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40대에 그림동화를 읽는 즐거움

김훤주 2008. 10. 13. 08:30
반응형

1.
짧습니다. 제목은 ‘천국에 간 가난한 농부’입니다. 그림(Grimm) 동화 전집에 있습니다. 전문(全文)을 옮깁니다. 10월 4일인가에 처음 읽었습니다. 중2 딸 현지는 이미 여러 차례 읽어서 내용을 싹 다 알고 있더군요.

옛날 어느 곳에 가난하지만 신앙심이 깊은 농부가 죽어서 천국의 문 앞까지 왔습니다. 같은 시간에 아주 부유한 남자도 천국의 문 앞까지 왔습니다.

그 때 열쇠를 가지고 있는 성 베드로가 나타나서 문을 열고 부자를 들여보내 주었습니다. 베드로는 농부를 보지 못했는지 문을 닫아 버렸습니다.

부자는 환영을 받고 있는 모양이어서 음악을 연주하고 노래를 부르는 소리가 문 밖에 있는 농부의 귀에 들렸습니다.

그러다가 다시 조용해지더니 성 베드로가 나와서 천국의 문을 열고 농부를 들어오게 했습니다. 농부는 당연히 자신에게도 환영하는 음악과 노래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주위는 조용했습니다.

물론 농부는 사랑이 넘치는 환영을 받았고 천사들도 농부를 반겨 주었지만 아무도 노래를 불러주지는 않았습니다. 그래서 농부는 성 베드로에게 물었습니다.

“왜 저를 위해서는 부자를 환영했던 것과 같이 노래를 불러 주지 않습니까? 천국에서도 지상과 마찬가지로 차별이 있는 모양이죠?”

그러자 성 베드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천만에요. 당신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소중한 사람입니다. 저 부자와 똑같이 천국의 모든 기쁨을 누릴 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천국에는 당신처럼 가난한 사람은 매일 오지만, 아까 온 사람 같은 부자는 백 년에 겨우 한 사람밖에 오지 않는답니다.”

2.

그림 형제. 이들이 북유럽 동화를 끌어모았다지요.

다 읽고 나서 크게 웃었습니다. 전제가 색달랐기 때문입니다. ‘부자는 존재 조건 자체가 착한 일 하기 어려운 불쌍한 존재’라는 것입니다. 안 좋은 조건을 뚫고 착한 일을 했으니 더욱 크게 반길만한 ‘사건’이라는 얘기입니다.

저는 사실 그동안 부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고, 지금도 그것은 마찬가지입니다. 더 나아가 부자가 착한 일을 하는 것도 별로 탐탁스럽게 여기지는 않아 왔습니다. 그러나 이 동화를 읽으면서 생각이 달라졌습니다.

부자가 하는 착한 일을 두고서, 전에는 그런 행위가 계급 사이 빈부 격차 같은 근본 모순을 숨겨서 보이지 않게 하는 노릇을 하는 탓에 평등하지 못한 지금 이 세상을 좀더 유지되게 해줄 뿐이라 여겼습니다.

동화를 읽고 나서는, 부자가 대부분 다른 사람의 고통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그래서 괴로운 다른 사람을 돕는 손길을 내밀기 어려운데도 그리 한다니 얼마나 장한 일이냐, 이리 여기게 됐습니다.

3.
그리고 또 하나, 이것은 어찌 보면 직업의식의 발로이기도 합니다만, 미담(美談) 기사로 상대를 조질 수 있어야 잘 쓰는 기자’라는 말의 뜻을 어렴풋이나마 알아챘습니다.

여태 그리스도교 경전에서 부자의 천국행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지나는 것보다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사실상 가능하지 않다는 얘기입니다. 이 동화는 이것을 한 번 뒤집었습니다.

둘을 견줘보면 그리스도교 경전은 부자를 대놓고 ‘조지는’ 반면에, 이 동화는 부자를 바로 ‘조지지는’ 않고 있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칭찬해 주는 구조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어떻습니까? 천국에 드는 부자 한 사람을 칭찬함으로써 그리 하지 않는(할 생각도 하지 못하는) 부자 일반을 죄다 ‘조져’ 놓고 있습니다.

기자로 치자면, 그 누구도 쉽사리 따라올 수 없는 아주 높은 경지에 이른 사람인 셈입니다. 저도 다시 현장에 나가면, 이런 기사를 쓸 수 있도록 힘껏 애를 써야겠습니다.

김훤주

습지와 인간
카테고리 역사/풍속/신화
지은이 김훤주 (산지니, 2008년)
상세보기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