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에서 본 세상

꼭 바로잡아야 할 마창노련史

김훤주 2008. 2. 24. 21: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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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마창노련’을 두고 글을 써야겠다고 마음먹은 지는 꽤 오래 됩니다. 1999년에 책이 나왔고, 제 결심은 아마 그보다 한 반 년 뒤 즈음이리라 짐작이 됩니다. 처음에는 화가 많이 났습니다. 지금은 화가 다 가라앉았습니다.

‘내 사랑 마창노련’은 1987년 12월 14일 창립해 1995년 12월 16일 해산한 마산창원노동조합총연합 8년 역사를 담은 책입니다. 발간 주체는 마창노련사 발간위원회, 발간인은 해산 당시 의장이었던 이승필 씨, 글쓴이는 소설가 김하경 씨로 돼 있습니다.


드물게 포폄이 없는 기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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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화가 났던 까닭은, ‘내 사랑 마창노련’(하) 441쪽과 442쪽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마창노련 역사는 앞뒤가 뒤바뀌었고 본말이 뒤집어졌습니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제대로 기록하지 않았습니다. 이른바 ‘특정’한 관점 또는 태도에 유리한 내용만 담겨 있습니다. 의도한 바인지 여부는 알 수 없지만, 어쨌든 결과를 두고 보면 딱 그렇습니다.

게다가 441쪽과 442쪽에는 포폄(褒貶:기리기와 깎아내리기)도 없습니다. 포폄은 역사 기록에서 기본이라 합니다. 김 씨는 같은 책에서 잘못한 주체가 마창노련이 아닌 상대방일 때는 물론이고 마창노련일 때조차도, 나름대로 비판을 해놓고 있습니다.

게다가 때로는 ‘영웅적’이니 뭐니 하는 상투적 언사가 거슬릴 때도 있기는 하지만, 김 씨는 잘한 일에 대해서는 대체로 분명하게 추어주고 넘어갑니다. 그런데 441쪽과 442쪽에는 칭찬도 비난도 없으니, 조금은 낌새가 이상한 구석입니다.


기록되지 않은 역사

441쪽의 작은 제목은 <(가칭)‘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 서명 파문>으로 돼 있습니다. 어떤 방향으로 기사가 쓰일지 미리 짐작이 가는 제목입니다. 아니나 다를까 내용을 읽어보면 짐작했던 바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기록의 대상은 1992년 1월 17일 경남대에서 열린 마창노련 제3차 정기 대의원대회입니다. 이날 기습하듯이 제기된 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회 관련 안건입니다. 여기 ‘내 사랑 마창노련’의 기록은 꼬여 있습니다. 그래서, 당사자이기도 했던 저 같은 사람조차 무슨 말인지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여러 차례 읽지 않으면 안 됐습니다.


객관 사실을 장막으로 가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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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나 있었던 옛날에는, 글을 써서 상대방을 공격하고, 가능하다면 되도록 큰 타격을 입혀야지,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세월이 흐르다 보니 저와 상대방이 노는 물이 태평양도 동해도 낙동강도 아니고 소주잔에 든 수돗물 정도로밖에 안 여겨졌습니다. 여기서 야단법석을 떨어봐야 ‘찻잔 속의 태풍’밖에 안 되겠다…….

지금은, 화가 많이 가라앉은 지금은, 상대에게 상처 입히는 글을 쓸 생각은 없습니다. ‘내 사랑 마창노련’에서 소설가 김 씨가 가려 놓은, 그리고 드러내지 않은 부분을 그대로 되살려 놓고 싶을 따름입니다. 어느 누구를 괴롭히려는 생각은 이미 제 머리에 없습니다.

사실 ‘내 사랑 마창노련’에 잘못 또는 한계가 있다면, 그것은 역사 연구자나 학자가 아닌 소설가에게 역사를 쓰도록 했다는 데 있다고 저는 봅니다. 역사 연구자나 학자였다면, 자료를 정리하는 한편으로, 중요한 관련된 사람들을 죄다 만나러 다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소설가가 쓰다 보니, 자기한테 불편하거나 자기랑 생각이 다르겠다 싶으면, 그 사람이 아무리 중요해도 만나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제가 이렇게 단정하는 까닭은, 아주 중요한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도 김 씨와 만난 적이 없다 했고, 나름대로 중요한 다른 한 사람이 있는데 이 사람도 김 씨와 만난 적이 없다 했기 때문입니다. (소설가 김하경 씨는 저보다 나이도 훨씬 많고, 운동도 일찍 시작했고, 우리 ‘경남도민일보’ 논설실장까지 하셨고, 제가 문학 담당 기자일 때 깊이 있는 인터뷰도 했고, 제가 그 댁에 가서 논 적도 있습니다. 그래서 대면을 할 때는 대체로 ‘선생님’이라 이르지만 이 글에서는 공식성이 크고 객관적인 거리 유지도 필요하니까 때로는 ‘김(하경) 씨’, 때로는 ‘소설가 김(하경) 씨’로 표현하겠습니다.)

그러고 나서 해당 부분은 상상력이나 자기 논리로 채웠습니다. 그렇게 메운 가운데 하나가 바로 441쪽과 442쪽의 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회 관련 부분입니다.


장막에 가려진 역사1


1992년 1월 17일 정기 대의원대회 장소에는 경남노동자협의회의 쟁쟁한 용사들, 이혜자 씨라든지 박성철 씨라든지가 포진해 있었습니다. 물론 한국노동당 건설 마산·창원 추진위원회 집행부 가운데 하나였던 저도 그 자리에 있었습니다.


마창노련 정대에 앞서 ‘상급조직’인 전국노동조합협의회는 중앙위원회를 열어 밤샘 격론 끝에 ‘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회’에 대한 방침을 정리합니다. “①개인의 정당 활동(정치 참여)은 보장한다. ②전노협과 지노협(지역별 노조협의회)의 임원(중앙위원)은 공식 직함을 사용한 정당 활동은 자제한다. ③전노협 임원은 개인 이름을 사용한 정당 활동과 공공연한 정당 활동을 자제한다.”


이 방침은 전노협이 지노협의 상급조직이기 때문에 중앙뿐 아니라 마창노련 같은 지노협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날 정대에서 이혜자 씨와 박성철 씨의 지휘 아래 이를 뒤엎는 안건이 상정됐고, 경노협 쪽은 자기네들 ‘쪽수’를 믿고 그야말로 말 그대로 ‘밀어붙여’ 버렸습니다. 우리 쪽 사람들의, “어떤 일이 있어도 전노협 중앙위원회 결정사항은 지켜져야 한다.”는 외침은 당시 이들 패권주의 다수의 비웃음거리밖에 못 됐습니다.

당시 결정 사항은 ‘마창노련 임원과 집행위원은 정당 활동을 할 수 없다.’였습니다. 이로써 상급조직 전노협의 중앙위원회 결정은 쓰레기통으로 던져졌습니다. 이로써 정당 활동의 자유 보장이라는 노동조합운동의 대원칙도 깨졌습니다. 이로써 전노협 중앙위의 ‘정당 활동을 자제한다.’는 뜻은 ‘정당 활동을 하면 안 된다.’로 왜곡됐고, 또 그 범위도 전노협 중앙위원에서 마창노련 집행위원까지로 크게 넓어졌습니다.


장막에 가려진 역사2


그 뒤 이어진 정대는 경노협이라는 승자가 한국노동당이라는 패자에게 ‘무릎을 꿇어라.’고 강요하는 자리였습니다. 정대를 앞두고 전형위원회를 통해, 마창노련 임원진 후보로 오른 사람들과 (국장급인) 집행위원 후보로 오른 사람들이 앞으로 불려나갔습니다.


불려나온 이들에게 ‘둘 가운데 하나를 골라잡아라.’는 강요가 이뤄졌습니다. 부의장 후보를 비롯한 여럿이 이미 한국노동당 건설추진위원으로 이름을 올려놓은 상태였습니다. 이를테면 추진위원에서 명단을 빼고 활동을 중단하지 않으면 부의장이나 집행국장을 할 수 없다는 꼴사나운 협박이었습니다. 인사 청문회에서 불법을 저지른 후보를 죄인 다루듯이 하는, 딱 그런 풍경이었습니다.

지금도 이름을 대면 아는, 지금은 당시 충격에서 벗어나 일선으로 돌아오기도 한 사람들 대여섯이, 그 때 울면서 회의장을 떠났습니다. 노동조합운동이란 원래 정치 사상 종교 등등 모든 차이를 뛰어넘어 노동자면 누구든 참여하는 운동이 아니냐면서, 노조조직 간부를 못 맡는 조건에 어떻게 노동자 정당에 추진위원으로 가담했다는 점이 꼽힐 수 있느냐면서…….

어쨌거나, 경노협들은 이렇게 해서 자신들과 생각이 안 맞는 사람들을 완전 배제했습니다. 그러면서 당시는 자기들 말을 잘 들었던 허연도 씨를 의장으로, 안준환 씨(당시 세일중공업노조 위원장)를 부의장으로 앉힙니다. 당시 정대가 목표로 삼았던 지도력 확충은 여기서 멈추고 맙니다.(허연도 씨나 안준환 씨는 나중에 내팽개쳐집니다.)

그 전 해 구성돼 활동해 온 전형위원회의 성과를, 경노협은, 단 한 방에 날려버렸습니다. 전형위원회는, ‘내 사랑 마창노련’(상) 395쪽에, “(9월 6일 열릴 예정이던) 정대가 무기한 연기되면서, 임원진 구성과 재정 적자 등 어려움을 조합원과 함께 고민하는 자리를 만들지 못하게 되었다. 마창노련은 시급한 문제 해결을 위해……9월 16일 단위 노조 대표자들로 의장단 선출을 위한 ‘전형위원회’를 구성하였다.”고 적혀 있습니다. 같은 해 7월 수배 중이던 이흥석 의장이 구속된 다음, 안 그래도 지도력이 모자라 어려움을 겪던 마창노련이 완전 지도력 없는 상태로 갔고, 전형위는 이를 어떻게든 극복해 보고자 만든 조직이었습니다.


교묘하게 비틀어 적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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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상황을 소설가 김 씨는 발단에서부터 “전노협 결정 사항에 대한 해석을 둘러싸고 ‘마창한노당’이 마창노련 제3차 정대에서 이의를 제기하고,”라 했습니다. 하지만 이른바 ‘마창한노당’은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전노협 중앙위원회 결정은 그대로 준수해야 한다.”고만 했을 뿐입니다.

중앙위 결정에 무슨 해석을 해야 할만큼 모호한 구석이 있지도 않으며 오히려 단순 명쾌합니다. 여기에다 자기들 이해에 따라 ‘자제한다’를 ‘하면 안 된다’로 갖다붙이고 그 범위를 전노협 중앙위원에서 지노협 집행위원까지로 넓힌 자체가 ‘말도 안 되는’ 결정 위반이고 이는 징계 사유까지 될 수도 있습니다.


이 ‘말도 안 되는’ 안건을 경노협들은 당시 ‘지노협 임원진과 집행위원까지 전노협 중앙위 결의에 따른다.’는 문장으로 표현했습니다. 글자 그대로만 뜯어보면 참 우스운 문장입니다. 전노협 중앙위 결의면 지노협 임원진과 집행위원뿐만 아니라 소속 조합원이라면 모두 따라야 마땅하니까요.


‘말도 안 되는’ 안건을 ‘우스운’ 문장에 담은-또는 담을 수밖에 없었던 사정을 저는 나름대로 짐작해 봅니다. 전노협 결정을 뛰어넘었다거나 어겼다든지 하는 느낌이 들지 않도록 문장을 만들려다 보니 이렇게 됐음이 분명합니다.


그리고 김 씨는 ‘지노협 임원진과 집행위원까지 전노협 중앙위의 결의에 따른다.’는 당시 정대 결의가 무슨 뜻인지 밝혀놓지 않았습니다. 그렇게 밝혀놓지 않은 상태에서 “한노당 추진위원으로 서명한 마창노련 운영위원들은 마창노련에 공개 질의서를 보냈다.”고 뒤 이어 적었습니다.

공개 질의서는 앞에 말씀드린 그런 사정을 전제로 하고 있기 때문에 마창노련 정대 결의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르는 상태에서는 무슨 엉뚱한 일로 딴죽을 거는 정도로 읽힐 수 있습니다. 그 같은 효과는 ‘내 사랑 마창노련’에서 아주 잘 나타나고 있습니다. 결정한 주체와 그 의미는 가려져 있고 그에 항의하는 주체와 그 내용만 나와 있습니다.


이른바 상대방 없이 하는 ‘섀도복싱’입니다. 그런데 정작 독자는 섀도복싱인줄 모릅니다. 그러니 독자들 눈에 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회 또는 추진위원으로 서명한 마창노련 운영위원들이 하는 행동이 제대로 이해되지 않습니다.
441쪽과 442쪽에 이어지는 대부분 문장이 그렇게 짜여 있습니다.


앞에서 말씀드렸죠?


게다가 당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었던, 전형위원회에서 전형된 많은 인사들이 사퇴 의사를 표명하고 그만두는 장면은 통째로 빠졌습니다.
당시 임원이나 집행국장 맡으려고 했던 이들 가운데 대다수는, 그렇게 해서 다들 그만둘 수밖에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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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역사 기록은 이렇게 돼야 합니다. “전노협 결정 사항에 나오는 ‘자제’를 ‘강제’로 간주하고 나아가 강제하는 범위를 전노협 중앙위원에서 지노협 집행위원까지로 확대해 상급 조직의 결정을 위반하려는 세력이 있었다. ‘마창한노당’은 이에 이의를 제기하고 ‘어떠한 경우에도 전노협 중앙위원회의 결의는 지켜져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고 나섰다.” 

그런 다음에, “마창노련 제3차 정대 결의는 정치 활동의 자유를 대폭 제약하는 결과를 낳았다. 마창노련에서 중앙위원급은 의장과 부의장 등 두셋밖에 안 되며 이들만 전노협 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활동 자제 대상에 포함된다. 그런데 마창노련 정대는 자제를 금지라 못 박으면서 대상도 마창노련 집행위원급 최소 열다섯 명으로 크게 늘렸다.


이번 정대는 지도력 확충이라는 목적도 제대로 이루지 못했다. 한국노동당 건설 추진위원은 임원이나 집행위원을 할 수 없다는 결정 때문이었다. 넉 달 가량 되는 전형위원회 활동을 통해 부의장 또는 집행국장으로 물망에 올랐던 이들이, 추진위원을 그만두지 않으면 안 된다는 윽박에 밀려 줄줄이 조직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뿐!


저는 이 같은 사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을 뿐입니다.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히고 싶은 생각은 이미 없어졌습니다. 제가 기록을 남기면 ‘내 사랑 마창노련’이 유일한 기록은 아니게 됩니다. 제가 기록을 남기지 않으면, ‘기록’은 ‘내 사랑 마창노련’ 말고는 없습니다. 그것을 막고 싶을 뿐입니다.


그리고, 저는 글문(말문이라 썼다가 고쳤습니다.)을 트고 싶습니다. 많은 얘기를 들었습니다. ‘내 사랑 마창노련’이, 많은 사람들을 두 번 죽였다는 얘기였습니다. ‘내 사랑 마창노련’의 일도양단 칼날 앞에서, 당시 많은 고민을 했던 사람들이 아무 고민도 없는 밥벌레처럼 단죄를 받았다는 얘기입니다. 어쨌거나 저는 이런 목적으로 글을 남깁니다. 이에 대한 김하경 씨의 글을 기다립니다.
그리고 박성철 씨 이혜자 씨 그리고 나아가 (경노협을 이끌었던) 문성현 씨의 글까지도 기다립니다.


김훤주(전국언론노조 경남도민일보지부 지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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