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다른 봉투 들고는 슈퍼 못 가는 사람

김훤주 2008. 10. 12. 14: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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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이 있습니다. 제가 보기에 마음이 따뜻한 사람임은 틀림이 없는데, 이에 더해 마음이 여린 사람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함께 듭니다.

아주 친한 동갑내기인데, 물건 사러 동네 슈퍼마켓 갈 때 다른 가게 비닐 봉투를 들고 가지 못합니다. 가게 주인이 언짢게 여길까봐서 말입니다.

그 친구 사는 아파트 둘레에는 슈퍼마켓이 세 개 있는데 다들 규모가 비슷비슷하다고 합니다. 아주 작으면 상호가 찍히지 않은 까만 비닐 봉투를 그냥 쓸 텐데 그보다는 크다는 얘기지요.

이 친구는 그래서 ㄱ슈퍼 갈 때는 ㄱ이 새겨진 비닐 봉투를 들고 가고, ㄴ이나 ㄷ슈퍼 갈 때는 해당 가게 이름이 새겨진 비닐 봉투를 챙겨 가는 식이랍니다.

우리 집에 모아 놓은 비닐 봉투들

왜 그리하느냐 물었더니, 세 군데 다 자기가 그 가게 단골인 줄로 알 텐데, 다른 가게 비닐 봉투 들고 가면 가게 주인 기분 나빠지겠지 싶어서 그런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다시 해당 가게 봉투가 없으면 어쩌느냐 물었더니, 새 봉투 값으로 30원이나 50원을 더 물더라도 그냥 맨 손으로 가는 수밖에 없지,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가게 주인이 그런 것까지 신경쓰겠느냐, 당신 마음이 너무 여린 것 아니냐고 다그쳤더니 이런 대답이 나왔습니다. 실제 그렇는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마음이 불편하니까.

세상 참 피곤하게 사는 사람입니다. 그래도 저는 이 사람이 싫지가 않습니다. 자기만 생각해도 살기 어려운 세상인데, 이처럼 상대를 배려한다니 그것만으로도 귀한 존재다 싶은 생각이 들어서요. 하하.

김훤주

습지와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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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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