 변절 여부가 일찍 확인돼 정리가 됐더라면 장지연이 지금 와서 이런 망신을 당했을 리가 없습니다. 이런 면에서 보자면 장지연은 오히려 피해자입니다.

유치환.

이은상. 둘 다 경남도민일보 사진.


더 큰 문제는 이런 일이 아직도 곳곳에 남아 있다는 데 있습니다. 경남의 경우 친독재 사실이 뚜렷한 시조시인 이은상(마산)이나 친일 작품을 남긴 시인 유치환(통영)을 공공 차원에서 기리려는 것이 그렇습니다.

그이들은 손을 대면 댈수록 더욱 덧나는 상처입니다. 한쪽에서 그이들을 기리려고 하면 할수록, 다른 한쪽에서는 기리면 안 되는 까닭을 아는 사람들이 그 까닭을 더욱 더 알리고 반대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저는, 모쪼록 산 사람들이 자기 욕심을 위해 세상 떠난 그이들을 건드리지 않으면 참 좋겠습니다.

김훤주
(※경남도민일보 12월 14일치에 실었던 글에다 살을 제법 붙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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