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사리 챙기는 욕심은 부처님 뜻일까 아닐까

김훤주 2010. 4. 10. 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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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여기서 어떤 깨달음이라도 얻은 그런 표정으로 어느 문인이 전해줬습니다.

조그만 절간에서 스님이 길을 나섰습니다. 이 스님이 없으면 그 절간은 텅 비고 만답니다. 내려가다가 절간으로 올라오는 한 할머니를 만났습니다.

스님이 할머니더러 헛걸음하시지 말라는 뜻으로 "보살님, 지금 가 봐야 절에 아무도 없어요." 일렀습니다. 그런데 그 보살 말씀이 압권입니다. "(절에) 스님 보러 가나? 부처님 보러 가지!"

절간은 부처님 나라입니다. 아니 어쩌면 부처님을 바닥에 깔고 있는 대중의 나라입니다. 생전에 석가모니 부처께서 하신 바대로, 출가나 재가를 가리지 않고 대중이 열반에 이르도록 만드는 공간입니다.

불교식으로 이르자면 절간은 부처님 나라이기도 하고 부처님 나라가 아니기도 합니다. 대중이 열반에 이르도록 만드는 공간이기도 하고 그렇지 않기도 합니다.

절간은, 장엄하기도 하고 장엄하지 않기도 합니다. 장엄해도 좋고 장엄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좋아도 좋고 좋지 않아도 좋습니다.  
 
"해인사 대적광전 쌍림열반도에는 부처님의 금빛 관에 불이 붙자 맹렬히 타오르며 보석비 같은 불사리가 비 오듯 쏟아져 내린다. 이 얼마나 바라던 광경인가. 그 오색영롱함에 눈이 멀 지경이다.

부처님이 탄생하실 때는 꽃비가 내렸는데 이제 열반에 드시니 사리비가 내린다. 장엄의 순간에 떨어지는 사리를 사람들은 치마를 벌려 받는다. 욕심을 버리라는 부처님 말씀도 이 순간에는 귀에 들어오지 않는다.

국왕, 대신도 사리를 받는 대열에 동참한다. 사천왕도 부처님의 사리를 하나라도 얻을 수 있을까? 금빛 바루를 들고 기다리며 눈치를 살핀다. 왼쪽 팔부중 한 명은 얼른 사리 하나를 넣는다.

오른쪽에는 드로나 바라문이 받아온 사리를 항아리에 넣고 그릇으로 계량하여 8등분한다. 혹시 속임수가 있을까? 드로나 바라문을 감시하는 대신과 팔부중의 곁눈질도 재미있다.

이 불화 또한 불화 속 성중들의 심리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들의 욕구를 들어주는 해학이 빛난다."

이쯤 되면 과연 부처님 마음이 무엇인지와 무관하게 호탕해집니다. 부처는 사리에 욕심을 내어도 좋고 내지 않아도 좋다고 얘기하십니다. 욕심을 낸다 만다 하는 따위를 넘어서는 곳에 부처는 있습니다.

그냥 마음 가는 대로 움직이되 그런 마음에 들러붙지 않으면 그만이라는 얘기로 들립니다. 부처 사리에 욕심을 내지 않을 도리가 있을까, 그렇지만 그렇게 욕심을 부리더라도 한 걸음 떨어져 서늘하게 바라보면서 욕심을 자기 몸에 붙이지 않도록 해 주는 그림.

불교는 근본이 이타행(利他行)이랍니다. 문수보살과 보현보살은 힘써 행하는 대표입니다.

문수보살은 사자와 짝을 이뤄 부처의 지혜를 상징합니다. 보현보살은 코끼리와 더불어 부처의 복덕을 나타냅니다. 문수와 보현은 제각각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의 보호를 받습니다. 하동 쌍계사 금강문.

"밀적금강이 왼손에는 금강봉을 들고 오른손은 방어 자세를 하며 웃고 있다. '공부는 그저 나쁜 것을 막고 마음을 경건히 할 뿐이야'라고 말하려는 듯 겸손한 모습이 재미있다.

뒤에 문수 동자를 태운 사자는 밀적금강의 얘기가 맞다는 듯 동의하는 표정이다. 사자의 용맹은 찾아볼 수도 없다. 히죽 웃는 듯 듬성듬성 난 송곳니는 무서움과 악의가 끼어 있지 않아서 오히려 익살스럽다.

밀적금강과 문수 동자와 사자.

들어가면서 왼편 위쪽에 (사자와 달리) 코끼리 엉덩이가 먼저 보이도록 배치한 것도 특이하다. 사찰에서 부처님 말씀을 배운 사람들이 가정으로 돌아갈 때 코끼리 얼굴을 먼저 보아 보현행원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하여 사자와 어긋나게 배치한 것이다.

멋진 발상이다. 보통은 앞면을 강조하여 사자와 코끼리의 머리 방향을 같이 했겠지만……."

보현 동자와 코끼리와 금강 역사.


'엄숙한 법당에 우리 민족의 순수한 익살이 이토록 곳곳에 숨겨져 있다는 것은, 불교 사찰이 권위적이 아니고 일반 서민과 가까웠으며 동시에 일반 서민이 법당 건립에 적극 참여했었음을 잘 알려 줍니다'. 물론 그런들 그게 무슨 의미가 있느냐 싶지만, 적어도 절간을 가깝고 친한 공간으로 여기도록은 만들어 줄 것 같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든 진해 삼밀사에는 대웅전이 없습니다. 나무로 세웠으면 어떻고 시멘트 범벅이면 또 어떻겠느냐만, 삼밀사 한복판에 있는 건물 현판에는 이렇게 한글로 적혀 있습니다. '큰 법당'. 하기야, 대웅전(大雄殿)조차도, '대단한 수컷을 모시는 전각'이라는 뜻이니, 더 말해 무엇하겠습니까만은.

깨달음에는 경계가 없습니다. 경계를 지우는 익살과 해학이 여기 있습니다. 불광출판사. 319쪽. 1만8000원. 

김훤주

불교미술의 해학 - 10점
권중서 글.사진/불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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