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인간의 도리 수양, 자연의 이치 풍류

김훤주 2018. 7. 14. 1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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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천과 문화 (2) 황강의 누정(樓亭)문화


[경상남도람사르환경재단-경남도민일보 공동기획]

황강변에 정자·누각 여럿, 수양·풍류 동시에 누리고

우람하거나 소박한 매력, 시원하게 탁 트인 전망


대부분 정자와 누각은 강가나 냇가에 들어선다. 위로 산악을 아우르고 아래로 강물을 품는 자리다. 산과 강은 그 자체로 아름다운 풍경이 된다. 어진 이는 산을 좋아한다 하고 지혜로운 이는 물을 좋아한다 했다. 산과 강에서 사람된 도리와 덕목을 찾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런 누정은 옛적부터 수양(修養)과 풍류(風流)가 함께하는 공간이었다. 수양과 풍류가 떨어져 있기도 했지만 어떤 때는 수양하는 가운데 풍류를 즐기고 어떤 때는 풍류를 즐기는 가운데 수양하기도 하였다.


1898년 봄과 여름 어름에 합천군 초계면 황정리 남계정에서 강회(講會)가 열린 적이 있다. 120년 전 일이다. 유교 경전과 해석에 대해 가르치고 배우는 모임이 강회인데 요즘 말로 학술토론회나 심포지엄쯤이 되겠다

호호정. 오른쪽에 황강으로 드는 하회천 개울에 놓인 수문 개폐 장치다.


만구(晩求) 이종기(李種杞·1837~1902)라는 인물이 교장(敎長)을 맡아 윤312일 공령(功令)을 시험하고 13일 사상견례(士相見禮)를 행하였다. 공령은 과거를 치르는 시문이고 사상견례는 선비들끼리 인사를 나누는 공식 의전 절차라 한다


요즘으로 치면 모의 고시(考試)와 오리엔테이션을 치른 셈이다. 그러고 나서 13일 오후부터 14일 오전까지 강회가 이어졌다.


당시 49세 장년으로 교장을 맡은 만구 선생은 인품과 학식이 꽤 높았던 모양이다. 스물다섯 살 청년 선비 조긍섭(曺兢燮·1873~1933)은 강회에 참석한 뒤 한시 '범주낙강부(泛舟洛江賦·낙동강에서 뱃놀이를 하다)'를 지었다


"스승의 행차를 모시기 위하여 구름처럼 많은 준수한 선비들이 뒤를 따랐다"고 했다. 그러고는 100명이 넘었다고 덧붙였다. 실제 만구는 영남학파의 학맥을 계승하여 퇴계 이황 이후 이()와 기()의 이론을 더욱 깊이한 성리학자라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교장 선생은 강회를 마친 뒤 곧장 집으로 가는 대신 행락(行樂)에 나섰다. 14일 남계정 동쪽 탐진 안씨 집안 도장재에서 하룻밤을 보냈다. 이튿날 15일에는 호호정(浩浩亭)에 올랐다가 황혼녘에 낙동강으로 들어갔다


도장재는 지금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반면 호호정은 합천 청덕면 가현리 황강변 가파른 언덕에 있다.(가현길 118-9청년 선비 조긍섭은 앞서 말한 한시에 이런 해설을 붙였다


"뒤에는 매우 높은 절벽이 자못 기이하고 사랑스러워 볼만하였다. 주인이 애써 가지 못하게 만류하였으나 집을 떠난 지 오래되어 머물기 어렵다며 사양하고 출발하였다. 해 질 무렵 강을 건너 현창마을(창녕군 이방면, 광주 노씨 집성촌)로 들어갔다."

호호정에서 내려다보이는 황강 강물과 모래톱.

호호정 뒤편 솔숲.


한시에서 16일 아침 모습은 이랬다


숙취가 아직 깨지 않은 채

노씨의 강정(江亭)에 오르니

물결은 멀리 하늘에 닿고

산 안개 자욱한 것이 걷히네

남시(南市)에서 배를 얻어

함께 타고 물길 따라 내려가려 하네. 


여기서 절반가량은 집으로 돌아갔고 나머지는 배에 올랐. 이종기와 조긍섭을 비롯한 일행은 16~17일 이틀간 시문을 짓고 노래를 하고 술 마시고 안주 먹으며 뱃놀이를 계속했다. 18일에는 비를 만나 뱃머리를 돌려야 했다. 여기에서 풍류와 수양은 둘이 아니고 하나였다.


황강변에는 이처럼 풍류의 행락과 수양의 공부를 베풀던 누정이 아직 여럿 남아 있다. 120년 전 낙동강 뱃놀이 시작점이 된 호호정은 청덕면 두곡·가현 들판을 달려온 하회천이 황강과 합류하는 강기슭(가현리 371)에 솔숲을 배경으로 삼은 채 그대로 있다.


풍경이 아름답고 건물이 멋지기로는 율곡면 문림마을 황강 가의 호연정이 으뜸으로 꼽힌다. 조선 명종 때 사람 이요당(二樂堂) 주이(周怡·1515~64)가 벼슬을 마치고 돌아와 제자들을 가르치던 장소다


여느 정자와 달리 세덕사·영모사 같은 사당이 있어 색다르고 호연정 본채 또한 정자라 하기 어려울 정도로 커다랗다는 특징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은행나무와 대나무와 배롱나무 등등이 마당 안팎에 잘 가꾸어져 있어 멋지다.

황강변 누정 가운데 풍경이 아름답고 건물이 멋지기가 으뜸으로 꼽히는 호연정.

호연정 뒷모습. 왼쪽 아래에 불 때는 아궁이가 있다.

울창하면서도 어지럽지 않은 정원숲이다. 그런 한가운데 정자가 들어 있다. 건물이 크지만 크게 느껴지지 않고 우람하면서도 소탈한 느낌을 준다. 옛날 선비들은 여기 호연정에서도 수양과 풍류를 겸하여 누렸으리라.


하지만 황강에서 으뜸 명성은 함벽루(涵碧樓) 차지다. 푸르름(碧) 속에 담긴(涵) 누각 함벽루는 빗물이 지붕에서 곧바로 강으로 떨어지도록 되어 있다. 2층 다락집인 함벽루는 그만큼 높다랗다 보니 돌출감 또한 대단하다. 뒤쪽마저 바위 절벽에 막혀 답답할 정도이니 강 가가 아니라 강 위에 있다고 해야 할 지경이다.

정면에서 우러러보고 찍은 사진. 자신만만한 현판이다.

옆에서 바라본 함벽루.

황강 건너편에서 바라본 모습. 양쪽은 절간이고 가운데가 함벽루다.

여기에는 현판 스무 개씩니아 걸려 있다. 조선시대 대단한 인물들인 우암 송시열의 글과 남명 조식·퇴계 이황의 시문도 있다. 많은 사람들이 즐겨 찾고 많이 아낀 누각인 것이다

퇴계 이황의 시문.남명 조식의 시문.우암 송시열의 함벽루기.

나라가 어려운 시기 강토에 대한 애정을 키우고 호연지기를 기르는 국토 순례의 대상이기도 하였다. 우국지사 면암 최익현(1833~1906)'함벽루운()'이 걸려 있는 것이다

대마도에서 순국한 최익현의 시문.

현판에 적힌 임인(任寅)1902년이라니 예순아홉 고령에 여기를 찾았다. 면암은 4년 뒤 을사늑약 무효를 주장하며 의병을 일으켰다가 붙잡혀 유배지 대마도에서 순국했다.


광암정(廣巖亭)은 합천댐 위쪽에 있다. 원래는 합천댐 때문에 수몰된 마을에 있었는데 1985년 지금 위치로 옮겨졌다. 광암은 너럭바위를 뜻한다. 이름에 걸맞게 처음에는 아주 널따란 자연 암반 위에 자리 잡고 있었다고 한다

광암정.

광암정에서 보는 합천댐.

이름만으로도 시원한 골짜기가 눈 앞에 떠오른다. 지금도 풍경은 나쁘지 않고 전망은 오히려 광활하다. 앞으로는 맞은편 합천댐 수문까지 한눈에 들어온다. 뒤로 눈을 돌리면 감악산·월여산·황매산·악견산·허굴산 멋진 산세가 펼쳐진다


지금 우리는 여기서도 호연지기를 느낀다. 합천댐 주변에는 이 밖에 사의정(四宜亭)이라는 크고 멋진 정자도 있다. 다들 자연의 이치와 인간의 도리를 동시에 느끼고 누리는 자리라 하겠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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