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협력사 사장이 털어놓은 STX 고속성장의 비밀

기록하는 사람 2010. 4. 13. 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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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X조선해양...!

월드베스트를 표방하고, 생산속도에서 기네스북에도 오른 바 있는, 단기간의 초고속 압축성장을 통해 연일 도약에 도약을 거듭하고 있는, 그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성공신화의 어두운 이면에는, 60여 사내협력업체들을 압살하는 살인적인 노동조건들이 핏빛 낭자하게 깔려있음을 아십니까?"


위의 글은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같은 노동단체나 노동조합의 성명서가 아니다. 한 기업체 사장이 목숨을 걸고 쓴 호소문의 첫 문장이다.

'목숨을 걸었다'는 것은 죽음도 각오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의 호소문 마지막 대목은 이렇게 끝나고 있다.

"이제는 마지막 남은 제 목숨을 내놓아 이 억울함을 세상에 널리 알릴 수만 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기꺼이 죽음의 길을 선택할 것입니다."

STX조선의 횡포를 고발하고 있는 김병필 (주)진명 사장.


실제 그는 기자와 인터뷰에서 "분신자살하려 했으나 죽더라도 내가 왜 죽는지를 알려놓고 죽어야 할 것 같아 서울에서 1인시위를 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2009년 12월까지 60명의 노동자를 종업원으로 고용하고 있던 STX조선의 하청업체 (주)진명의 김병필(38) 사장이다.

명색이 기업체 사장이었던 그가 왜 '살인적인 노동조건'을 폭로하고, 나아가 자기 스스로 4대보험에도 가입시키지 않은 33명의 하도급 근로자 채용사실까지 고백하게 된 사연은 뭘까? 그리고 그가 털어놓은 대기업 사내하청업체의 실상은 어떤 것일까?

"조선업종의 특성상 일이 굉장히 위험합니다. 그런데 명백한 불법인줄 알면서도 적게는 5~10명, 많게는 20명 단위로 하도급(업계에서는 '물량'으로 칭함)을 떼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그 하도급 근로자들은 산재보험은 물론 4대보험이 하나도 안 되는 상황에서 위험천만한 작업을 할 수밖에 없는거죠."

STX그룹이 낸 신문광고.

그런 하도급 노동자에게 중대재해라도 발생하면 아무런 대책이 없다. 그래서 그는 하루하루 늘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불안하고 초조하게 작업공정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총 60명 중 절반이 넘는 33명은 불법 하도급 노동자로 그들의 평균 임금은 월 450만 원 정도였다. 하루 12시간 이상 보험도 없이 위험하고 고된 일을 하는만큼 다른 업종의 비정규직 노동자에 비해선 많은 편이다. 같은 (주)진명에 고용된 상시노동자의 월급 250만 원에 비해서도 높다. 하지만 그들은 퇴직금도 없고 국민연금, 고용보험도 없다. 건강보험도 개인이 알아서 해야 한다. 재해를 당해도 아무런 대책이 없다.

이런 불안한 상태로 강노높은 일을 하는 조선업체 노동자들은 얼마나 될까.

그는 STX조선에서 일하는 노동자가 1만 명이 넘는데, 그 중에서 10분의 1인 1000명 정도가 노동조합에 가입할 수 있는 정규직 노동자이고, 비노조원인 연봉직이 1500명 정도, 그리고 나머지 8000명 가까운 노동자가 (주)진명과 같은 70여 개의 하청업체에 소속돼 있다고 말했다.

(주)진명처럼 사내하청업체들이 불법 하도급을 쓴다면 절반 정도가 그런 불안하고 위험한 상태에 방치되어 있는 셈이다.

"명백한 불법인줄 알고 있지만, 그런 식으로 하지 않으면 원청사인 STX가 요구하는 생산, 품질 등의 숨막히는 모든 공정을 납기 내에 해낼 수가 없습니다. 또한 선가대비 인건비의 비율을 맞출 수 있는 노동원가를 도저히 산출해 낼 수 없어요."

협력업체들과 좋은 관계를 홍보하고 있는 STX 광고. 과연 그럴까?


그럼에도 왜 그는 왜 그런 무리한 사업을 계속해왔을까?

"협력업체의 대표로서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강력하게 시정을 요구했죠. 그럴 때마다 원청사에서 돌아오는 대답은 '정 못해 먹겠으면, 관두면 될거 아니냐!'라는 식의 일관된 묵살뿐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10월 어느날, STX조선은 조선경기가 어렵다는 이유로 느닷없이 하도급 작업 물량단가를 30% 삭감한다는 일방적인 계약서를 들이댔다고 한다. 거기에다 원청은 이런 말도 빼놓지 않았다고 했다. "하도급 근로자들(물량팀)에게 영향을 줄 수 있는 강요는 하지말라!"

그 말은 생산성이 떨어지지 않도록 하도급 노동자의 임금은 삭감하지 말고 깎인 단가 30%를 하청업체가 감수하라는 말이었다. 그것은 빚을 내어서라도 버티든지 아니면 사업을 그만두고 철수하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졌다. 김병필 사장은 그 이전에도 어떻게든 버티기 위해 끌어쓴 빚이 이미 포화상태였다. 결국 12월 18일 그의 회사는 모든 작업을 멈추고 말았다. STX 내에 있는 하청업체들 중 서너 개 업체가 (주)진명과 함께 문을 닫았다.

"하면 할수록 적자폭이 늘어나는 회사를 더 이상 유지하기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문을 닫아도 더 큰 문제가 남아 있어요. 지금까지 끌어쓴 부채만 8억 8000만 원이고, 체불임금도 1억 5000만 원이나 됩니다. 이 때문에 근로기준법 위반으로 노동부에 계속 불려다니고 있습니다. 빚쟁이들 때문에 집에도 들어가지 못하고 있죠."

그나마 다행(?)인 건 상시노동자들도 거의 1년단위로 다시 채용하는 방식을 썼기 때문에 퇴직금 채무는 6000만 원 정도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러나 이미 10억 원이 넘는 빚을 감당할 방법이 그로서는 전혀 없다.

그는 회사가 문을 닫게 된 결정적 계기 중 30% '단가 후려치기' 외에도 불공평한 작업물량 배분이 비일비재했다고 말했다.

"만일 STX조선이라는 신흥 대기업이 이런 협력업체를 쥐어짜는 방식이 아니라 정규직 근로자로 운영되었다면, 과연 오늘날의 초고속 압축성장의 화려한 신화가 가능이나 했겠습니까?"

결국 STX의 초고속 성장은 협력업체에 대한 대기업의 횡포와 비정규직 노동자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이뤄졌다는 것이다.

그의 이런 하소연을 듣고 난 뒤, STX조선 협력업체 지원팀에 전화를 걸었다. 김 사장의 주장을 전한 뒤 회사의 입장을 물었다. STX측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가 볼 땐 이게 경영인데, 그들의 입장에서 볼 때 항상 불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물량 배분도 우리가 아무렇게나 하는 게 아니라 각 작업마다 가중치를 줘서 하는 것이다. 우리도 조선경기 자체가 어렵기 때문에 100% 퍼펙트한 것은 없지만, 의도적으로 그렇게 한 것은 없었다. (주)진명이 그렇게 된 것은 우리의 책임이 아니다. 사실 그 사람은 총무 하다가 경영을 했는데, 경영이라는 게 그렇지 않다."

결국 STX로선 책임질 일이 없다는 것이었다.

김 사장은 회사 문을 닫은지 2개월만인 지난 2월 18일부터 서울역 맞은편에 있는 STX그룹 본사 앞에서 1인시위를 벌이고 있다. 하지만 1인시위로 문제가 해결될 수 있으리라는 기대는 별로 없다. 단지 우리사회에 만연해 있는, 그러면서도 모른체 하는 대기업의 횡포를 고발하고 싶을뿐이다.

김병필 사장이 법률사무소에서 공증을 받아 둔 유서의 일부.


그래서 그는 유서를 대신하여 자신의 억울함을 기록한 문서를 작성해 법률사무소에서 공증까지 받아뒀다. 읽어보니 그야말로 사실상 유서였다. 유서에는 그걸 쓴 이유가 이렇게 적혀 있다.

"이 모든 글을 쓰고 떠나는 이유는 너무너무 억울하고 잘못되어 있는 불합리한 것을 이겨내어 보려고 비용도 써보고 주장도 해보고 최선을 다해봤지만 여의치 않아 제 인생을 담보로 세상에 널리 알리고자 이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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