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경남 창녕 지명으로 전북 전주를 지킨 통일신라

김훤주 2009. 1. 21. 1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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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책장을 뒤적거리다 재미있는 얘기를 찾아냈습니다. 1340년 전인 서기 670년대에, 전라북도 전주를 삼키려는 당나라의 야욕을 통일신라가 경상남도 창녕의 땅 이름을 활용해 물리쳤다는 얘기입니다.

이런 내용이 적혀 있는 책은 이름이 ‘淘婢堂 遺稿’(도비당 유고)입니다. 전북 지역에서 법관을 하시다 변호사로 일생을 마치신 황면주(黃冕周 1920~76)라는 어른께서 쓰신 글입니다. 도비당은 그 어른의 당호(堂號)이고요.

‘도비당 유고’는 1991년 발간됐는데, 어른의 아드님께서 아버지 생전에 남기신 글들을 모은 책입니다. 저는 이 책을 90년대 중반 전주 처이모 댁에 갔다가 얻었습니다. 제게는 그러니까 처가 쪽으로 친척 어른이 되십니다.

‘도비당 유고’ 20쪽에는 ‘全州의 古號考(전주의 고호고)’가 실려 있습니다. 전주의 옛 이름이 무엇인지 살피는 글입니다. 이 글은 전주와 창녕의 옛 이름이 똑같이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였다는 것을 결론으로 삼고 있습니다.

(비사(比斯)와 비자(比自)는 같은 뜻입니다. 비+ㅅ=빗=빛입니다. 벌(伐)과 화(火)도 같습니다. 하나는 소리로 ‘벌’이고 다른 하나는 뜻으로 ‘벌’입니다. 그래서 ‘빛벌’이 됩니다. 이는 한자말 뜻이나 소리로 우리말을 나타냈습니다. 이두 또는 향찰 표기 방법이지요.)

전주와 창녕의 옛 이름이 같다는 증거는 ‘삼국사기’입니다. 권제 34 잡지(雜志) 제3 지리 1 신라. “화왕군(火王郡)-본디 비자화군(비사벌군이라고도 한다). 진흥왕 16년(555) 하주(下州)라 했다 26년(565) 폐했고, 경덕왕이 이름을 고쳤는데 지금 창녕군(昌寧郡)이다.”


제가 텍스트로 삼고 있는 ‘삼국사기’는 이재호가 옮기고 1997년 솔출판사에서 세 권으로 펴낸 것입니다. 앞의 얘기는 3권 76~77쪽에 나오고, 제가 곧바로 이어 적을 내용은 같은 3권 156쪽에 나옵니다.


권제37 잡지 제6 지리 4에 실린 ‘완산(完山)’ 조입니다. “비사벌(比斯伐) 또는 비자화(比自火)라고도 한다.” 여기 이 지리 4는 이전에 고구려나 백제의 영역이었던 지역을 다루고 있습니다. 비사벌 또는 비자화라 일렀던 땅이 신라 말고 백제에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를 바탕 삼아 ‘전주의 고호고’는 이렇게 얘기를 풀어가고 있습니다. 먼저 삼국사기가 전주와 창녕의 옛 이름이 같다고 적은 것이 잘못일 수 있다고 하는 주장을 소개한 다음, 이를 반박하는 형식을 띠고 있습니다.

근거로 일제시대 일본 사람이 쓴 논문도 들었습니다. 일본인 鮎貞房之進(일본식으로는 어떻게 읽는지 모르겠습니다. 한국식으로는 ‘점정방지진’입니다.)이 청구학회(1930년 창립) 기관지 ‘청구학총(靑丘學叢)’ 제4호에 발표한 것입니다.

‘전북 전주 급(及) 경남 창녕의 고명에 관하여’인데, 요지는 “‘삼국사기’의 진흥왕 시절 관련 기록은 문무왕 시절 어떤 목적에 따라 위조된 것이다. 그렇게 위조할 수 있었던 근거가 바로 두 지역의 당시 이름이 같았다는 데 있다.”입니다.

행여 일제 시대 일본 사람 기록이라 꺼리거나 미심쩍어할는지도 모르겠습니다만, 청구학회는 몰라도 ‘청구학총’이라는 계간지는 그리 만만하게 볼 수 없습니다. 일제 시대 국문학자 양주동이, 당시 누구도 못했던 향가 해석을 처음 발표한 데가 바로 이 책입니다.

점정방지진 글의 전제(前提)입니다. “문무왕 5년 (당나라) 칙사 이인이 의자왕 아들 부여융을 웅진 도독으로 삼고 신라로 하여금 친하게 지내며 속국으로 복종하도록 맹약하게 했고 문무왕 4년부터는 백제와 경계를 정하라고 강요했다.

그래서 문무왕이 지도를 따져 백제 옛 땅을 쪼개어 (당에) 줬다는 사실은 문무왕 11년 대당총관 설인귀에게 준 왕의 답서를 보더라도 명백하다. 이에 비춰볼 때, 백제 옛 땅의 경계선 문제는 당대 국제 정치에서 신라 당나라 사이 가장 중요한 현안이었다.”


본론(本論)입니다. “전주가 신라 옛 땅은 아니지만 전라도의 사활을 가늠할만한 지점이었음은 (예나 이제나) 분명하다. 그래서 신라는 적어도 전주만큼은 어떤 일이 있더라도 신라 영역 내에 있었던 것으로 우겨 백제 옛 땅의 경계 밖에 두어야 했다.

그래서 전주(=완산주)는 (당의) 병력을 빌려 점령한 땅이 아니라 전부터 자력으로 이미 점령하여 다스렸던 곳이라 주장하기 위한 필요에서 전주 옛 이름이 마침 창녕과 동일하였음을 기화로 옛 기록을 변조하여 그런 주장의 재료로 제공했으리라 추측하지 않을 수 없다.”


뒤로 부연(敷衍)이 이어집니다. “당 총장總章 2년(=문무왕 9년) (당나라 재상) 이적이 올린 글에 전북은 노산주(함열)魯山州(咸悅) 고사주(고부)古四州(古阜)만 기록하고 완산주는 빠져 있음을 볼 때 당나라도 전주가 백제 옛 땅이 아님을 인정했다고 짐작할 수 있다.”

이 글을 읽고 오래 묵은 의문을 하나 풀었습니다. ‘삼국사기’ 권제36 잡지 제5 지리 3 신라(원래 백제 땅)에 나오는 ‘전주’ 조 관련입니다. “본디 백제 완산(完山)이다. 진흥왕 16년(555)년 주로 삼았다가 26년(565) 폐지했고, 신문왕 5년(685) 다시 완산주를 설치했다.”

어째 이상하지 않습니까? 전주는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이 서기 660년 백제를 멸망시킨 뒤에 신라가 지배합니다. 진흥왕은 백제로 치면 나라가 망하는 의자왕이 아니라 위덕왕 시절입니다. 그런데도 백제 멸망보다 100년 앞선 진흥왕 때 완산주를 설치했다고 적었습니다.
 

‘전주의 고호고’ 주장에 비추면, 바로 이것이 신라 문무왕이 전주를 지키기 위해 사실과 다르게 적은 부분입니다. 신라는 진흥왕 5년에 처음으로 이사부가 주장해서 국사(國史)를 편찬하기 시작했는데, 100년 남짓 뒤에 이를 바꿨다는 얘기입니다.

저는 이런 데서 역사책을 읽는 즐거움을 누립니다. 상상력이 커집니다. 물론 일본 사람 ‘점정방지진’의 주장이 사실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역사에는 그렇게 해석할 수 있는 여지가 열려 있었던 것이고, 그것을 후세 사람들이 나름대로 메워 보려고 애쓴 결과입니다.

저는 창녕이 고향이라, 창녕에 자리 잡았던 ‘빛벌’이라는 ‘가야’의 정신적 후손으로서, 고향을 정복(진흥왕 16년=서기 555년)한 신라에게 한편 역사적 적개심을 품으면서도, 전라도 전주를 지키고자 이런 꾀를 내었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나름 상쾌한 느낌도 들었습니다. 하하.

김훤주

삼국사기
카테고리 역사/문화
지은이 김부식 (솔,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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