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생각-김훤주

시집(詩集)에 어린 학살의 그림자

김훤주 2009. 1. 19. 23: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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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랑 같이 팀블로그를 하고 있는 김주완 선배는 ‘한국전쟁 전후 민간인 학살’과 ‘일본군 위안부’ 전문기자라 할만합니다. 최근에 올린 관련 글만 해도 목록이 이렇습니다.

“아버지, 이제야 60년 한을 풀었습니다”, 학살 유족 “지리산을 동해에 던지고 싶었다”, 한국군 민간인 학살, 60년만에 진실규명 결정, 이스라엘군 민간인 학살, 한국군 학살은?

이런 글을 보다 보니, 아무 생각 없이 집에서 시집(詩集)을 하나 꺼내 읽어도 학살과 관련되는 작품들에 눈길이 한 번 더 가곤 합니다. 참 꿀꿀한 노릇입니다.

올해 들어 그냥 손에 잡히는 대로 집어든, 오하룡 시인의 시집 <내 얼굴>에서도 그런 시를 몇 편 만날 수 있었습니다. 누구나 쉽게 읽고 뜻도 잘 알 수 있는 작품들입니다.

먼저 ‘곰절 골짜기’입니다. 곰절은, 창원 사람이면 대부분 아는데, 지금은 다들 성주사(聖住寺)라고 하는데 창원 동쪽에 있는 통일신라시대 나염 화상이 지었다는 절간입니다.

읽어보면 아시겠지만 옛날 60년 전 여기 이 골짜기에서도 민간인 학살이 있었다는 증언입니다. 여태 증언은 몇 차례 나왔지만 발굴이라든지가 이뤄지지는 않았는줄 압니다.

곰절 골짜기

육이오 동란 직전이었지 곰절 골짜기 어디쯤
아무도 모르게 몰살당한 주검의 끔찍한 소문
무서움에 떨며 들었지 내 친한 친구의 형님
참혹한 시체로 발견되었다는 검은 큰 구덩이
누가 누군지 알 수 없어 팬티 고무줄 보고 찾았느니
허리띠 보고 찾았느니 어른들의 숨죽인 목소리
어린 우리들은 다만 벌벌 떨고만 있었지
그런 사실 좌우익 서툰 대립이 빚은 통분의
양민 학살이었음을 뒤늦게 알았으니 어쩌랴
휴일이라고 무슨 기념일이라고 놀이 삼아
그대들은 곰절 골짜기 좋다고 찾아들지만
끝내 광인 되어 머리 풀고 배회하던 형수 모습
지금 내 시야 막으며 드러나는 검은 구덩이

어딘지가 나와는 있지 않지만, 학살당하기 직전에 풀려난 이야기도 함께 적혀 있습니다. 작품 ‘생환’에 나오는 수필가 하길남은, 1934년생으로 먼저 수필로 등단해서 시집도 여러 권 내셨습니다. 평론 활동도 하시지요.

오하룡 시인은 그보다 여섯 살 아래인 1940년생이십니다. 두 분 공통점은 태어난 데가 일본이고 해방과 더불어 돌아왔다는 점입니다. 먹고살기 어려워 그이 어버이들께서 바다 건너 일본으로 가시지 않았을까 짐작해 봅니다.

어쨌거나 오하룡과 하길남 두 분은 줄곧 창원 마산을 떠나지 않고 살아오셨습니다. 마산과 창원에서는 여태껏 시집에 나온 것 말고도 여러 곳에서 수백 수천 명이 학살당한 자취가 드러나기도 했습니다.

생환生還

좌우익 대립의 그 살벌하던 시절
젊고 패기 찼던 그도 꼼짝없이
비극의 주인공이 됐을 판이다

“끌려갔지요 시동 걸린 트럭에는
사람들이 넘칠 듯 승차해 있었지요
난데없이 살기 띤 사복 하나가
×자식, 너 같은 놈은 죽어야 돼!
거친 폭력을 행사했어요
이 악질새끼는 내가 처치하겠어!
그 사복은 친한 친구였어요
트럭이 떠나자 얼떨떨해 있는 나에게
친구가 말했어요
야! 빨리 집으로 가!”

평생 유능 공직자로
지금 자랑스레 정년하고
만년을 문학에 전념하는 그는
이제 안온하고 여유롭다

내 존경하는 수필가
하길남은 나에게 극적인 젊은 날의
한 페이지를 열어 주었다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를 쓴 유홍준은 “우리나라는 그 자체가 커다란 박물관이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여기 이 시들은, “그보다 우리나라는 그냥 통째로 커다란 공동묘지다.”고 우리에게 일러주고 있습니다.

지금 저에게 우리나라는, 아무리 시집을 읽어도 마음이 차분해지지도 않고 가라앉아지지도 않는 그런 나라입니다. 제 이런 느낌에 잘못이 있는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김훤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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