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원은 누가 뭐래도 공업도시


친구들!! 달리고 달려 마산 진해를 지나 드디어 창원에 도착했어요. 조금만 기운을 내서 창원을 마저 둘러보도록 해요. 지금부터 창원 탐방 시작합니당~~^^ 


마산 진해 창원 중에 가장 역사가 오래된 지명이 창원이라 했던 거 기억하고 있지요? 맞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창원을 두고 다들 계획도시라고 해요. 1970년대 호주 도시 캔버라를 모델로 삼아 농촌이던 원래 모습을 갈아엎고 지금처럼 만들기 시작했으니까요


또 창원을 공업도시라고도 하지요. 두산중공업을 비롯한 여러 공장들이 즐비하게 들어서 있으니까요. 이렇게 국가산업단지를 만들어 다른 나머지 지역들은 모조리 이를 떠받치는 공간으로 조성한 공업도시·계획도시가 바로 창원이랍니다.


하지만 잘 다듬어지고 휘황찬란한 겉모습을 걷어내고 들여다보면 창원도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오랜 옛날부터 사람이 살았던 고장이랍니다


신석기시대 유적으로는 동읍 산남리 합산조개무지가 있구요. 청동기시대 유적은 남산 환호취락유적, 상남동 일대 고인돌들, 가음정동 일대 유적, 덕천리와 동읍 일대 고인돌들 등이 있어요. 다호리 고분군과 성산패총 야철지 유적 등 철기시대 유적은 전국적으로 유명하지요.

 

창원에 문화재가 없는 까닭


이처럼 창원은 역사가 짧지 않지만 이를 알려주는 문화재는 지나치게 적어요. 2009년 통합 이전 창원시청이 펴낸 <창원 600년사 제2: 창원의 오늘 그리고 내일>을 보면 모두 31개였어요201112월 새로 보물로 지정된 성주사의 목조석가여래삼불좌상, 감로왕도, 몽산화상육도보설(감로왕도는 경상남도지정문화재였다가 보물로 승격)을 더해도 33개뿐이랍니다.


경남에서 가장 적어요 .진주·양산 220, 합천 156, 밀양 141, 창녕 108, 함양 106개 등과 비교하면 무척 적지요. 진주나 양산에 견주면 7분의1, 창녕 함양과 비교해도 3분의1밖에 안 되니까요.


경남에서 가장 큰 도시 창원에 이렇게 문화재가 가장 적은 까닭은 무엇일까요? 19744월 옛 창원 43000가 산업기지로 개발되기 시작하면서 제대로 보전을 못한 때문이랍니다


지금 같으면 개발하는 지역 전체를 두고 문화재가 있나 없나부터 먼저 조사하지만 당시는 그런 것 없이 전부 밀어버렸어요. 대충이라도 조사를 했다면 창원이 지금처럼 문화재가 빈곤한 도시가 되지는 않았을 텐데 무척 아깝고 아쉬워요.^^::


이런 가운데 살아남은 곳이 성산패총 일대 야철지 유적이에요. 야철(冶鐵)이란 철광석을 뜨거운 불로 녹여 돌에서 쇠를 분리해내는 작업을 뜻하는데 19731119일 처음 발견되었어요, 아마도 별다른 노력이 없었다면 이 또한 그냥 사라졌을지도 몰라요. 독재적인 정치권력과 사회 전반의 문화재에 대한 인식 부족이 만들어낸 비극이라 할 수 있어요.


당시 대통령 박정희가 현장을 찾았을 때 성산패총 아래층에서 나온 야철지 유적을 창원기계공단의 상징으로 삼으면 적합하겠다는 건의를 받아들인 거지요. 발굴 책임자가 유적지를 보존해야겠다는 절박감에 지혜 짜낸 덕분에 가능했답니다


요즘은 아파트 택지 하나를 개발해도 갖은 유물이 쏟아지고 그에 따라 전시관·유적공원 등이 들어서잖아요. 창원공단 개발 당시 1300만 평이 넘는 땅을 헤집으면서도 전시관을 하나밖에 세우지 않았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 아닌가요


그래서 어쩌면 창원에 들어선 드넓은 공단 자체가 우리나라 1970~80년대를 상징하는 유물이 될 수도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도 있답니다. 나중에 한 오십 년이 지난 다음 창원공단을 통째로 문화재로 지정하는 것이죠. ㅎㅎ

 

우리나라 옻칠의 본고장


창원이 옻칠의 본고장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어는 봤나요? 기원전 3세기와 기원전 1세기 즈음 만들어진 덕천리지석묘와 다호리고분군에서 옻칠 관련 유물이 출토되었어j. 덕천리에서는 옻칠한 그릇 조각, 다호리에서는 옻칠한 칼손잡이와 물잔 조각이 나왔어요


여기서 잠깐~!! 일단 옻에 대한 공부를 조금 해볼까요? 옻은 귀한 재료여서 무게로 따지면 실제로 금(gold)보다 값이 더 비싸게 매겨져요. 옻칠이 된 그릇이나 도구는 2000년의 세월이 지난 뒤에도 본모습을 잃지 않을 정도니까요


아름답게 빛나면서 썩지도 않거든요. 그런 옻을 소재로 하는 옻칠공예는 아주 고급스런 전통문화로 알려져 있어요.

국립중앙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창원 출토 유물들.

덕천리지석묘는 옻칠그릇 조각을 통해 우리나라 옻칠의 시작이 중국 같은 외래기술에 있지 않음을 보여주었어요. 덕천리 지석묘는 낙랑군 설치 이전에 만들어졌으니까 중국 옻칠 기술이 들어오기 이전에 우리 독자 기술로 만든 옻칠제품일 수밖에 없는 거지요. 낙랑군은 고조선이 망한 뒤 한반도에 설치된 중국 식민지로 보면 대충 맞습니다.


다호리고분군에서는 중국 화폐 오수전도 나왔어요. 오수전은 중국과 교역했음을 일러주는 증거물입니다. 붓과 긁개도 나왔어요. 긁개는 지금으로 치면 지우개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문자 생활의 증거물입니다. 2000년이 지난 후에도 알아볼 수 있는 붓과 지우개가 있다니 그것만으로도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나요?


창원 덕천리지석묘를 본 친구들이 있다면 아주 큰 선물을 드릴게요.^^ 본 적은커녕 들어본 적도 없다구요~그럴 수밖에요. 덕천리지석묘는 군사시설인 동읍 육군종합정비창 안에 있기 때문에 언제든지 누구라도 쉽게 볼 수 있는 게 아니거든요


1993년 발굴되었는데 가로 세로 높이가 2.7m 1.9m 1.9m로 꽤 커요. 규모도 그렇지만 고인돌을 둘러싼 묘역 조성이 처음 확인된 곳으로 의미가 있어요. 묘역은 무덤을 둘러싼 영역이에요. 어지간한 운동장만 하지요


앞서 얘기했던 진동리 고인돌이 다양함과 독특함으로 승부를 한다면 덕천리지석묘는 크기로 승부를 한다고 생각하면 돼요. 친구들은 직접 보기가 쉽지 않으니 묘역을 좀 자세히 설명을 해볼게요

고인돌을 중심으로 둘레에다 크고작은 돌들을 둥글게 또는 네모지게 박아서 표시한 영역인데요, 이게 넓을수록 묻힌 사람의 권력이 세다고 합니다. 살아서도 죽어서도 그놈의 권력은 어떤 식으로든 힘을 발휘하는 모양입니당~^^


그런데 재미있게도 권력을 표시하는 방식이 지역마다 달랐다고 해요. 경상도는 덕천리지석묘처럼 영역의 크기로 힘을 자랑했는데 전라도 고인돌은 이런 영역이 없거든요. 그렇다면 전라도는 어떤 식으로 힘자랑을 했을까요


무덤 안에 있는 장식물의 크기와 개수로 권력을 가늠할 수 있다네요. 경상도 사람들의 굵직하고 화통한 성향과 전라도 사람들의 아기자기한 성향은 2000년 전 고인돌의 다른 모습을 통해서도 읽을 수 있다는 게 정말 재밌지 않나요? 친구들 창원 역사를 공부하면서 다들 고인돌 박사가 되겠어요^^


다호리고분군은 현장에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아요. 또한 덕천리지석묘는 군사시설이라 쉽게 접근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니 둘 다 그림의 떡이지요. 우리나라에서 문자 생활이 처음 확인된 뜻 깊은 자리인데도 몇몇 안내판만 뻘쭘하게 있다는 것은 정말 아쉽고 속상한 일이지요


다호리고분군에서 나온 유물은 국립김해박물관과 국립중앙박물관에 보관되어 있어요. 혹시 박물관에서 다호리고분군에서 나온 유물을 발견하게 되면 창원 거다하고 소리를 한 번 질러 보세요. 언젠가는 우리 품으로 돌아올 날을 기대하면서 말이지요.


그러고 보면 창원은 인구 100만이 넘는 거대도시이면서도 박물관 하나 제대로 갖추지 못한 찌질한 도시이기도 해요. 마산박물관/진해박물관/성산패총전시관이 있지만 박물관이라 하기에는 낯부끄러운 수준이어요. 다 합해도 이웃 고을 함안박물관 하나보다 훨씬 못하거든요.

 

창원읍성과 창원향교


창원향교 대성전 올라가는 계단.

지금은 자취가 거의 없지만 창원에도 읍성이 있었답니다. 그러고보니 제대로 남아 있는 게 없군요~창원읍성은 1477년 완공이 되었어요. <성종실록>을 보면 둘레는 1.5km가량, 높이는 4m 남짓이고 객사와 동헌, 동서남북 사대문과 북쪽 누각 시유루, 남쪽 연못에 세운 정자 사미정이 있었어요


읍성 내부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사라지고 당시 객사 자리에는 장터가 들어섰어요. 동헌 자리에는 학교를 지었어요. 읍성 안에 무슨 동헌이 있고 향교가 있고~? 이런 무식한 생각을 하는 친구들은 당근 없겠지요~? 


혹시 헷갈리는 친구들이 있다면 유명한 낙안읍성을 떠올리면 됩니다. 전라도 순천의 낙안읍성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살잖아요. 사람이 사는 곳에는 당연히 관공서도 있고 학교도 있고~ 맞지요^^ 


세월이 흐르면서 성벽이 완전히 없어진 줄 알았는데 2011년 무슨 공사를 하는 도중에 땅 속에 묻혀 있던 성벽 일부를 발견했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창원시청은 이를 다시 묻어버렸어요. 왜 그랬을까요? ~문화재와는 인연이 먼 창원이여~~!!


창원향교는 마산 합성동에서 1748년 지금 자리로 옮겨졌어요. 이쯤에서 질문~!! 향교와 서원의 차이 기억나나요? 사립과 공립 말이지요~ 기억하리라 믿고 통과합니당~^^ 향교 앞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서 있습니다. 학생들 공부에 방해가 되니 말에서 내리시오 뭐 그런 뜻이어요


당시에도 교실과 강당, 교무실, 기숙사, 도서관 등이 갖추어져 있었으니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지요. 외로 향교와 서원에 대해서 모르는 친구들이 참 많더라구요. 이 정도 알고 있다가 향교나 서원을 찾아가면 눈에 쏙 들어올 거예요.

 

전국 최대 단감 생산 도시=100년 넘은 단감나무


100년 넘은 단감나무.

창원은 공업단지라는 이미지가 워낙 강해서 농업도시라 하면 다들 낯설어해요. 하지만 창원시에서 제조업체 종사자가 92000명 정도이고 농업 인구가 58000명을 넘으니 절대 적은 숫자가 아니지요


단감은 한 해 생산량이 전국 최대인 40t 규모를 자랑하는데 이는 전국 생산량의 17%에 이를 정도라 합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단감 하면 진영을 떠올려요. ~ 그 까닭이 있지요. 창원에서 생산된 단감이 옛적에는 철도 교통의 요지였던 진영을 통하여 나갈 수밖에 없었던 시절이 있었으니까요. 


70년대까지 철도가 교통체제의 중심인 그 때는 지역을 앞세워 지역 특산물을 팔던 그런 시절이 아니었어요. 어쨌든 팔기만 하면 된다는 생각이 앞섰기에 창원을 내세우지는 않았어요. 그냥 진영을 통하여 나왔으니까 진영단감이라 했던 거지요.


1970년대 들어 창원이 공업도시 이미지가 굳어지면서 이게 단감 판매에는 장애가 돼버렸어요. 공단과 과일은 어쩐지 어울리지 않잖아요


하지만 재미있는 건 창원에서 생산되는 단감이 수출까지 되고 있다고 하면 사람들이 놀라워한답니다. 어디로 수출을 하냐구요? 날씨가 더운 동남아시아로 주로 나가는데요, 쉽게 물러지는 더운 나라 열대 과일에 비해 딱딱한 단감이 아삭아삭한 식감 때문에 완전 인기 짱이랍니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 마산리 연동마을 일대는 우리나라 단감 시배지로 꼽힙니다. 연동마을에서 단감 농장을 하는 하희종(1955년 출생)씨는 할아버지 대에 단감 농사를 시작하였다고 해요. 둥치가 사람 허리만큼 굵은 단감나무가 열 그루 정도 서 있어요. 30~50년 자라도 단감나무는 허벅지 굵기밖에 안 된다니 이런 정도로 굵어지려면 100살은 족히 먹어야겠지요.


창원시청은 창원단감을 홍보하기 위해 2016년 주남저수지 가까이에 창원담감테마공원을 열었어요. 그러면서 하희종씨 농장에 있던 100살 먹은 단감나무를 옮겨 심었어요. ‘창원이 우리나라 단감 시배지임을 입증하는 근거를 보여주려고 노력하는 모습이 아닐까 싶어요.

 

근대농업유산 주남저수지


주남저수지는 공업도시의 이미지가 강한 창원에서 가장 빛나는 자연문화재라 할 수 있어요. 친구들도 가족들과 함께 한 번쯤은 놀러가 봤을 거예요

동판저수지.

친구들은 주남저수지가 몇 개라고 알고 있나요? 1~1, 2~2, 3~3. 정답은 3개랍니다. 정답을 맞힌 친구들이 아마도 거의 없을 걸요^^ 그래요 친구들뿐만 아니라 대부분 사람들도 주남 하나만 있는 줄 알거든요


하지만 주남저수지는 주남·동판·산남저수지까지 쳐서 셋을 모두 아우르는 이름이에요. 그리고 또 한 가지~!! 주남저수지 일대가 2000년 전 먼 옛날에는 바다였다니 정말 신기하지 않나요?


아름답기만 한 주남저수지도 알고 보면 일제강점기와 얽힌 사연이 많아요. 1910년 경술국치 이후 일본 사람들이 조선 농촌으로 진출을 하게 돼요. 당시 일본은 쌀이 모자랐는데 식민지 조선에서 쌀을 가져가 팔면 크게 이득이 되었어요. 주남저수지 일대에 들어온 일본사람은 무라이 기치베에(村井吉兵衛)였어요. 일본에서 연초왕(=담배왕)으로 일컫는 재벌이었지요.


1912900만평에 이르는 무라이농장=촌정농장을 만들었어요. 늪과 황무지를 농토로 바꾸는 작업이었지요. 산남마을에서 대산면 소재지까지 들판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야트막한 구릉들을 2~3m 높이로 둑을 쌓아 이었습니다.

촌정농장 주천갑문. 1912년 준공되었어요.

명치45년5월준공이라 적혀 있어요.촌정농장 주천갑문이라 적혀 있어요.

이 촌정제방=무라이제방은 낙동강쪽이 아니라 지금 주남·동판·산남저수지 쪽에서 물이 들지 못하도록 막는 구실을 했어요. 지금 눈에 보이는 주남저수지 제방은 1922~24년에 처음 쌓은 것입니다. 1920년 설립된 대산수리조합이 주축이었지요. 1928년까지는 주남저수지에서 직선으로 7떨어진 본포 낙동강까지 수로도 내게 됩니다.


그런 결과 소출이 엄청났어요. 1922년 기치베에는 소작료로 벼 27000, 보리 1700, 1000섬을 거두어 갔어요. 조선인들은 제방 쌓는 데는 헐값으로 동원되었고 소작 농사를 지으면서는 비싼 소작료를 내어야 했어요


일본인 지주의 곳간을 채운 것은 곡식이 아니었어요. 바로 조선인 소작농의 고달픔과 괴로움과 배고픔으로 가득찼어요. 일본 사람들은 구석구석 다니면서 참 많은 사람들을 괴롭혔군요~!! 그렇게 보면 주남저수지는 그 자체로 우리나라 근대농업유산이라 할 수 있어요

그냥 있는 그대로의 습지가 아니고 아무렇게나 생긴 농토가 아니었으니까요.

 

주남교 수문과 주남돌다리, 음나무


주남저수지에서 낙동강으로 나가는 주천강 800m 지점에 주남교라는 다리가 있습니다. 원래는 수문이었어요. 지금은 아스팔트가 덧씌워져 있고 철제 난간도 있어 모양새는 영판 다리입니다만 자세히 뜯어보면 그렇지 않아요


먼저 상판부터 살펴보도록 해요. 다리는 보통 콘크리트로 만드는데 여기는 돌을 정육면체로 다듬어 가지런히 쌓고 콘크리트는 돌들을 이어붙이는 데만 쓰였어요. 다음으로 다릿발을 살펴보면 네 개가 모두 돌로 되어 있고 사이는 무지개 모양으로 둥글어요. 가운데 둘은 낮고 양옆 둘은 높아요. 아무튼 전체적으로 조화롭고 아름답다는 느낌이 들지요.


이런 주남교=일제강점기 수문 바로 옆에는 주남돌다리가 있어요. 자연암석을 다릿발과 판석으로 썼는데 주변 풍경과 잘 어울린답니다. 원래부터 용도가 다리였는지를 두고는 의견이 조금씩 엇갈려요. 고인돌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요. 어쨌거나 지금 모습은 1967년 홍수가 나서 허물어졌다가 1996년 창원시청이 새로 만든 것이랍니다.

주남돌다리.

신방초등학교 옆에 있는 음나무 무리가 창원 이야기 마지막을 장식합니당~^^ 이 음나무 무리는 국가에서 지정한 천연기념물이지요. 음나무는 삿됨을 쫓고 잡귀를 막는 주술 효과가 있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요^^:: 


신방초등학교 일대는 주남저수지 들머리예요. 옛날에는 여기까지 물이 들었습니다. 그 물길로 문물이 오갔지요. 외부로부터 섞여들기 마련인 나쁜 기운을 막는 구실을 했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주남저수지 일대는 1980년대부터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철새도래지로 이름이 알려졌어요. 덕분에 주말이면 사철 구분 없이 찾아오는 이들로 북적거리지요. 여기에 일대 들판이 안고 있는 역사적인 사연을 더하고 다호리 고분군 관련 유적들을 되찾아오면 어떨까요?


그렇게 100만 도시에 어울리는 그럴 듯한 수준으로 박물관을 갖추게 되면 이곳이 더욱 멋있어지겠지요. 그 날을 기대하며 창원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친구들 여기까지 오느라 힘들었나요? 재미있었나요? 어쨌든 수고수고^^


김훤주


2017년 경남도민일보가 지역신문발전기금의 재정 지원을 받아 창원 지역 역사 책자 '나고 자란 우리 창원 이 정도는 알아야지'를 펴냈습니다. 창원에서도 마산합포구에 있는 초등학교 5학년 학생들에게 나누어 줬는데요, 블로그에 몇 차례로 나누어 싣습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주어진 원고 분량을 채워야 하다 보니 허술한 구석이 없지 않습니다. 무엇보다도 지금 다시 보니 부끄러울 정도로 구성이 산만합니다. 모두 제 잘못이고 한계입니다. 앞으로 대폭 고칠 기회가 온다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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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쓴이 :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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